요시다 요시오

1 프로필

이름요시다 요시오(吉田 義男)
생년월일1933년 7월 26일
국적일본
출신지교토 부 교토 시
학력교토 제2상업학교[1] - 야마시로 고교 - 리츠메이칸 대학
포지션유격수
투타우투우타
프로데뷔1953년
소속팀오사카 타이거스 - 한신 타이거스(1953~1969)
지도자 경력한신 타이거스 감독
(1975~1977, 1985~1987, 1997~1998)
한신 타이거스 영구결번
No.23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루저유격수 출신으로 3번에 걸쳐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재임하며 한신 역사상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1985년)을 이뤄낸 인물. 현역 시절 별명은 우시와카마루(牛若丸) 였고 경기 때 재빠르고 날렵한 플레이로 나는 제비 로도 불렸다. 고쿠테츠 소속이었다면 더 어울릴 뻔 했다(...)

2 현역 시절

교토 제2상업학교 시절부터 출중한 실력으로 일찌감치 프로의 주목을 받아왔다. 종전 이후 학제 개편으로 제2상업학교가 폐교되자 야마시로 고교에 편입하여 야구를 계속 했으며, 2학년 때 고시엔 여름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탈락했고, 이듬해엔 지역예선 결승에서 패퇴한 경력이 있다.


병살타를 처리하는 요시다(가운데). 우측 41번 선수는 2루수 카마다 미노루.

고교 졸업 후 리츠메이칸 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1953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며 프로에 첫 발을 디뎠다. 신장 165cm로 야구선수로서는 상당히 왜소한 체구[2] 였지만 날렵한 몸놀림과 안정된 수비가 일품이었고 날카로운 타격으로 타선에서도 첨병대장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발도 빨라서 도루왕 타이틀을 2회 석권하는 등 매년 두자리수 도루는 꼬박꼬박 찍었다. 1964년 시즌 0.318의 타율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3할 타율을 마크했고 그 해 179타석 연속 무삼진이란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3] 또한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을 9번이나 수상했고 팀메이트인 3루수 미야케 히데시,[4] 2루수 카마다 미노루와 함께 사상 최강의 내야진을 구축하며[5] 최고의 유격수로 이름을 남겼다. 특히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명 유격수 히로오카 타츠로와 불꽃 튀기는 라이벌 전은 그야말로 백미 중 백미.[6]

선수 말년 에는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였으며, 17시즌 동안 1864안타, 66홈런, 434타점, 350도루, 타율 0.267 의 통산 성적을 남기고 196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3 지도자 시절

선수생활을 접은 후 1974년 까지 후지 테레비, 칸사이 테레비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1975년 막장 가네다 마사야스의 후임으로 한신 타이거스 감독에 취임했다.[7] 감독으로선 특이하게 등번호는 1번을 달았다. 시즌 중반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니치 드래곤즈센트럴리그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시즌 막판 힘이 떨어지며 3위로 마감. 취임 당시 "달리는 야구"를 표방한 요시다였지만 정작 시즌 팀 도루는 31개에 그친 것이 뼈아팠다(...). 감독 첫 시즌을 마치고 팀의 주축투수 이던 에나츠 유타카난카이 호크스로 보내는 등[8] 대형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팀의 체질개선을 꾀했고 신예 슬러거 카케후 마사유키와 에나츠와의 트레이드로 영입한 에모토 타케노리가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1976년 센트럴리그 2위로 나름 준수한 성적을 마크했지만, 이듬해인 1977년 팀 성적은 5할 승률 밑으로 떨어지며 리그 4위에 머물렀고 이로 인해 요시다는 감독 재계약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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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한신의 사상 첫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 후 헹가레를 받는 장면.

이후 해설가로 일하다가 1985년 다시 한신의 사령탑으로 롤백했다. 그 해 한신은 랜디 바스-카케후 마사유키-오카다 아키노부로 이어지는 레전드클린업 트리오를 앞세워 21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시리즈 에서 세이부 라이온즈를 4승 2패로 일축하고 구단 사상 최초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룩하였다.[9] 한신 우승 당시 오사카를 비롯한 칸사이 지방 전역에서 우승의 희열을 이기지 못한 한신 광팬들이 도톤보리 강에 뛰어들고 거리의 간판과 기물, 다수의 차량이 파손되는 등 축제를 넘어 거의 폭동에 가까운 분위기로 들썩일 정도로 한신의 우승은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대 사건이었다.[10] 두 번 우승했다간 일본 전역을 초토화 시킬 기세 괜찮아. 한신보다 더 한 팀이 있잖아.

이듬해 시리즈 2연패를 노리며 1986년 시즌을 맞았고 중심타자 바스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타격 삼관왕을 석권하는 등 변함없이 맹활약 했지만 주포 카케후가 부상으로 결장하고 요시다는 투수기용 문제로 투수코치인 요네다 테츠야와 대립하는 등 내홍을 일으키며 시즌 3위에 그쳤으며, 1987년엔 구단 사상 최악의 승률인 0.331을 찍으며 최하위인 6위로 추락하는 쓴잔을 들이키고 요시다는 한신의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11] 10년 후인 1997년 세번째로 한신 감독을 맡아 "Again 1985"를 외쳤지만 성적은 5위, 6위에 그치며 별볼일 없이 퇴임하고 말았다(...).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484승 511패 56무승부(승률 0.486), 생각 외로 초라한 편이다. 우승버프 쩌네염 그리고 한신은 비밀번호의 나락으로...

한신의 두번째 감독직을 그만둔 후 1989~1996년 프랑스 야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4 감독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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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물러난 요시다는 현재까지 TV 아사히의 해설가와 닛칸 스포츠의 객원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1992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0년 에는 고시엔 구장에 개설된 고시엔 역사관의 고문에 취임. 2011년 7월, 프랑스 국대 감독으로 프랑스 야구계에 공헌한 것을 기려 프랑스 야구, 소프트볼 연맹 명예위원 으로 선임되었다.

  1. 전후 학제 개편으로 폐교.
  2. 카더라 성 일화이지만, 요시다의 대학 재학시절 한큐 브레이브스 감독이던 하마자키 신지가 요시다에게 관심을 보이며 영입을 시도했으나 키가 작다는 것을 알고 "그런 꼬맹이를 데꾸와서 뭐해" 라면서 단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웃긴 건 하마자키 자신도 154cm의 루저 오브 루저 였다는거(...)
  3. 투고타저 시대이던 당시로선 엄청난 기록이었다...
  4. 수비에 관해서는 요시다와 쌍벽을 이루는 명 3루수 였고, 882경기 연속출장과 700경기 연속 전 이닝 출장이란 기록을 세운 적도 있다(이 기록은 2004년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경신했다). 그러나 1962년 9월, 시합 전 캐치볼 도중 공에 왼쪽 눈을 강타당하는 사고로 시력을 잃고 1967년 아쉽게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5. 이 당시 한신의 투수들은 내야 땅볼이다 싶으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마운드를 고르며 마음 편히 다음 타자를 맞이할 준비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흠좀무
  6. 이때 쿄신센(요미우리-한신전을 일컫는말) 3연전에 대해 첫 경기는 무라야마 vs 나가시마- 경기를 보고 그 다음에는 히로오카 vs 요시다의 명 수비를 보는 재미로 본다 라는 말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히로오카-요시다 둘 다 서로를 가리켜 "굉장히 뛰어난 유격수다" 라고 틈만 나면 상대를 추켜세운 희한한 라이벌 관계 였다는 점이다.
  7. 이 당시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나카니시 후토시 감독과의 다소 불편한 관계로 인하여 자유계약으로 풀린 장훈이 요시다에게 한신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고 요시다가 단박에 OK하여 장훈이 오사카에 집까지 마련했지만, 뒤늦게 영입 경쟁에 뛰어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장훈을 내줘야 했다.
  8. 이 트레이드의 배경엔 요시다와 에나츠가 여러 차례 의견 차이로 대립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는 속 사정도 있다.
  9. 당시 세이부 감독은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히로오카 타츠로였다. 히로오카는 이 해를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했다.
  10. 그러나 우승 뒤 흥분한 나머지 한신 팬들에게 사랑받던 랜디 바스를 닮았다 하여 팬들이 어느 통닭집호호백발 할아버지의 마네킹을 도톤보리 강에 집어던진 뒤 타이거스의 1987~2002년의 16년간의 암흑기가 찾아온, 이른바 "커넬 샌더스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 이 때였다...
  11. 이 해 요시다의 등번호였던 23번이 영구결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