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화
수메르 신화에서 대홍수가 일어나고 살아남은 인류의 조상. '지우수드라'라고도 한다. '수메르판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1]
애초에 대홍수 설화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으니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조차 이와 엇비슷한 설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니... 간혹 환빠관련 떡밥으로도 쓰인다.
아트라하시스는 수메르 지우수드라 이야기의 아카드어 버전으로 보이며,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우트나피쉬팀으로 등장한다. 아트라하시스로 불리는 판본에서는 독립된 이야기로 존재한다.
어느 날 수메르 신들의 실권자 엔릴이 지상의 난잡한 부르짖음을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 지상에 대홍수를 일으키고 자신들은 우주선을 타고 잠시 지구 밖으로 대피한다는 사실을 신들을 불러모아놓고 해당 계획을 '인간에게 누설하지 않음'을 전재로 비밀리에 알렸다.대부분의 신도 이에 찬성하였으나 인간 창조에 관여한 엔키만은 인간을 돕기로 하고 인간에게 직접 누설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라는 판단하에 그의 충실한 사제이자 도시의 왕이었던 아트라하시스를 갈대벽 밖에 세워두고 '갈대벽'에게 혼잣말을 하고 그가 엿듣게 하는 편법으로 그에게 홍수가 일어난단 사실을 알려준다.
동시에 아트라하시스에게 가로, 세로,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에 이층 구조인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 아트라하시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방주를 건조, 엔키에게 예고받은 날 마을 사람들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동물들을 배에 태우고 하늘에서 해가 뜰 때 그 문을 봉했고, 신들이 로켓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이용해 우주로 대피함과 동시에 홍수가 시작됐다.
그 날 이후 40일간 홍수가 지속되었고[2], 아트라하시스 부부는 맨 처음 비둘기를 날렸으나 비둘기가 다시 돌아와 물이 덜 빠진 것을 알았고, 다음 제비를 날렸으나 제비가 다시 돌아와 물이 덜 빠진 것을 알았고, 마지막으로 까마귀를 날려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배를 정박하고 하늘에 번제를 드리자, 비축해둔 식량이 다 떨어졌는지 굶주림에 시달리는 신들이 주변에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결국 살아남은 인간이 있음을 엔릴이 알게되고, 엔키를 추궁끝에 그가 결과적으로 맹세를 어겼음을 깨닫고 노하여 남은 인간들도 모조리 씨를 말리려 하나, 엔키가 "우리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인간과 협력해야 하지 않겠음?" 식의 납득할 만한 달변으로 그를 달랬고, 신들은 아트라하시스 부부에게 영생을 약속하며 신들의 낙원 '딜문'에서 거처할 권리를 부여했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길가메쉬가 그에게 불사의 비법을 물으러 갔을 때 길가메쉬가 1주일동안 잠을 참는 것을 대가로 비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지만 사흘째 잠들어버려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만 '손님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예의'라는 아내의 간청으로 길가메쉬에게 젊음의 풀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길가메쉬는 겨우 얻은 불로초를 뱀에게 먹튀당한다.
2 역사성
2.1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그러나 이런 퇴적층이 국지적인 홍수에 관해 증언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다른 유적지,특히 우르에서 경우 12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처녀지까지 발굴이 이루어진 에리두에서조차 "대홍수"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주목할만하다. 따라서 고고학은 여러 시기에 일어난 지역적 홍수의 흔적은 드러내 주었지만 메소포타미아 전체에 영향을 미친 홍수의 실재를 확인해주지는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조르주 루, <메소포타미아의 역사1>, 한국문화사, 2013/12/10, P.142 |
그러니 텔의 밑바닥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초대형 대격변의 증거를 찾으려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비교적 자주 일어나며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자연 현상을 전 지구적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조르주 루, <메소포타미아의 역사1>, 한국문화사, 2013/12/10, P.144~P.145 |
고로 실제 사건은 아니다.
2.2 역사적 배경에 관한 추측
1. 이 목록에서 대홍수는 수메르 도시국가 전체에 대한 슈루파크의 우선권이 끝나는 시점을 나타낸다. 2. 메소포타미아 대홍수 이야기의 새 판본에 나오는 영웅은 슈루파크의 왕이나 왕자이다. 3. 슈루파크(텔파라)에서 고대 왕조 시대 초기에 있었던 중요한 홍수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4. 마지막으로, 슈루파크는 기원전 제3천년기에 문화적 중심지였다. 수메르학 학자들에게 잘 알려진 파라의 토판들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기원전 2900년경 슈루파크에서 일어난 끔찍한 홍수는 이 도시의 우선권을 잃어버리게 한 패전과 동시에 일어난 것 같다. 이 두가지 재앙(분명 신들의 노여움 때문으로 인식 된다)이 이상하게도 함께 일어난 사실을 지역 서기관들이 기록했고, 이것이 나중에 슈루파크 왕조와 함께 수메르 제왕 목록에 첨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나 가설의 맥락을 따라 좀 더 가설을 세워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슈루파크는 이 시대에 크게 확장되어 있었는데, 이 재앙이 발생할 당시 그곳에 인구 과잉과 기근이 있었다면 이 도시의 사제들은 우리가 『아트라하시스』에서 읽었던 교훈적인 이야기의 원형을 구성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손에 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어 대홍수 사건과 대홍수 신화는 서로 결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영속화된 것은 신화와 그 영웅이었다. 히브리 전승을 거쳐, 그리고 나중에는 유대교-기독교 전승을 거쳐 전해져 내려온 이 신화는 끊임없이 우리를 열광시키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조르주 루, <메소포타미아의 역사1>, 한국문화사, 2013/12/10, P.145~P.1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