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최초의 문명. 이들이 믿던 수메르 신화는 널리 퍼져 다른 여러 신화들의 뿌리나 거름이 되었다.
2 유래
수메르 문명은 기록이 남아있는 문명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1][2]이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중앙 아시아나 서아시아의 고원지대 어딘가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대략 기원전 3500년 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기원전 2000년 쯤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아카드지방에 살던 셈족 계통의 아카드 사람들이 수메르 지방을 점령하고 바빌로니아를 세웠다.
"수메르인"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을 부르던 말이었다[3]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웅상기가(ùĝ saĝ gíg-ga) "검은 머리"[4]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땅은 키엔기르(Ki-en-gir) "고귀한 주님의 땅"[5]이라고 불렀다. 아카드어 "슈메르"는 아마도 이 것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왜, 아카드인들이 이 남쪽 땅을 "슈메루"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다.
원래 학자들은 수메르에 앞서 바빌로니아 문명을 먼저 발견했기 때문에 당연히 바빌로니아 언어와 문자(쐐기 문자)도 수메르보다 먼저 발견했었다. 그런데 유물들을 발굴하다 보니 분명 쐐기문자인데 기존 방법으로 해석이 안되는 서판들이 자꾸 발견되어서 학자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메르어-아카드어 사전[6] 역할을 하는 서판들을 발견하면서 수메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서판 사진(영어주의) 즉, 고립어인 수메르어가 쐐기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후에 들어온 셈어 계통인 바빌로니아가 쐐기 문자를 차용해 자신들의 언어를 표현하게 된 것.
수메르인은 셈어족이 아니고, 언어학자들이 수메르어의 바탕이 된 기저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때 침입자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초기 우바이드기(기원전 5200년~4500 또는 6090~5429)에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이후에 문화적 단절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졌으며 기존의 원주민들과도 평화적인 상호교류 끝에 서서히 융합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이 지방에 정착한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풍푸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하였다. 당시에는 강우량이 현재 보다 적었기 때문에, 척박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려 한 모든 인종들의 도전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잘 관리하여 농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수메르어에는 운하, 제방, 저수지등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발견된다. 수메르 인들은 북부지방에서 농업 기술을 습득한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농부들이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바이드 토기는, 북부의 사마라 유적(기원전 5700년~4900)의 토기와 연속성이 발견된다. 사마라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 중류 지방에서 최초로 원시적인 형태의 경작을 시작한 부족들이다. 우바이드 유적과 사마라 유적의 유사성은 라르사 근처의 텔 아웨이리 (1980년에 프랑스 발굴단에 의해 발굴됨)에서 발견된 사마라 토기와 유사한 전기 우바이드 토기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북부 출신 농경민족이 제정일치 사회구조를 이룩하고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남쪽의 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어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3 수메르인의 정치구조 및 풍습
기원전 40세기 후반까지, 수메르는 10여개의 독립된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대체로 수로와 경계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도시의 수호신이나 수호여신을 모시는 사원이 위치하였다. 도시는 엔시라고 불리는 성직자나 루갈이라고 불리는 왕이 통치하였다. 다음은 수메르의 주요 도시들 위치순서대로(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열한 것이다. 괄호 안은 현재의 지명으로, 이들 중 이름이 Tell- 로 시작하는 것들은 잔해가 묻혀서 생긴 인공언덕을 가리키는 것이다.
- 마리 (Tell Hariri) : 엄밀히 말하자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잇는 교량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위치는 시리아 국경 내에 있다.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에게 파괴되기 전까지의 국가 외교문서 아카이브가 발굴되어 당시의 정세 파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아가데 : 아카드 제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아카드라고도 한다. 정확한 위치는 현재 불명.
- 키시 (Tell Uheimir & Ingharra) : 수메르 내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 중 하나로, "키시의 왕(Lugal)"은 일반적으로 가장 강한 지도자가 자칭하는 호칭 중 하나였다. 칭호 중 엔/엔시는 한 도시의 지배자, 루갈은 그보다 높은, 수메르를 통일한 건 아니지만 그 중 가장 서열이 높고 영향력이 강한 지도자들의 호칭이었는데 전승상 첫 번째 루갈을 배출한 도시가 키시이기 때문.
- 보르시파 (Birs Nimrud)
- 니푸르 (Nuffar) : 엔릴의 도시이며 수메르 내에서 가장 종교적으로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도시. 많은 루갈들이 "니푸르에서 엔릴에게 선택받은" 이라는 수식어를 차용했다.
- 이신 (Ishan al-Bahriyat) : 라가시 참조. 우르제3왕조가 멸망한 이후 망명자들에 의해 이신 왕조가 설립되었고, 라르사를 지배권에 두며 짧은 시간동안 패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 시기를 이신-라르사 시대라고 한다.
- 아다브 (Tell Bismaya)
- 슈루팍 (Fara)
- 기르수 (Tello) : 라가시 참조.
- 라가시 (Al-Hiba) : 주변의 이신, 기르수를 정복하고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영역국가의 첫발을 내딛은 곳이다. 이후 세 도시는 수로로 연결되었으며 서로 모시는 다른 신들 사이에 혈연관계를 추가하는 등 종교적인 통합의 첫걸음을 딛기도 했으며, 초기 이웃도시 움마(Umma)와의 긴 전쟁은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전쟁 중 하나이다. 라가시의 엔시 중 하나인 구데아는 사실 업적면에서 딱히 인상적이진 않지만 우연히 그의 기록이 많이 살아남은 덕분에 유명하다. 라가시의 주 신전 에-닌누는 닌기르수("기르수의 주인")에게 봉헌되었다.
- 바드-티비라 (Al Medina)
- 우루크 (Warka) :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인 메트로폴리스.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가 바로 이 우루크의 왕이다. 해독 초기에 이름이 "URUK"으로 재구되어 정착되었지만 현재는 이 도시의 수메르어 이름을 UNUG으로 재구하고 있다. 우루크기 참조.
- 라르사 (Tell as-Senkereh) : 이신 참조.
- 우르 (al Muqayyar) : 우르제3왕조로 유명한 도시. 약 100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시적으로 아카드인이 아니라 수메르인에 의한 정치적 통제권을 되찾았고, 3대째 아마르-신은 왕의 신격화라는 고대 정치적 종교 통제의 중요한 진보(...)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남겨져 있는 수메르어 문서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아브라함도 성서 및 쿠란에 따르면 이곳 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에리두 (Abu Shahrain) : 일부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엔키의 도시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에리두의 위치는 내륙이지만 당초에는 항구였다.
중소 도시:
- 시파르 (Abu Habba)
- 쿠타 (Tell Ibrahim)
- 딜바트 (Tell ed-Duleim)
- 마라드 ((Wanna es-) Sadun)
- 키수라 (Abu Hatab)
- 자발라 (Tell Ibzeikh)
- 움마 (Tell Jokha) : 위의 라가슈와의 전쟁을 벌인, 역사상 최초로 기록이 남은 패전국 중 하나.(...)
- 키시가 (Tell el-Lahm)
- 아완
- 하마지
- 에쉬눈나
- 악샤크
- 짐비르
수메르인은 매해 봄마다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두무지(탐무즈)의 부활제를 올렸다. 그들은 두무지를 성장의 신으로서, 대지의 여신이 탐하는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서 숭배했다. 이러한 풍년제 기간에는 모든 아내들이 자신의 남편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남자와도 잘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인정받고는 자유롭게 사랑의 상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하나 남편 이외의 연인의 정액은 밖으로 흐르게 하여 스스로 임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4 수메르어
수메르어는 계통론적으로 볼 때 고립어에 해당한다. 수메르어와 친족 관계에 있는 언어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반면 수메르어 해독에 결정적 역할을 한 아카드어는 셈어족임이 알려져 있다. 수메르어 연구의 최대 장애물이 바로 수메르어의 친척 언어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비교적 합의된 연구 성과가 존재하는 아카드어와 달리 수메르어는 아직까지도 여러 학자들의 학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학자마다 전사 방식과 문법 분석이 다르고, 이를 배우는 학생들은 고통받는다. 애초에 배우는 사람이 있어?!
학자들이 어느 정도 합의한 수메르어 및 그 표기법의 특징은 아래 몇 가지가 있다:
1) 유형론적으로 교착어에 해당한다. 굴절어인 아카드어와 달리 명사 곡용 및 동사 활용에서 형태소 사이의 경계가 확실하며, 특히 동사 활용의 경우 문법 표기 여러 개가 순서대로 어간에 부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의미한정사(determinative)가 존재하여 선행하는, 또는 후행하는 단어의 독음과 의미를 한정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diĝir('신'이라는 뜻이다) 또는 an이라고 읽는 쐐기문자를 신의 이름 앞에 적음으로써 diĝir 뒤의 단어가 신의 이름임을 나타낸다. 이때 diĝir는 소리내어 읽지 않으며, 전사 시에는 위첨자로 d로 나타낸다. (e.g. ^d Nanna) 의미한정사는 선행하는 경우(신의 이름을 표지하는 diĝir), 후행하는 경우(지명을 표지하는 ki) 모두 존재한다.
3) 능격-절대격(Ergative-Absolutive) 언어[ * 수메르어의 모든 문장에서 능격성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능격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능격-절대격 언어로 분류한다. 이는 대부분의 능격-절대격 언어에 해당되는 주석이다.]이다. 능격-절대격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되는 개념인 주격-대격(Nominative-Accusative)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어, 영어를 비롯한 언어에서는 자동사문의 의미상 주어와 타동사문의 의미상 주어가 같은 격(주격)을 취한다. 이와 같은 언어를 주격-대격 언어라 한다. 그러나 바스크어를 비롯한 언어에서는 자동사문의 의미상 주어가 타동사문의 의미상 목적어와 같은 격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자동사문의 의미상 주어와 타동사문의 의미상 목적어가 취하는 격을 절대격, 타동사문의 의미상 주어가 취하는 격을 능격이라 한다. 수메르어의 경우 완료상 문장에서 능격성이 두드러진다.
5 수메르의 역사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선사시대의 우바이드기와 우루크기에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9세기경 초기 왕조 시대부터 역사적 기록들이 드물게 발견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26세기경 라가시기부터는 많은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고대 수메르는 기원전 24세기에 아카드 제국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구티인 지배 시기를 지나, 기원전 22세기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가, 20세기경에 아모리인이 침입한다. 아모리인의 이신 왕조는 기원전 1730년, 메소포타미아가 바빌로니아 지배하에 들어갈 때까지 유지된다.
5.1 우바이드기
우바이드기(期) 동안에 특징적인 양식을 갖는 양직의 도기류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만 영역에 분포되고 있다. 당시 수메르인의 종교적 중심지는 에리두였으나, 인근의 도시인 우루크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에리두를 추월하게 된다. 고고학적으로 우바이드기에서 우루크기로의 이동은 느린 물레에서 만들어진 채색 토기에서, 빠른 물레에서 양산하여 만든 비채색 토기로 바뀌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제4우바이드기에서 초기우루크기로의 이러한 변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2 우루크기
우루크기 (기원전 4500년~3100년)에 이르러, 대량의 물품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운하와 수로를 통해서 거래되면서, 거대한 신전중심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고, 집권화된 관료층이 전문화된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이 시기에 노예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많은 공예품과 우루크의 식민지들이, 터키의 타우루스 산맥과, 지중해 서안, 이란 중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수메르 상인들과, 이민자들에 의해서 우루크기의 문명은 모든 주변세력에게 영향을 미쳤고, 점차 주변세력들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될 만큼 성장하였다. 그러나 수메르의 도시들은 먼 거리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할 만한 군사력은 갖추지 못했다.
우루크기의 끝은 기원전 3200년~2900년 경의 기후 변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 홀로세 최적기후(Holocene climatic optimum)라고 불리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다.
역사적 기록들은 대체로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와 같은 왕은 지중해, 타우루스, 자그로스까지 영역을 넓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보다 조금 전에, 에리두 문화가 우루크 문화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정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는 엔메카르와 길가메시와 같은 왕들도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5.3 초기 왕조
고대 수메르의 왕들의 목록이 초기 왕조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많은 고대 왕명표와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이름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목록에서 다른 문서에서 찾을 수 있는 첫번째 왕은 에타나(Etana)로, 키시의 첫번째 왕조의 13번째 왕이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첫번째 왕은 키시의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로 왕조의 22번째 왕이자, 끝에서 두번째 왕이며,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당시 패권이 키시에서 우루크로 넘어갔던 것으로 미루어,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움마의 제사장-왕, 루갈자게시(Lugal-Zage-Si)는 라가시 왕조를 전복시키고, 우루크를 정복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고,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그는 셈어족의 아카드왕 사르곤이 등장하기 이전의 마지막 수메르인 왕이었다.
5.4 라가시 왕조
라가시 왕조는 많은 유적들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중 기록상 최초의 제국은 에안나툼의 제국으로, 그는 수메르의 키시, 우루크, 우르, 라르사 등 모든 도시들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경쟁 도시였던 움마로 부터는 조공을 받았다. 또한, 그의 영토는 페르시아 만을 따라 엘람의 일부까지 미쳤다. 그는 통치를 위하여 공포(terror)정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독수리 석비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5.5 아카드 왕조
셈어족의 아카드어는 기원전 2800년경 부터 사용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500년경 부터는 완전히 고대 아카드어로만 씌어진 책을 찾을 수도 있다. 고대 아카드어가 가장 널리 사용된 기간은 사르곤왕 때에(기원전 2334년~2279년) 경이지만, 그 기간에도 대부분의 행정관련 서판에서는 서기들이 주로 사용하던 수메르어로 씌어져 있다. 겔브(Gelb)와 베스텐홀츠(Westenholz)는 세가지 고대 아카드어 방언(사르곤이전, 사르곤시대와 아가데지방, 우르 제3 왕조기)을 구별해 냈다.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는 대략 1000년정도 (기원전 2800년~1800년) 사용되다가 결국에는 수메르어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소르킬드 야콥슨(Thorkild Jacobsen)은 사르곤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역사적 연속성의 단절이 거의 없다고 보고, 셈어족과 수메르어의 충돌이 너무 많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어도 사르곤이 엘람을 정복했을 때 엘람인들에게 아카드어를 잠시동안이나마 강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5.6 구티족 지배와 수메르 부흥기
기원전 2200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한 아카드 제국이 구티족에 의해 무너진 뒤, 새로운 수메르의 지도자, 라가시의 구데아(Gudea)가 부흥하기 시작하였고, 예술이 발달하고, 사르곤을 따라 신권 정치를 표방하였다.
이 무렵, 우르-남무 왕, 슐기 왕 등의 우르 제3 왕조가 북부 메소포타미아 까지 영향력을 미치면서 수메르의 마지막 부흥기를 맞았다. 이 시기는 수메르어 기록이 가장 많이 남은 시기이기도 하며, 중앙집권이 강해졌다. 그 일례로 초대 왕인 우르-남무와 그 아들 슐기, 손자 아마르-신의 비문을 비교하면 왕에게 붙는 수식어가 점점 화려해지다가 아마르-신은 자기 이름 앞에 신의 이름 앞에 사용되는 결정문자 DINGIR를 붙이기에 이른다. (결정문자는 한자의 부수처럼 뒤에 따라오는 단어의 의미를 한정하는 역할을 하며 발음하지는 않는다. DINGIR Enlil 이라고 쓰면 그 뒤에 나오는 이름인 Enlil이 신의 이름을 나타낸다는 뜻. 줄여서 위첨자 d로도 쓰며, d Amar-Sin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 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미 수메르 지역은 오랬동안 셈족이 대거 유입되면서 셈어족의 성격이 더욱 진해져 있었으며, 이미 오랜 시간동안 셈어족이 아닌 수메르어와 셈어족에 속하는 아카드어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서쪽에서 진출해온 아모리족은 후에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게되며, 이들은 같은 셈어족에 속하는 아카드어를 사용하게 된다. 중세에 라틴어가 계속해서 사용되었던 것 처럼, 설형문자가 계속해서 쓰이는 동안에는 수메르어도 여전히 학교에서 종교적 언어로 가르쳐졌다.
생태학적으로는, 수메르 땅의 염분의 증가로 인하여 농업 생산력이 감소하였다. 농업 용수의 증발량이 많아 지면서 토양에 녹아있는 염분이 증가한 것이 농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기원전 2000년경 부터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규모가 작은 도시 부터 서서히 수메르 문화가 와해되어 간다.
5.7 쇠망
엘람인의 침략과, 이비-신 지배 하(기원전 2004년)에서의 약탈 이후, 수메르는 다시 아모리 족의 지배하에 들어간다.(이 때 청동기시대로 접어든다.) 기원전 20세기~18세기의 아모리족 도시국가는 수메르의 왕명 목록에 "이신 왕조"로 기록되어 있고, 함무라비왕(기원전 1792년~1750년 재위)의 바빌로니아로 넘어간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토양의 염분 증가로 인한, 남부 이라크 지방으로부터 북부 지방으로 의 인구이동 시기와 일치한다. 이 지방에서 토양 염분 증가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경작된 토지에 배수가 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조한 기후로 인한 수분의 증발은 토양 속에 소금 결정을 축적시키고, 결국은 수확량을 결정적으로 줄어들게 만들었다. 아카드 왕조와 우르 제3 왕조 동안, 밀 보다 염분에 더 강한 보리를 많이 경작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기원전 2100년~1700년 사이 인구는 거의 3/5로 줄어들었다.
6 유사역사학
환빠들이 즐기는 떡밥 중 하나로, 김성일이 한때 심취한 학설이기도 한데 현재의 김성일은 유대인 그리고 한민족이 선민이기 때문에 수메르를 부정적으로 본다. 즉 야훼의 뜻을 어긴 민족이라는 것
80년대 반미작가 윤정모가[7][8] 여기 빠져들어서 비슷한 수준의 에세이를 내었는데, 결국 주화입마해서 관련 작품을 발표한다. 초판은 그냥 저냥한 알고보니 한민족인 수메르인들이 애정 이야기였는데 2010년 12월에 다산서당에서 나온 3부작에서는 완전한 영웅신화로 그린다. 다이쇼 덴노 말기에 일본에서 쏟아져 나온 자위형 대륙 소설의 형식을 고대 신화에 충실히 담아 넣은 것. 여기서 보면 한민족이 세운 수메르는 로마보다 화려하고 이집트보다 과학적이며 최초로 민주혁명을 이룬 국가이다. 그럼 왜 망했냐
그니고 영감을 준 사람이 문정창[9]이라는데서 묵념을(...).
환빠를 능가하는 흑인 우월주의자들은 수메르를 흑인이 건설했다고 한다, 뭐 수메르 인들이 검은 색깔의 머리를 가지고 피부가 어두웠다고는 했으나, 그런 외모는 중동계 사람들 중에 흔하디 흔한 외모이다. 사실 흔히 금발 이미지가 강한, 서유럽에서도 흑발은 드물지 않다.
한편 쿠르드족또한 자신들이 수메르의 직계후손이라고 주장하고있다. 쿠르드족의 근원에 대해서 이미 고대시대부터 수메르어 'guti' 라든가 쿠르드족 혹은 그 조상들이 그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는데다가 심지어 일부 어휘들이 쿠르드어와 수메르어가 겹치는 부분들도 발견되기 때문인데... 쿠르드족의 조상인 인도유럽어계 이주민들이 선주민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 ↑ '기록이 남아 있는 문명 중'이라는 단서가 붙어있는 만큼, 비슷한 규모의 문명권 혹은 도시는 의외로 많이 존재한다. 특히 인더스 문명권 지역에는 수만 명이 살았던 도시의 터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자로 기록된 역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상 가장 오래된 문명의 자리는 수메르 문명이 차지한다.
- ↑ 괴베클리 테페가 무려 기원전 1만년, 지금으로부터 12,000년 전의 문명이라 하여 고고학을 뒤집니 하는 이야기가 흔하지만 문명이라 불리기에는 규모가 다르다. 문명과 문화는 고고학적으로 다른 개념이며 더 오래된 문화도 있다.
- ↑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키엔기르(Ki-en-ĝir)라고 불렀다. 다만 아키드인들이 기록한 문자나 음성으로는 정확히 수메르란 발음도 아니다. 다만 노아의 아들인 셈(Shem)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주장은 있다.
- ↑ 온 동물중에 머리만 검은 것은 오직 사람뿐이니 '검은 머리'는 즉, '사람'이란 뜻이다.
- ↑ ki(땅)-en(주인,통치자)-gir(고귀한)
- ↑ 정확히 말하면 단어대 단어를 나열한 내용
- ↑ 윤정모는 80년대 민주화 관련 작품을 대단히 많이 남긴 작가이다. 문제는 이런 작가가 거의 극우적인 사람들이나 찾는 주제를 스스럼없이 믿고 있다는 점, 사실 윤정모는 단순한 민주화 주제를 넘어서서 극단적인 반미,반일, 반독재를 자신의 작품에서 그리는데 고삐에서의 주한미군,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의 일본,나비의 꿈등에서의 친일파나 박정희등에 대해서 제 3자가 보기에도 지나칠정도로 비난하는
거의 육두문자와 18금이 기본것을 본다면 최근의 행보는 극단적인 민족우월주의 작가의 진화라고 볼수도 있다 - ↑ 한국에선 일제강점기와 분단현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자' 식의 민족주의가 개혁진보 사상으로 분류되지만, 민주주의 선진국에선 민족주의는 전형적인 우파의 이념이다. 흔히 기득권 우파세력이 '우리는 위대한 민족. 그러니 우리끼리 싸우면 안된다!'면서 빈부격차, 사회갈등을 덮어버리기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한다는 비판이 많으며, 여기서 한발 더나가 외국인(인종) 차별과 모든 사회모순을 해결할 메시아를 부르짓는 단계에 이르면 나치같은 극우파시즘이 된다. 실제 1980년대 반독재 운동권 내에도 반미,반일만 제외하면 지도자에 대한 무한찬양, 절대적인 민족우월주의 등 극우에 가까운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 ↑ 환빠의 시초격으로써, 더불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