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크 섬 전투

웨이크 섬 전투
태평양 전쟁의 일부

[1]
날짜
1941년 12월 8~23일
장소
웨이크 섬
교전국미군
미합중국 해병대
일본군
일본 제국
지휘관 윈필드 S. 커닝햄
제임스 P.S. 데브룩스
헨리 T. 엘로드[2]
이노우에 시게요시
야마구치 다몬
결과
일본군의 승리
병력미해병대 449명

기타등등[3]
경순양함 3척
구축함 6척
경비정 2척
병력 수송선 2척
피해규모122명 사망[4]
49명 부상
2명 실종
항공기 12대 손실
820 사망
333 부상
경순양함 1척 중파
구축함 2척 침몰
운송수단 2대 파괴
항공기 8기 손실

1 개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벌어진 일본군의 미국령 웨이크 섬 공략전. 사실 섬이나 수비대 규모를 생각하면 가벼운 교전 끝에 함락돼야 정상이고, 일본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특히 미 해병대는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입증한 전투였다.

2 배경

진주만 공습을 준비하면서 일본군은 서태평양상의 미국령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최우선적 공격 대상은 필리핀마리아나 제도 남단의 섬이었으며, 중부 태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섬 웨이크도 겸사겸사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웨이크 섬을 냅둘 경우 향후 태평양에서 작전하는 제국해군 연합함대가 미군 항공세력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 이유였다.

웨이크 섬은 일본의 팽창위협에 맞서기 위해 1939년부터 군사기지화가 시작되었으나 수비대 규모는 적었고 방공시설이나 장비, 활주로 등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전 직전에 해안포만큼은 제대로 배치했고, 엔터프라이즈가 실어다준 F4F 와일드캣 12기가 막 배치된 상황이었다.[5]

3 전투

3.1 일본군의 공습

진주만 공습 직후, 웨이크 섬에도 일본군의 공습이 개시되었다. 단 1번의 공습으로 주기장에서 대기중이던 와일드캣 8기 중 7기가 완파되고, 여러 방어시설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를 확인한 일본군은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벌어진 괌 전투에서 일본군은 이틀동안 섬에 포격을 가한 후 상륙했는데,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20분만에 미군 수비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에 벌어진 공습에서 일본군은 잔존 와일드캣 4대의 요격을 받고 2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웨이크 섬이 만만치 않다는 증거였지만 일본군은 이를 무시했다.

3.2 1차전

12월 11일 새벽, 3일간에 걸쳐 대대적인 공습으로 충분히 섬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한 일본군은 상륙을 개시했다. 순양함들의 포격에도 미군의 대응이 없자 일본군은 웨이크 섬의 방어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생각하고 룰루랄라 해안으로 다가왔으나 사실 미군은 일부러 포격을 하지 않고, 일본군 함정들이 해안포의 유효사거리 내로 진입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해안포는 군함에서 떼어온 5인치 포 6문이었다.

사거리에 일본 상륙함대가 들어오자, 미군 해안포는 포격을 개시했고 일본 함대는 집중포격을 얻어맞았다. 일본군의 초계정 1척이 피탄되어 좌초했고, 수송선 1척은 포탄 한 발을 맞았다. 일본 구축함들은 수송선의 후퇴를 엄호하며 해안포에 맞섰지만, 미군의 2번째 포격에서 상륙함대의 기함인 경순양함 유바리가 피탄당했고, 카미카제급 구축함 하야테가 해안포 포격 2발을 화약고에 맞고 2분만에 격침되며 168명의 탑승자 전원이 전사했고, 구축함 오이테도 포탄에 맞고 19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경순양함 텐류와 타츠다의 엄호 아래 구축함 야요이, 무츠키, 키사라기를 투입해서 응전했으나 거센 반격에 부딪쳤다. 야요이는 1발의 명중탄을 기록했으나 포탄에 맞아 1명 전사에 17명이 부상당했고, 유바리는 11발의 포탄을 맞고 대파 당했다. 놀란 일본군은 퇴각했으나, 4대의 와일드캣이 상륙선단에 공격을 가하여 텐류와 순양함 공고마루에 기관총탄을 명중시켰다. 그리고 키사라기는 Henry T. Elrod가 조종하는 와일드캣의 100파운드 폭탄에 후미를 맞고 폭뢰발사기가 폭발하면서 승조원 전원과 함께 침몰했다. 키사라기를 격침시킨 Henry T. Elrod는 23일에 전사했고, 2차세계대전 최초로 의회 명예 훈장이 수여된 조종사가 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11일의 전투에서 미군측은 전사자가 0명이었으니….

3.3 1차전과 2차전 사이

13일에는 초계중이던 와일드켓이 부상해있던 일본군 잠수함을 폭탄으로 공격했다 비록 명중하지는 않았지만 잠수함 근처에서 터졌기 때문에 선체에 큰 손상을 입고 결국 침몰한다.

15일에도 잠수함을 발견해 공격했지만 격침에는 실패한다.

3.4 양측의 반응

패배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반성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고, 일본 해군의 명예를 걸고 웨이크 섬을 점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 상륙부대 사령관인 가지오카 소장은 증원을 요청했고,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 귀환하던 항모 히류소류, 괌 공격에 나섰던 함대에 포함된 제6전대(기함 중순양함 아오바)의 중순양함 아오바, 키누가사, 카코, 후루타카 4척을 차출했으며, 구축함 아사나기, 유나기 2척과 특설 함선으로 구축함 오보로와 육전대 병력을 추가하여 대대적으로 전력을 증강하고 폭격을 강화했다.

예상치 못한 승리에 미국은 열광했으며,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 무전에 대한 답신이 "일본놈을 더 보내라"오오 폭풍간지 오오였음이 알려지자 열광은 더욱 고조되었다.[6]

3.5 2차전

22일, 그동안의 폭격에 지난 번의 전훈을 교훈삼은 일본군이 1,500명의 지상군을 웨이크 섬에 상륙시키며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활주로 인근에선 일본군 1개 중대가 사상 60여 명에 중대장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좁은 지형 속에서 해병대의 기관총에 고착견제된 일본군의 피해는 점점 늘어만 갔다. 웨이크 섬에 속한 부속도서인 윌크스 섬에서는 아예 통채로 1개 중대(100명)가 미군 1개 소대에게 완전히 전멸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선전 속에서도 미군의 중요 거점들이 하나둘 함락되고, 건재한 부대들간에도 통신망이 두절되어 아직도 저항중인 부대를 지휘부가 전멸했다고 판단했으며, 일본군 중순양함과 구축함대가 해안포 위협을 무릅쓰고 깊숙히 들어와 포격을 가하는 등 일본군의 공세도 격렬해지면서 사실상 수비가 불가능해지자 오전 8시 수비대는 항복을 결정했다. 그 와중에도 통신망 두절로 지휘부의 항복 사실을 알지 못한 소부대들의 자체적인 반격으로 일본군이 일시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하는 등 미군의 저항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미군 소부대의 저항이 계속되자 일본군은 미군 지휘관인 데브루 소령에게 항복 권유를 하도록 했고 23일 13시 30분을 기해 잔존부대가 모두 항복함으로서 태평양 전쟁 초기 가장 격렬했던 전투는 이렇게 끝났다.

4 이후

일본군은 미군의 격렬한 저항에 크게 놀랐다. 실제 개전 초기 일본군은 목표했던 요충지들을 모두 타임 테이블대로 딱딱 점령했지만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섬을 함락시키는데 10일이 넘게 소요되었다. 여기에 해군 300여 명과 육군 500여 명이라는 전사자는 덤이었다. 그 외 구축함 2척,잠수함 1척 격침, 최소 21대의 항공기가 격추되었고 상륙과정에서도 함선 8척이 손상을 입고 50여대의 항공기가 손상을 입는등 전력손실도 상상을 초월했다. 반대로 미군 전사자는 해병대 49명 해군항공대 3명 총 52명(…). 하지만 자원하여 함께 싸웠던 민간인 건설노동자 7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런 선전과는 별개로 웨이크 섬은 12월 15일경, 미군 수뇌부에 의해 정식으로 포기된 상태였다. 웨이크 섬에 병력을 증강시키거나 혹은 수비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구성된 제14기동부대는 웨이크 섬동쪽 680km까지 접근해서 지원할 준비를 했지만 진주만 공습 이후 얼마 남지 않은 해군 함대를 사지로 내몰 수 없다는 결정에 따라 23일밤에 회항했다. 참고로 이 부대는 윌리엄 홀시가 직접 지휘하겠다며 나서다가 만류되었고,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지휘 중이었는데 플레처 제독은 회항 명령을 받고 피꺼솟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웨이크 섬 구원 포기 명령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반발이 많았지만, 가슴으론 반발하지만 머리로는 납득하는 상황이었다. 플레쳐나 홀시같은 일선 제독들은 물론이고, 태평양함대 사령관인 킴멜이나 후임인 니미츠 제독도 구원 포기를 지지했다. 심지어 웨이크 섬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그루브 소령은 전후의 회고에서도 포기 명령을 이해한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태평양 전쟁의 판세가 기울어질 때까지. 미군은 굳이 웨이크 섬을 탈환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대규모 공습을 한 번 가해서 섬의 군사시설을 모두 박살낸 뒤로 관심을 끊었다. 그러나 이 공습을 전면적 상륙 시도로 오판하고 겁에 질린 일본군 수비대장은 포로와 민간인 다수를 학살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전후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부관[7]도 사형당했다. 학살이 일어난 날에, 미군 포로 중 한 명이 처형장에서 탈출해 근처의 바위에다가 98 US PW 5-10-43이라는 말을 새겨놓았다. 이는 1943년 5월 10일, 미군 포로 98명이라는 뜻이며, 98 Rock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죽은 민간인들은 훗날 유해를 파내어 태평양 국립 기념 묘지의 G 부분에 이장했다.

결국 웨이크 섬은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는 개전 전 미국령이었던 지역 중 유일한 것인데, 개전 직후 미국이 빼앗긴 영토 중 종전 당일까지 탈환하지 않은 곳은 웨이크 섬이 유일하다. 기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미국 영토 중 필리핀이나 마리아나 제도의 괌 섬, 알류산 열도의 일부 섬 등은 전쟁기간동안 모조리 탈환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서… F6F 헬캣의 데뷔전 무대가 되었다.

웨이크섬에는 웨이크 뜸부기 라는 토착생물이 있었는데 작은 산호섬인 덕분인지 천적이 없어 경계심이 없었다. 때문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도 사람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이 주둔했을 당시 웨이크 뜸부기는 시간이 지나도 수가 줄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미군이 웨이크섬에 군사기지를 건설할당시 개와 고양이를 들여오지 않았고 작은 산호섬이라 개발 가치도 낮았기에 군 기지를 제외하면 개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지역의 토착생물이 멸종하는 경우가 많은 사례로 볼때 의외의 결과.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웨이크 뜸부기들의 운명은 크게 위태로워 지게 된다. 일본군은 웨이크섬을 점령했지만 일본군 특유의 안습한 보급능력에 더해 제공,제해권을 미군에 빼앗겨 보급없이 쫄쫄 굶게 된다. 이 상황에서 눈에 띈 것이 날지도 못하고 경계심도 전혀 없는 웨이크 뜸부기. 일본군은 종전 때 까지 웨이크 뜸부기를 마구잡이로 잡아먹었고 웨이크 뜸부기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웨이크 재탈환 이후 웨이크섬에 대한 생태계 재조사가 이뤄졌는데 뜸부기들이 전혀보이지 않았다. 결국 멸종당한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의 웨이크 섬 전투

  • 배틀필드 1942 이후로, 이 전투를 모티브로 한 맵이 배틀필드 시리즈 상당수에서 등장했다. 심지어 시대적 배경을 넘어가서 현대전 웨이크섬(배틀필드 2, 배틀필드 3;B2K)과 미래전 웨이크섬(배틀필드 2142)까지 있다. 하지만 배틀필드 4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파라셀 폭풍이 이쪽 포지션같지만.
  • 워 썬더에서도 웨이크 섬이 나온다. 정말 다양한 방면으로 유명한 섬
  • 함대 컬렉션/애니메이션 3화 에피소드 제목이 <W섬 공략작전>인데, 지도를 보면 영락없이 웨이크 섬이다.그리고 거기에서도 키사라기가 똑같이 굉침당한다.

6 관련 링크

  1. 파괴된 일본 정찰선
  2. 작전중 사망
  3. 민간인
  4. 민간인 70명포함
  5. 참고로 이 와일드캣 셔틀 임무 덕분에 엔터프라이즈는 진주만 공습을 피할 수 있었고, 이것이 태평양 전쟁 전체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6. 다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존재한다. 실제 섬 수비대가 그런 전문을 보낸 적은 없고, 개전 초 연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국민들을 위한 프로파간다였다는 것.
  7.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