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메이스

(윌리 메이즈에서 넘어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영구결번
34112024
빌 테리멜 오트칼 허벨몬테 어빈윌리 메이스
2730364244
후안 마리샬올란도 세페다게일로드 페리재키 로빈슨윌리 맥코비
이름Willie Howard Mays
윌리 하워드 메이스
별명Say Hey Kid
출생1931년 5월 6일
국적미국
포지션중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51년 뉴욕 자이언츠 자유계약
소속팀뉴욕 자이언츠(1951~1972)[1]
뉴욕 메츠(1972~1973)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윌리 메이스
헌액 연도1979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94.7% (1회)
1951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신인왕
샘 제스로
(보스턴 브레이브스)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조 블랙
(브루클린 다저스)
1954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로이 캄파넬라
(브루클린 다저스)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로이 캄파넬라
(브루클린 다저스)
1965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MVP
켄 보이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1963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모리 윌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레온 와그너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자니 칼리슨
(볼티모어 오리올스)
1968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토니 페레즈
(신시내티 레즈)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윌리 맥코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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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e could do everything from the day he joined Giants.He could do all the things you look for in a player better than anybody I ever saw. He never had to be taught a thing. The only other player who could do it all was Joe DiMaggio.

"(뉴욕) 자이언츠에 온 그날부터, 윌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는 한 명의 선수에게 요구되는 그 모든 것을 내가 본 다른 어떤 선수보다 잘할 수 있었다. 그에겐 그 무엇 하나도 가르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다 잘할 수 있었던 다른 선수는 조 디마지오 뿐이었다."
레오 듀로서[2] 1979년 신문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이자, 그 기사 제목이다. ## [3]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이면서 최고의 흑인 선수이기도 한, 공격과 수비 모두 단 하나도 부족할 게 없던 퍼펙트 5툴 플레이어였던 위대한 전설의 선수.
"윌리 메이스가 곧 자이언츠였다."고 할 정도로 뉴욕 자이언츠의 절대적인 상징이자 내셔널리그의 슈퍼스타로 오랜기간 군림했던 남자.
Willie could do everything

메이저리그, 아니 야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공격,수비,주루의 조화를 갖춘 역대 최고의 5툴 플레이어.[4] 공격 면에서는 통산 2회의 MVP와 660홈런 3283안타로 설명이 끝나며, 수비 면에서는 12년 연속 골드글러브 수상[5]를 보유한 선수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희대의 명장면인 The Catch로 유명하다. 주루면에서는 도루의 암흑기라 개수가 적을 뿐, 338도루를 기록했다.[6]

통산 성적은 22시즌 동안 타율 .302, 660홈런, 3283안타, 338도루, 출루율 .384, 장타율 .557, OPS .941, 순장타율 .256, BB/K 0.96, wRC+ 154, 1903타점

500홈런-3000안타를 기록한 선수는 메이스와 행크 아론, 에디 머레이, 모 약쟁이, 또 다른 약쟁이 뿐이며 이 중 통산 3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오직 행크 아론과 윌리 메이스 뿐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도루 300개 이상 기록한 선수는 윌리 메이스 뿐. 이쯤 되면 다시 한번 'Willie could do everything [7]' 그래서 샌디 쿠팩스 같은 사람은 "베이브 루스는 메이스처럼 달리지도 못했고, 수비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메이스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또 올스타전과 월드시리즈 이외엔 아메리칸리그와 교류가 없던 시기에 동시대 테드 윌리엄스는 올스타전에 참가한 이유를 윌리 메이스를 보기 위해 참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2 선수 시절

니그로리그에서 처음 경력을 쌓기 시작한 후, 마침 재키 로빈슨에 의해 인종차별의 벽이 무너지자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보스턴 브레이브스보스턴 레드삭스가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특히 레드삭스의 경우 입단시키기를 희망했지만,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인 감독 조 크로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8] 이후, 뉴욕 양키스역시 인종차별주의자 스카우트의 허위보고로 영입에 실패했고, 브루클린 다저스도 니그로리그 출신 명 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그를 추천했지만, 역시 거부. 결국 뉴욕 자이언츠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자이언츠 프랜차이즈에서 전설이 되었다.

여기에 빼어난 수비 솜씨로 중견수 수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전력상 더 강하다고 평가받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상대로 보여준 신기의 수비, The Catch.

영상을 저렇게만 보면 실감이 안날 수 있겠지만, 당시 구장은 뉴욕 시절 홈구장인 폴로 그라운드이다. 폴로 그라운드의 구조가 어떻냐면...

PoloGrounds_trunc.gif
이렇게 생겨먹은 구장의 센터 가장 깊은 곳으로 날아간 타구였기 때문에 평균적인 외야수가 정상수비를 하는 데 저정도 타구면인사이드 파크 호텔장내홈런의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그걸 뒤로 쫓아가 바스켓 캐치를 선보인 명장면.

아직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를 꼽을 때 꼭 들어가는 이름이며, 외야에서 믿기지 않는 호수비가 나올 때마다 해설자들은 늘 윌리 메이스를 언급한다. 수비까지 잘하다니 정말로 Willie could do everything.

22시즌을 뛰면서 늘 꾸준했고, 두 차례의 MVP를 차지했다. 그리고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선수였는데, 매년 올스타전에 나갔고, 특히 가장 유명한 것은 뉴욕 할렘 가 아이들과 어울려서 스틱볼을 즐기던 장면.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어울리는 모습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도 Say Hey Kid.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는 희대의 호타준족이지만, 인품도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그야말로 한 몸에 받았다. 심지어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동시대에 뛴 선수 중 누가 가장 대단한 선수였느냐는 질문에 자기 자신이라고 답했지만, 아무도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니...(하기사 그 성적을 기록한 선수 자체가 없었...던 것까진 좀 아니고, 홈런왕 행크 아론과 역대 최고의 스위치히터 미키 맨틀, 메이스, 맨틀과 함께 뉴욕의 대표 선수 3명 중 마지막인 듀크 스나이더 같은 레전드도 있긴 하다.)

다만 말년엔 정든 자이언츠를 떠나 젊은 날을 보냈던 뉴욕에 창단된 뉴욕 메츠로 돌아가서 활동했지만 나이 때문인지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다. 오히려 1973년 월드시리즈에서 평범한 플라이를 잡지 못하고 놓치는 등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미국에서는 은퇴 시기를 놓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는 스포츠맨의 대명사로 통한다.

3 기타

샌프란시스코 시절 동료 바비 본즈의 아들의 대부를 서준 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배리 본즈다.

그의 등번호 24번은 당연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이며, 이 등번호는 재키 로빈슨의 전 구단 영구결번 42를 뒤집은 번호인 점도 있다보니 모든 선수들이 가장 선호하는 번호 중 하나다. 배리 본즈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에 이 번호를 달았고[9], 그 외에도 그래디 사이즈모어, 켄 그리피 주니어, 리키 헨더슨, 미겔 카브레라 같은 선수들이 이 번호를 달았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한 기자의 질문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그가 뛰었던 기간동안 제일 위대한 선수는 누구인걸로 생각하냐는 질문이었으며 이에 메이스는 "저였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답변을 했었다. 오 맞말 당연히 이런 메이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그동안 보였던 플레이와 인성적으로 매우 뛰어난 모습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를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016년 자신의 85번째 생일에는 메탈리카가 선창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홈 팬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1. 1953년 윌리는 군복무로 경기에 뛸 수 없었고 팀은 1958년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2. 윌리 메이스가 뉴욕 자이언츠에 데뷔했던 시기부터 5년간 자이언츠의 감독을 맡았던 감독.
  3. 이중 "윌리는 뭐든 할 수 있었다."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윌리 메이스에 대해 말할 때 야구계에서 계속 인용되곤 한다. 참고로 레오 듀로서 감독은 윌리 메이스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되었을때였던 신인시절에도 "윌리가 요리만 할 수 있다면, 난 그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인터뷰도 남겼을만큼 감독-선수 관계를 넘어 윌리 메이스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한 팬이었으며, 디마지오는 메이스가 데뷔한 해에 은퇴한 선수로 활동시기가 겹치지 않고 오히려 듀로서가 선수생활하던 시기에 전성기를 시작했던 선수이다. 잠깐 근데 디마지오나 메이스랑 동시대에 활동했던 테드 윌리엄스, 행크 아론 얘기는 왜 안 나와? 걔네는 수비로 일류는 아니라서
  4. 인간성마저 좋아서 대인친화적인 인격까지 갖춘 6툴 플레이어라는 농담도 있다. 그의 별명 Say Hey Kid는 어떤 사람들에게든 스스럼없이 hey라고 부르며 다가갔던 그의 친화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칭찬하는 의미로 생긴 별명이다. 상술된대로 그의 팀 감독이었던 듀로서가 언론인터뷰에서 메이스에게 결혼드립까지 칠 정도로 좋아했으니..어? 혹시?
  5. 아직도 깨지지 않은 외야수 최다 골드글러브 기록 보유자이다. 그것도 그가 한창 선수생활을 하며 뛰어난 수비능력을 이미 인정받던 중에 골드글러브가 생긴거라 더 일찍 생겼으면 당연히 그만큼 더 많이 수상했을 것이라 평가된다. 그야말로 넘사벽 외야수
  6. 그래서 많은 야구팬들이 도루의 암흑기가 아닌 시기였으면 배리 본즈만이 기록한 400홈런-400도루도 충분히 달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500홈런-500도루도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7. 세계로 넓혀보면 3할-500홈런-3000안타는 일본프로야구의 장훈 옹도 기록하신 대기록이다. 여기에 통산 300도루 이상까지 붙으면 메이스와 장훈 옹 단 둘만 기록했다. 그야말로 후덜덜덜. 사실 윌리 메이스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약본좌배리 본즈도 홈런과 도루는 달성했는데 안타가 2935개라서 아깝게본즈 : 1년만 더 뛰게 해줘 엉엉 달성못한 경우이다.
  8. 그래서 밤비노의 저주는 허구라고 해도 인종차별의 저주는 진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왜냐면, 보스턴은 이런 식으로 재키 로빈슨도 놓쳤다. 재키 로빈슨이 입단 테스트를 받고 있을 때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가 확성기로 '저 깜둥이 새X들을 당장 내보내지 못해?!'라며 크게 소리쳤고 로빈슨을 비롯한 흑인 선수들은 전부 도망쳐야 했다. 레드삭스 구단은 이 일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가 50년 뒤인 1995년에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흑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1950년대말 전성기를 연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보스턴은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늦은 팀이고, 그들의 라이벌 양키스는 상대적으로 빠른 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9. 자이언츠 이적 후에는 이 번호가 영구결번이라 25번으로 바꿔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