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丑年大洪水
1 개요
일제강점기이던 1925년[1] 여름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홍수. 한반도 전역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 중에서도 한강과 낙동강 일대가 특히나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을축년 장마’ 또는 ‘을축년 홍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진행
2.1 1차 홍수
타이완 부근에서 생성된 태풍이 7월 11일부터 12일에 걸쳐 한반도를 중부지방을 관통했는데, 이로 인해 황해도 이남 지역에 시간당 300mm[2]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한강, 금강 및 낙동강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주요 강들이 대부분 범람했다.
2.2 2차 홍수
1차 홍수로 인한 피해가 수습되기도 전이었던 7월 16일에 타이완에서 생성된 또다른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한다(...)그리고 이것은 약 90년 후 이 태풍과 요 태풍이 재현했다. 특히나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피해가 막심하여 시간당 650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관측되어 한강 수위가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3]를 경신해 한강에 쌓았던 제방이 무너지면서 서울 전역이 물바다가 된다. 숭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차올랐다고... 서울의 교통과 통신 또한 마비되었다. 당시 서울 전역에 익사자만 400여 명에 1만 2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었고 특히나 동부이촌동·뚝섬·송파구·잠실동·신천동·풍납동 일대의 피해가 막심했다. 심지어 송파구에는 홍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자 이재민들이 세운[4] 비석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정도.[5]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2차 홍수가 뜻밖에 가져온 이점도 있었는데 지층이 쓸려가는 바람에 땅에 파묻혀있던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발견된 것(...)
2.3 3차 홍수
이렇게 한동안 잠잠한가 싶었는데, 양쯔강 일대의 저기압의 영향으로 8월초 관서 일대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이번에는 북부의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하고 만다.
2.4 4차 홍수
아직 한 발 남았다 8월 말 마리아나 제도에서 발생한 태풍이 북상하여 9월 초에 한반도 남부를 관통[6]했고, 이로 인해 남부 지방에 들이닥친 호우로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이 범람한다.
3 피해
총 4차례에 걸친 홍수의 결과 6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고 1만 7천여 호의 가옥이 붕괴었으며 4만 6천호의 가옥은 침수되었다. 사망차는 총 647명. 또한 3만 2천단보의 논과 6만 7천 단보의 밭이 유실되어 그 피해액만 1억 300만원에 달하였는데, 이 액수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1년 예산의 60%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니 이 을축대홍수가 얼마나 커다란 피해를 입혔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군대까지 동원한 총독부는 안양천과 같은 한강 지류에까지도[7] 엄청난 규모의 제방을 건설하여 복구 작업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골재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선유봉[8]이 폭파되어버린다.
또한, 이 홍수의 영향으로 잠실섬 주변의 한강 흐름이 바뀌어 한강 본류가 잠실섬 남쪽의 송파강에서 북쪽의 신천으로 바뀐다. 이로 인해 송파강으로 먹고 살았던 송파나루는 급격히 쇠퇴해버린다.[9] 그리고 잠실 일대의 양잠도 홍수로 뽕밭이 다 쓸려나가고 토양이 척박해짐으로써 쇠퇴해버렸다. 이후 양잠으로 번성하였던 잠실, 신천 일대와 송파나루로 번성하였던 광주군 중대면 일대는 1971년 한강공유수면사업으로 인한 잠실택지지구 개발, 1985년 가락시장 개장,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때까지 약 50년동안 잊혀진 땅 취급을 받아야했다.
- ↑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60갑자로 을축년이었다.
- ↑ 관측상 500mm가 넘게 온 지역도 있다고..
- ↑ 뚝섬 13.59m, 한강대교 11.66m, 용산구 12.74m
- ↑ 홍수 이듬해인 1926년에 세웠다.
- ↑ 다만, 현재 세워진 비석은 6.25전쟁 등으로 훼손된 것을 2012년에 복원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위치도 당시 중대면사무소가 있었던 송파구 송파동 95번지에서 서초구 반포동의 한강홍수통제소로 옮겨졌다.
- ↑ 제주특별자치도와 목포시·대구광역시를 거쳐서 동해에서 소멸
- ↑ 본류야 당연하고...
- ↑ 오늘날의 선유도
- ↑ 송파나루 자체가 풍부한 유량으로 배가 정박하기 좋았기 때문에 원주, 춘천, 단양, 영월 등 한강 상류의 물자가 이곳으로 집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영남, 강릉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조선시대 전국 15대 상설장터중 하나인 송파시장이 있었을 정도. 그리고 이곳에 송파진이라는 군영이 설치되어 강건너 뚝섬, 동잠실, 삼전도, 광나루까지 관할하였다. 조선시대만 해도 매우 번화한 곳이었단 셈. 하지만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쇠퇴의 기미를 보이더니 을축년 대홍수의 직격탄을 맞이 그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 을축년 대홍수의 여파로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에 자리잡던 주민들도 인근 석촌, 가락 등지로 이주하면서 송파나루와 송파시장은 말그대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