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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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동 토성서울 風納洞 土城[1]

1 개요

BC 1세기에서 AD 3세기 사이에 지어진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토성土城. 사적 제11호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한성백제의 도성이였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단순한 방어성으로 보는 의견이 서로 엇갈리고있다.

올림픽대교천호대교 사이에 타원형으로 위치해 있으며 전체 면적은 353,589.1㎡으로 원래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큐모의 토성이였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는 등 잡다한 사유들로 인해 현재는 2.7km 가량만이 남아 있다.

2 어떻게 풍납토성은 한국 고대사를 바꿔놓았는가?

풍납토성이 한국 고대사를 다시 썼다는 평가가 가능한 건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다.

첫째로 풍납토성은 기존의 위례성 = 몽촌토성이라는 학설을 뒤집어 버렸다. 그 이전까지 풍납토성은 그리 중요한 성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1960년대 서울대 고고학부의 조사에서 많은 유물을 출토되었지만 그저 몽촌토성을 방위하는 사성(蛇城)일 것이라 추측했다. 이 학설은 이병도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이후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풍납토성은 한강과 너무 가까워 홍수시 침수될 우려가 너무나도 컸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이 한 번 쓸린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평지성이었기 때문에 방어에서도 불리한 점이 많았다. 고구려 국내성이나 환도산성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의 경주 월성도 평지성이라기 보다는 산성에 가까웠다.[2] 다시 말해서 이래저래 따져 보아도 왕성으로서의 자격 요건에 미달되었던 성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사실 한국 고대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의 정체가 풀리지 못 할 수수께끼이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왕성은 아닌데 너무 크니까...

바로 이 의문이 풀린 게 1997년이었다. 평소 풍납토성 = 하남 위례성설을 강력히 주장해오던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토성 내에서 진행되던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 몰래 들어가 지표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 한 번의 조사로 몽촌토성에서 나왔던 유물보다 많은 유물이 쏟아지자 정부는 서둘러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긴급 조사에 들어게게 된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조금씩 풍납동 땅을 매입해서 건물들을 헐고 있다. 그 결과 풍납토성이 왕성일 것으로 추측되는 수많은 부장품들이 발굴되었고 토성의 건축 방법을 조사하기 위해 일부분을 절개하면서 풍납토성이 판축기법으로 세워짐이 밝혀졌다. 단순히 방위목적으로 만드는 성에 이렇게 큰 노력을 기울리 없기 때문에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거나 적어도 왕성의 일부분이었다는 추측이 점차 정설화 된 것이다.

둘째로 풍납토성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재조명하게 만들었고 지금까지의 고대사 연구를 뿌리채 흔들어버렸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마한을 멸망시키는 등 백제가 초기부터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완전히 제패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종래 고대사학계의 중론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이었다.[3] 사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보면 의심이 안 갈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래서 기존 학설에서는 백제가 나라다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을 8대 고이왕부터인 것으로 설명해 왔으며 마한 멸망 역시 근초고왕대라고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4] 바로 이 학설을 풍납토성이 뒤집어 버린 것.

절개조사 결과 풍납토성은 BC 1세기에서 AD 3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바로 의심받는 백제 초기 시대이다. 그리고 풍납토성은 판축기법과 크기 등으로 유추해 봤을 때 연인원 백만 명 이상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는 토성이며, 원래의 크기도 현재 풍납토성보다 약 2~3배 정도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을 수 년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권력이 이 시기 한성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중부에 존재했던 것이고,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백제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기존 학설들이 뿌리채 흔들리게 되었다. 풍납토성이 도성이건 아니건 간에 대규모 인원을 매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풍납토성 자체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지닌 의혹을 완전히 해결해 준 것이라고 보기에는 미묘한 감도 있다. 처음에는 풍납토성의 초축연대를 검토했을 때에는 기원전 1세기로 보는 연구결과가 있기도 하였으나, 2010년대 이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체로 빠르면 서기 2~3세기 즈음에 처음으로 토성이 건축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욱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자체에는 후대의 기록을 끌어다 썻다거나, 역대 국왕의 수명과 재위기간을 억지로 늘이거나 그 계보를 조작하는 등 분명히 엄중한 검토를 거쳐야 할 문제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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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절개조사는 1999년에 동쪽 중앙부, 2011년에 동쪽 남부 총 2회를 했는데, 2014년 12월 3일 발표한 연구 결과 성벽의 건축 연대가 부분별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쪽 중앙부는 BC 1세기 준공, AD 2~3세기 증축이였는데 동쪽 남부는 AD 3~4세기 준공, 4~5세기 증축이라고. 결과물은 연인원 138만 명을 동원한 아파트 5층 높이(약 13미터)에 달하는 성벽인 것으로 밝혀졌다. 2015년 12월 21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 동남부 성벽 발굴조사를 통해 깊이 2.3m, 역사다리꼴 모양의 해자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3 풍납토성은 진짜 위례성일까?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확정된 건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단정짓는 직접 근거가 나타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의 규모나 축조에서 동원된 인원들, 또는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규모로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확정짓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다 간접 증거일 뿐이어서 확실하게 풍납토성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2006년 풍납토성의 중심부를 가로 지르는 도로가 발견되면서 풍납토성=위례성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가는 분위기이다. 당시 왕성에만 성 내부를 십자 형으로 가로 지르는 도로를 만들기 때문이며, 그때 규정되는 도로의 폭과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도로의 폭이 거의 비슷하다. 기록 상으로도 가장 유력한 위례성 후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여러 후보군(?)들 중 삼국사기의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기록에 가장 부합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모두를 통틀어 위례성으로 지칭하고 풍납토성을 북성(평지성), 몽촌토성을 남성(산성)으로 삼아 평소에는 풍납토성에서 지내다가 급박한 위기 시에는 몽촌토성으로 피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대성산성이나 신라의 월성-명활산성도 이런 방어구조를 택했으며,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고구려 장수왕의 칩입때 북성이 먼저 무너지고 뒤이어 남성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5]

그리고 새로운 발굴 및 연구 성과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4 애로사항이 꽃 피는 발굴

이병도의 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풍납토성은 거의 잊혀지다시피 하였다. 이로 인해 성벽 내부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지 못하게 되었고, 내부 지역의 난개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까지 문제거리가 된 것. [6]

2000년대 무렵 이 토성이 중요한 문화재로 부각된 이후 풍납동 주민들의 삶에 많은 애로사항이 꽃 피게 되었다. 가장 직격탄을 맞은 것이 97년 유물이 발견된 문제의 아파트 주민들. 이 분들한테는 그리 좋은 일이 아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파트 재건축이 연기될 것이 두려워 유적을 파괴한 재건축조합의 만행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풍납토성 발굴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형구 교수는 풍납동 주민들에게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풍납동 곳곳에 '이형구 죽어라'하고 플래카드들이 선거철 현수막 수준으로 붙어있었대나(...) [7]

지금도 소인배 풍납동 주민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 등지에서는 풍납토성은 역사학계가 만든 조작극이다! 라는 주장이 공지글로 걸려있는 실정이다. 이 주장은 몇몇 역사학자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데, 하남시 춘궁동 지역이나 충남 천안직산 지역이 진짜 위례성이며, 풍납토성은 마한의 유적이나 중국 상인의 거류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본인들의 경제적 부담이야 크겠지만 자국 역사를 부정, 날조하고 심지어 반달리즘하면서까지 집단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국민의 자세라고 말할 수 없다. 이들의 모습은 현지 역사와 유적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가지는 상당수 국민들의 그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또한 이들은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라고 깎아내리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하고 있으나 이건 논점을 잘못 든 것이다. 왕성이 아니라고 해도 유적지가 아닌 건 아니기 때문이다.[8]

2013년 문화재청이 문제의 아파트 부지에 "풍납 백제 왕성 공원(가칭)"이란 걸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40억원의 예산으로 공원과 주민문화센터를 건설하겠다고. 일단 문제의 부지를 둘러싼 갈등은 이걸로 대충 봉합되는 분위기.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금까지 발굴된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위성지도 등으로 풍납토성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토성 내부 지역은 2014년 현재까지도 아파트가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상태로 거주 인구는 약 2만 세대이다. 당연히 이 아파트를 전부 밀어버리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이게 수익이 나는 사업이 아닌 탓에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관심을 덜 받아 예산 선정 순위도 높지 않다. 서울시대한민국 정부에게 문제를 떠넘겨버린 상태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빠른 시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어보인다. 사실 1993년부터 2013년까지 보상비만 총 5000억원이 들었다고 하고, 매년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 비용 총액의 10% 가량이 투입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박인숙 송파갑 국회의원이 2012년 밝힌 문화재청 내부 자료에 따르면, 풍납토성 사적지 매입에 필요한 총 예산은 2조 5천억 원인데 현재까지 완료된 보상은 18%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재까지 보상이 완료된 속도로 계산해보면, 보상 완료 예상 시점은 2094년(...)이라고. 현재로선 이 항목을 읽고 있는 위키니트가 살아 생전에 풍납토성의 발굴이 완료되는 것을 목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아니 그 전에 그 때까지 나무위키가 존재할런지
게다가 이 비용은 단순히 과거의 '토지매입 비용'만을 토대로 계산한 금액이다. 지금까지 이뤄진 토지매입은 그나마 매입이 쉬운 지역이었는데, 앞으로 남은 구역은... 정말 멀고도 험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건물 철거 비용이나 폐기물 매립 비용 등을 합치면..... 유적 발굴 비용은 잊자. 늘 그랬듯이 고고학도들을 산 채로 갈아 넣어 떼울 속셈일테니.

2015년 12월 23일 서울시는 풍납토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풍납토성의 토지보상을 2020년까지 끝내기로 하였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보상에 국비, 시비 2855억원과 지방채 2282억원 등 총 5137억원을 5년간 투입할 계획이며 지방채 발행 금액은 추후 문화재청에서 지급하게된다. 보상방식은 왕궁 추정지 등 핵심지역으로 추려 우선 보상하는 '선택과 집중' 모델로 전환됐다.

서울시는 단계적으로 보상 지역을 확대해 사실상 기약 없는 사업으로 여겨진 풍납토성 발굴 사업의 속도를 낼 계획이다. 박원순의 꿈드립이 사실이였나? 관련기사

4.1 쓰레기 매립 사건

2012년 연말에 토성의 남쪽 지역을 발굴하던 중 약 8400㎡(약 2540평) 넓이로 지하 3m 깊이로 다량의 건축 폐기물이 파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허덜덜한 수준의 양으로 약 수천 톤으로 추정된다고.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중에 쓰레기를 발견했으며, 2개월 동안 쓰레기만 파내다가 지쳐서 포기해버렸다고(..). 규모를 보면 알겠지만 누군가 야밤에 몰래 묻은 수준이 아니다.

이 지역은 해자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이형구 교수에 의하면 "만약 파낸 흙을 어디로 갖다 버렸다면 거기도 다시 뒤져야 할 정도로 가치가 크다"고.

경찰 조사 결과 송파구청 공무원 김 모 씨가 직접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적에 있던 태양열 주택단지 철거 과정에서 배출된 건축 폐기물을 묻으라고 지시했다는 것. 안타깝게도 공소시효가 지난 탓에 이 천하의 개쌍놈을 형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5 이야깃거리

풍납토성 때문에 올림픽대교가 약간 휘어진 채로 건설되었다. 위성지도에서 확인할수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 시절에 장수왕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구웠다(!)고 한다. 아마도 흙으로 기와를 구워 성벽에 두른 것 같다. 토성 내부 조사 결과 약간의 탄화층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장수왕의 남하 당시 고구려 군의 약탈흔적이 아니었을까... 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군데 군데 돌출부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치성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전혀 치성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목재 등을 이용한 임시 가설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삼국지오나라 장수 주연의 묘가 발굴됨과 함께[9] 풍납토성의 연대가 조금 뒤로 밀릴 가능성도 있다. 풍납토성에서 전문도기[10]가 발굴되었는데, 중국에서 발굴된 전문도기들 중 가장 빠른 연대의 것이 바로 주연의 묘에서 나온 것이라 풍납토성의 건축연대는 주연이 살아있을 때(182년 ~ 249년)인 AD 2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다.[11]

2015년 3월 현재 풍납토성 주변 지역에는 '풍납토성 문화재 보수정비사업비 500억원 확보', '풍납토성 내부 건축규제 완화 환영'이라는 새누리당 소속 송파갑 당원협의회에서 내건 두가지 현수막이 걸려있다.

2015년 5월 1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백제왕이 꿈 속에 나타나서 풍납토성 복원을 결심했다(...)는 내용의 글을 페북에 올려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질질끌던 풍납토성 내의 토지보상을 시작했다. 기사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달리 평지가 아닌 야트막한 야산으로 남아있었고 개발 시에도 위례성의 후보지로 학자들이 강력히 주장하였기에, 난개발을 피할 수 있었다. 올림픽공원 안에 위치한다.

  1. 예전 이름은 광주 풍납리 토성廣州 風納里 土城. 2011년에 공식적으로 바뀌었다. 광주 풍납리가 서울 풍납동으로 바뀐 것이 1963년이니 48년간 이름과 실제가 다른 지명이었던 셈.
  2. 정확히 말하면 월성은 평지성 맞다. 하지만 강으로 둘러싸인 남측은 전혀 접근이 안되고, 북쪽은 야트만한 언덕이 급경사를 이루며 서있다. 따라서 평지성이긴 하되 산성이나 마찬가지다.
  3. 백제뿐 아니라 신라나 고구려에 대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들도 많은 부분에서 의심을 샀다.
  4. 마한의 최종 멸망을 동성왕 때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5c 이후에도 등장하는 금동관 등의 왕족 부장품에 근원한 주장이다.
  5. 삼국사기 권 제 25 백제본기 제 3 개로왕 21년 가을 9월...이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6. 이에 비해 몽촌토성은 애초부터 고고학자들이 위례성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강하게 개진해, 풍납토성과 달리 난개발을 피할 수 있었다.
  7. 물론 지금은 전부 다 철거된 상태이다.
  8. 아울러 이병도의 설을 따라 하남이 진짜 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이희진이나 강찬석 같은 학자들도 풍납토성의 존재가치에 대해서 결코 부정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이들이 실제 위례성이라고 본 하남에서 풍납토성은 서남쪽(반대로 풍납토성에서 하남은 동북쪽) 방향에 위치해 있고, 풍납토성 안에서 나오는 유물들의 연대가 백제 건국보다 이전인 기원전후로 올라가는 등, 풍납토성이 백제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마한왕이 마한과의 경계에 목책을 쌓는 백제 온조왕에게 "처음 막 강을 건너와서 발 디딜 땅도 없던 너한테 동북쪽 땅 백 리를 떼줘서 살게 해 줬더니 이제 와서 나한테 기어오르려 들어?"라고 꾸짖는 기록과 비교해(물론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처음에는 마한의 눈치를 보느라 목책을 헐었지만 나중에 마한을 습격해 합병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제시한 처음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했던 백제가 세력을 키워서 거꾸로 마한을 흡수하면서 성장했다는 시나리오에 대해 풍납토성이 고고학적 유물로써 증거가 되어준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9.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목공예품이 나온 무덤이기도 하다.
  10. 동전 무늬가 찍힌 도기, 중국 삼국시대에 많이 쓰이던 도기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던 도기는 아니라고.
  11. 그게 전세품이라는 보장이 없는한... 부장품의 함정은 그것이 전세품일 경우에는 정확한 편년의 지표라고 하기에 위험하기 때문이다. 만들고 백년 이백년이 지난다음에 무덤에 집어 넣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편년은 함부로 확정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