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

대금의 역대 황제
건국초대 황제 이징옥멸망

李澄玉
(? ~ 1453년)

1 개요

조선의 무관이자 이징옥의 난의 주도자. 본관은 양산(梁山). 중추원지사 이전생(李全生)의 아들. 양산 이씨인천 이씨에서 분적된 이씨로 후에 이징옥의 후손들은 인천 이씨로 환원 하였고, 양산 이씨는 이징옥의 형인 이징석으로 이어졌다.

무력만으로 놓고 전조인 고려의 척준경과 함께고려때엔 척준경이 있다면 조선엔 이징옥이 있다. 한국 역사상 최강으로 불려지는 인물로[1]입소문으로 전해지는 야사에 그 초인적인 용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2]도 당대에 무인으로써 3형제가 모두 용명을 떨쳤다. 병든 어머니가 이징석과 이징옥을 불러 "내가 멧돼지가 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징석은 멧돼지를 쏴 죽여 갖다드렸는데, 이징옥은 더 큰 멧돼지를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며 집 앞마당까지 몰아와서 기진맥진해 뻗어있는 걸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이것도 모자라서 호랑이를 10대 시절에 맨손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야사니 너무 신뢰하지는 말자. 다만 사냥감을 탈진할 때 까지 추적하는 지구력 사냥법은 실제로 있는 사냥법 중 하나다. 자세한것은 사냥 항목 참조.

세종 시대부터 북방에서 근무하여 여진을 상대로 용맹을 떨쳐 여진족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김종서의 눈에 띄어 북방 정벌을 하는데 도움을 줬는데, 이 때 김종서는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고 직접 전장에 나가 여진을 몰아내는 데에는 이징옥의 노련한 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김종서가 처음 북방에 부임했을 때 둘의 대(對) 여진관은 달랐다. 김종서는 문신답게 다소 온건책을 주장했고, 이징옥은 강경토벌을 주장했다. 이징옥은 군사적으로 강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결코 여진의 저항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3]. 그러나 김종서도 몇 년 후에는 이징옥의 의견을 수용하여 강경토벌론으로 돌아서게 된다.[4] 그래서 1440년 이후로는 적절한 군사 시위와 적지에 침투하는 작전까지도 구사한 끝에 함경도의 6진이 완성되어 두만강 이남은 완전히 조선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5]

2 상세

이렇듯 무예로써도 전설급이었지만 단순한 거친 무장이 아니라 개념이었다. 세종 시대에는 나라 사신[6]들의 횡포와 수탈이 심했는데, 특히 명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의 매인 '해동청'을 잡으려고 안달이었다. 사신으로 온 윤봉(이 인간도 조선 출신 환관이다)이라는 자가 해동청을 제멋대로 잡고 남의 집 사냥개를 빼앗자 이징옥은 몰래 개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잡은 해동청을 풀어줘 버렸다. 윤봉이 이를 가지고 게거품 물고 발악하자 "저거 그냥 잡종이에요"라고 둘러댔다고. 어쨌든 이 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7] 사실 이게 의기있는 행동인건 맞지만, 자칫하다간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조정에서는 말 그대로 골머리를 앓았다. 세종도 매랑 개 한 마리 때문에 이게 뭔 꼴이냐라고 이징옥을 깠고, 맹사성이나 허조는 이 일로 이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뒷감당을 못한다고 처벌을 반대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의기있는 사람이었던건 사실이지만 대국적으로 처신하는 안목은 부족했던 모양.

매우 청령하고 성실한 인물이였는데, 세종부터 그 뒤인 문종, 단종을 거치며 일생 동안 북방에 수십 년간 근무했는데도 불만의 소리 하나 없었으며 본인은 매우 청렴하여 보다 못한 부하 무관이 "우리 장군님하가 추운 겨울에도 겨울날 입을 옷이 한 벌밖에 없어요"라고 문종에게 직소(!)했을 정도. 이에 문종은 좋은 털옷을 이징옥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장지 문제로 형과 충돌하기도 했는데[8] 열받은 형 이징석이 이징옥을 아버지 빈소에서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 이 북방에서 여진을 떨게 한 용장은 형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맞고만 있었다. 조선 초의 관리들이 여러 문제로 스캔들에 깨끗했던 인물들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이징옥은 이렇듯 사생활이 매우 깨끗했다.[9]

세종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했을 때에도 북방에서 근무했다. 비록 당시 실권자인 김종서의 신임을 얻기는 했지만, 토목의 변과 이만주 때문에 북방이 혼란스러워 계속 북방을 맡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단종 1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안평대군과 이징옥을 엮으면서 그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데 계유정난 직후 자신을 대신해서 박호문[10]이 함경도절제사로 오자 이징옥은 자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파악하고, 박호문을 살해한 다음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북방으로 진출하여 여진족과 연합하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나라를 세우고 반란[11]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물론 여진족 반응은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실록에 따르면 반란 이후 항상 무장한 상태로 잠도 안자고 있어서, 부하 '정종'은 날씨가 추우니 부하들이 술을 먹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징옥도 이를 승낙하고, 정종이 술을 바쳐서 막 마시려는 찰나에 부하들이 화살을 날렸고 화살을 맞고 도망치던 중에 추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야사도 비슷하게 전개되어서 수양대군의 밀계를 받은 병사 두명이 그를 살해하려고 잠입하여 술에 취해 잠든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이에 이징옥은 칼을 빼앗아 죽이고 밖으로 나왔는데 회령부사 정종이 잠입시킨 군사들이 이징옥을 살해하기 위해 포진해 있었다. 이징옥은 오른팔이 잘린 상태에서 칼 한자루 뿐인 맨몸으로 수백명을 쓰러뜨리면서 사투를 벌이다가 다음 날아온 화살들에 전신을 맞으면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는다...[12]

다만 아무리 궁지에 물렸다지만 여진족과 사이도 안 좋은 인간이 갑자기 대금황제를 자칭한 일이나, 이징옥의 첩 혹은 그냥 친한 기생을 이징옥의 아들이 황후라 말하는 점, 이징옥이 살해된 직후 조선상황을 알기 힘들었을 야인들이 수양대군[13]을 칭송했다는 기록 등 현실적으로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단종실록의 때문에 이징옥의 난을 세조의 조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채제공은 자신의 문집 번암집에서 이징옥의 난은 단종 복위운동으로 이징옥이 칭제건원한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3 그 외

고우영화백과 윤승운화백의 만화를 통해 유명해진 인물…이라곤 해도 이렇듯 초인적인 용력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남아 극화하기 좋은 요소를 잘 갖췄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그저 그런 역사의 단역 정도로 등장한다. 특히 북한 사극 사육신에서는 김종서보다 더 키가 작은 인물이 이징옥 배우로 나왔을 정도.
용의 눈물에서 아주 잠깐 나왔는데 태종이 문과,무과의 장원 급제자들에게 직접 어사화를 내리고 축하하는 장면에서 문과 장원 급제자 조말생과 함께무과 장원 급제자로 등장한다.
본격적으로 세종 시대를 다룬 대왕 세종에서는 어쩐 일인지 등장하지도 않아서 이징옥의 역할을 무예 젬병이었던 김종서가 수행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4]

이렇기 때문인지 일반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그저 안습. 아무래도 김종서의 그늘에 가려진 듯하다(...) 또한 군사독재 시기엔 박정희에 세조를 엮어서 평가했던 경향이 있어서 사실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조 때 복원되었다가 순조때 추탈당했다가 고종황제때 와서 다시 복원되는데.. 건의자가 이완용(...). 잘 살기도 해야 하지만 복원도 애먼 놈이 추천하면 같이 망한다는 실증사례라 할수 있겠다.

세종 시대를 다룬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등장하지 못했다. 때문에 역덕후들이 크게 아쉬워했다고... 허나 만약 실제로 나왔다면 윤평과 특히 개파이는 원턴킬 확정였을 것이고 덤으로 무휼, 강채윤의 비중이 줄어든다(...)
  1. 거기다 두 인물 모두 다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이 있다는 것도 같다.
  2. 그런데 이 둘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지지했다.
  3. 때문에 여진족은 이징옥을 멧돼지라 불렀다-무식하게 힘만쓰는 놈으로 비하하기 위해
  4. 중앙의 세종과 황희 같은 정승도 웬만하면 전면적 군사행동은 자제할 것을 주문했지만 여진의 침입이 지속되자 필요에 따라서는 적절히 군사 행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5. 6진은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여섯 진이다. 이곳은 현재도 군청 소재지일 정도로 큰 읍이 되었다.
  6. 당시 조선에 사행을 온 명나라 사신은 주로 태감급의 환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환관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환관을 보냈다고 하여 무조건 조선을 낮게 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특히 조선에는 조선 출신으로 환관이 된 자들이 사신으로 왔다.
  7. 뜻밖에도 윤봉이 직접 이징옥의 사면을 요청하여 귀양 정도로 끝난 것인데, 윤봉의 입장에서는 일이 너무 커지면 물의를 일으킨 책임으로 자신도 잘릴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는 추측이 있다.(이것저것 많이 챙길 수 있는 조선 사신의 자리는 인기있는 보직이었다.) 이징옥이 이런 부분까지 계산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8. 아버지가 북쪽산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이징석은 그곳에 자기 땅이 많다는 이유로 다른 곳에 묘를 쓰려 했다. 이징옥은 그래도 아버님 유언을 들어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대했다. 그러니까 저 형이란 놈이 지 땅이 탐나서 아버지 유언어기겠다는 천하의 불효막심한 짓을 하려 했다는 것. 거기에 이놈은 막내동생하고 같이 계유정난에 동조했다
  9.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 익히 알려진 황희마저도 실제로는 부정부패가 있었는데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거다. 그 외를 들라면 4군 개척에서 활약한 명장 최윤덕과 보수적이고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했던 재상 허조 정도.
  10. 과거 김종서를 모함했던 인물이다
  11. 반란이라곤 해도 이징옥의 난이라 불린 이 사건은 사실 궁지에 몰린 이징옥의 최후의 발악적 성격이 강하다.
  12. 야사에는 이 때 그의 나이가 24세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징옥의 활약 연대로 봐서는 틀린 기록이다. 활약 연대로 유추해 보면 1400년 전후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야사의 24세(二十四)라는 기록을 54세(五十四)의 오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13. 당시는 계유정난이 끝난지 보름도 안된 시점이였고 수양대군도 조선 중앙정계에나 잘알려져 있었지 크게 알려진 사람도 아니였다
  14. 하긴 대왕 세종에서는 조선의 음악 정리에 큰 공을 세운 박연도 잘라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