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王
1 개요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로 패망한 후 일제가 전주 이씨 옛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시켜 예우하기 위해 만든 지위.
비록 대한 제국은 멸망했지만 일제는 한반도에서의 민심을 잃지 않기 위해 구 황실을 명목상 황제의 격인 덴노 가문보다는 낮고 공후백자남 오등작을 가진 다른 귀족들보다는 높은 위치로 대우했다. 칭호들도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불과 12년만에 다시 제후의 칭호로 격하되어, '태자'가 '세자'로, '폐하'가 '전하'로 격하되었다. 넓게 보면 한국 황실이 일본 황실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한국 황실은 원래 갖고 있던 재산 + 일본 정부에서 제공하는 자금과 지위 덕택에, 막대한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방자 비가 이왕가에 시집 간다니까 다른 일본의 황족들이 부러워했단 이야기가 있을 정도. 링크는 이왕가가 운용한 재산의 규모에 대한 2006년 동아일보 기사.
그러나 이왕가는 이 지위에 안주하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돕지 않았기 때문에 8.15 광복 후 대한제국 황실 복원 움직임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황실 복고를 가장 강하게 지지할 유림 양반 계층 또한 일본에 굴복한 황실에 반기를 들기가 어려워 국권 침탈기, 일제강점기, 해방 정국 내내 빌빌거리다 영향력이 소멸했다. 결국 한국 황실은 36년 동안 저 지위와 대우를 누리는 대가로 자신들의 지지 세력인 유림까지 붙들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구시대의 유물들끼리 쌍으로 몰락한 셈.
광복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토해낸 데다 1947년 신적강하를 거쳐 이왕가의 지위가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졌고, 1948년 한반도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한국 황실에 적대적인 공화정이 출범한다. 이로써 한국 황족들은 한일 양국에서 모든 지위를 상실한다. 조선의 궁궐을 비롯해 그들의 막대한 재산 또한 국가에 환수되거나 공중분해되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특이한 점으로 거주하는 궁궐 이름을 미야케처럼 사용했다. 고종은 덕수궁, 순종은 창덕궁, 이우는 운현궁 등.
2 역대 이왕
2.1 덕수궁(도주쿠노미야) 이태왕(德壽宮李太王)
묘호 | 이름 | 재위기간 | 비고 |
고종(高宗) | 이희(李熙) |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 태상황 -> 이태왕(李太王) |
2.2 창덕궁(쇼토쿠노미야) 이왕(昌德宮李王)
대수 | 묘호 | 이름 | 재위기간 |
1대 | 순종(純宗) | 이척 | 1910년 8월 29일 ~ 1926년 4월 25일 |
2대 | - | 이은 | 1926년 4월 24일 ~ 1947년 10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