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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允榮
1890년 8월 19일 ~ 1975년 10월 15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관료, 목사이다. 1890년 8월 19일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사(白史)이다. 1907년 3월 영변군 숭덕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자, 목사로 주로 활동하였다. 1919년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교회 목사로 부임하던 중 3월 5일 신창면에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약 1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태평양 전쟁 직후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목사 파면처분을 받았다.
8.15 광복 직후, 조만식 등과 함께 평양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이 되었고, 11월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신탁통치 반대 결의 밀서를 서울특별시로 보낸 것이 문제가 되자 1946년 2월 월남했다. 월남해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지역구에 조선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첫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요청으로 국회 개원을 감사드리는 의미의 기도를 주도하였다. 국가 공식문서인 국회 회의록에 당당하게 하나님, 아멘... 등등이 나온다. 서울을 봉헌하겠다는 이명박보다도 스케일이 큰 듯? 이후 국무총리 서리, 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목사 일에 전념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연장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국민의 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1970년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고문을 지냈다.
1974년 10월 15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