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 ||||
1952년 8월 5일 | ← | 1956년 5월 15일 | → | 1960년 8월 12일[1] |
제2대 대통령 선거 | ← | 제3대 대통령 선거 | → | 제4대 대통령 선거 |
1 개요
1956년 5월 15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가 맞붙었다. 유권자 9,606,870명 중 9,067,063명 선거 참여라는 기록을 세웠으며[2] 초대 대통령의 3선이라는 후대 대통령들에게 좋은 예기록까지 세우게 되었다. 덤으로 사상 최초로 TV를 통해 보도된 선거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에는 TV방송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서울빼면 본 사람이 별로 없고, 서울에서도 주요거리에서 TV를 보던 사람들이나 재벌급 아니면 본사람 없다
2 배경
이 선거를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을 하게 되는데 그 건에 관해서는 본 문서를 찾아가 보도록 하자. 대충 골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을 철폐한 것이다.
3 과정
당시의 민주당은 사사오입 개헌 직후 이승만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한민당, 흥사단계 등 반이승만 보수진영을 통합한 최초의 거대야당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거두인 신익희는 유력후보로 떠올랐으며, 이승만의 2파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신익희가 전남지역 유세를 위해 기차로 이동하던 중 심장마비로 급서함으로써 이승만의 승리로 손쉽게 끝이난다.[3][4]
4 결과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 |||||||
구분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유무 |
대통령선거 | 1 | 조봉암 | 무소속 | 2,163,808 | 30.0% | 2 | 낙선 |
2 | 신익희 | 민주당 | - | - | - | 유세기간 중 사망 | |
3 | 이승만 | 자유당 | 5,046,437 | 70.0% | 1 | 당선 |
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 선거[5] | |||||||
기호 | 후보명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유무 | |
1 | 장면 | 민주당 | 4,012,654 | 46.43% | 1 | 당선 | |
2 | 이기붕 | 자유당 | 3,805,502 | 44.03% | 2 | 낙선 | |
3 | 윤치영 | 국민당 | 241,278 | 2.79% | 4 | 낙선 | |
4 | 이윤영 | 조민당 | 34,926 | 0.40% | 6 | 낙선 | |
5 | 백성욱 | 무소속 | 230,555 | 2.67% | 5 | 낙선 | |
6 | 이범석 | 무소속 | 317,579 | 3.67% | 3 | 낙선 |
보면 알겠지만 1,856,818표, 전체 투표수의 20.5%는 무효표이다. 이승만에 대한 반대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야당이 강세였던 서울특별시[6]는 대통령 선거 유효투표 비율이 53.8%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날 치뤄진 부통령 선거에서의 서울 유효투표 비율이 96.4%에 이른 것과 비교해보자.
한편 진보계열 유력 정치인으로 떠오르던 조봉암은 신익희의 사망으로 갈곳 잃은 표 일부를 흡수[7]하면서 약 220만 표를 얻는 선전을 거두었다. 이 때의 선전을 기반으로 조봉암은 최초의 진보계열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자유당에서 그를 간첩으로 몰아가기 전까지.
여담이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투표율과 이승만 득표율에 있어서 그야말로 진기록이 세워졌다. 예를 들면 강원도 정선에서는 이승만 후보가 25,230표(무효표 포함) 중 25,122표(99.57%, 무효표 제외시 99.86%)를 득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선군에서는 투표율 또한 99.65%를 기록했다. 선거부정의 냄새가 느껴지면 지는 거다.[8]
5 영향
비록 대통령 선거는 비교적 싱겁게 끝났지만, 부통령 선거에서는[9] 민주당 후보 장면이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꺾으면서 당선되었다. 1956년 당시 이승만이 한국나이로 82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임기 중 사망할 확률이 높았으며, 이승만이 죽을 경우 민주당에게 정권이 넘어갈 판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자유당에서는 부통령 자리를 공석으로 만드려고 하는가 하면 다음 선거에서는 아예 부통령도 어거지로 당선시키려고 희대의 병크를 저지른다.- ↑ 1960년 3월 15일의 선거는 무효화.
- ↑ 투표율 94.4%
- ↑ 아래 내용을 보면 결코 이승만이 손쉽게 이기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 ↑ 이 때문에 자유당에서 신익희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기도 하였다
- ↑ 부산정치파동에 분노한 김성수 제2대 부통령의 사퇴로 제3대 부통령 선거가 1951년(부통령 선거) 다음해인 1952년에 치러졌다. 그래서 이번 선거가 4대 선거.
- ↑ 그렇다고 조봉암을 찍지도 않았다. 민주당 계열은 이승만보다 조봉암을 더 싫어했던 것이다.
- ↑ 전국에서 신익희를 찍은 무효표가 넘쳤지만, 민주당의 세가 약했던 영/호남 4개 도에서는 신익희의 사망으로 붕 뜬 야권표를 확실히 조봉암이 흡수했다. 조봉암을 찍은 표가 무효표보다 많을 뿐 아니라 영남 20개 시군(대구 포함), 호남 4개 시군에서는 조봉암이 이승만을 이겼다. 일부 지역에서 조봉암의 득표율이 75%까지 치솟았다. 오히려 부산에선 이승만이 압승을 해서 부정선거 논란이 일었다.
- ↑ 정선이 넘사벽이어서 그렇지 고성에서는 유권자 17,173명 가운데 기권자가 5명(!) 뿐이었다.
- ↑ 당시 헌법에서는 부통령을 러닝메이트가 아니라 따로 선거를 해서 뽑도록 하였다.
- ↑ 그 전설의 제4대 대통령 선거의 예정된 임기가 끝나고도 1년 넘게 더살았다. 한마디로 자유당은 그냥 뻘짓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