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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榮
1964년 06월 28일 ~
1 개요
2 생애
2.1 학생운동의 리더
1964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7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통령선거 직선제 쟁취를 위한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노태우의 항복선언을 받아내자,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 중심으로 전대협을 결성하여, 1987년 7월 대전 충남대에서 출범식을 거행하였다.
전대협 의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친 후, 전대협동우회 회장을 맡는 등 전대협 출신 가운데 맏형 노릇을 줄곧 해왔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전민련 전국연합 등에서 9년 동안 재야활동을 했다.
1990년, 제1기 전대협 부의장이었던 우상호 등과 앞으로 10년간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숙성기간'을 갖기로 약속하였다. "학생 운동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후 10년이 지나자 이인영과 우상호 등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에 따라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됐다.
2000년 5월 17일 새천년 NHK 사건이 터졌을 때, 새천년민주당 내 어지간한 운동권 명사들이 다 모인 술자리에 끼지 않아 칭찬을 받았다. 당연히 끼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이로써 김민석, 송영길, 우상호 등은 의문의 1패.
2.2 국회의원 생활
2004년 제17대(서울특별시 구로구 갑.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2012년 제19대(서울특별시 구로구 갑. 민주통합당-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학생 운동권의 리더 격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여러 논쟁에서 본의든 아니든 휘말린 적이 많았다.
2013년 4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박미숙 기자가 "486들이 바로 그 진보적 가치를 고집한 것 때문에 민주당이 과거의 운동권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듣는 것 아닌가?"라고 묻자, "그럼 민주당이 보수당이 되라는 말인가? 이념 없는 정치는 거짓 말이다. 정당이 무슨 엔터테인먼트 회사인가? 민주당은 수권 가능한 대안 정당으로 진보의 가치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 정치에서 중간층을 목적으로 하는 건 없다.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버리나? 예를 들어 비정규직을 줄이자는 것과 늘리자는 것의 중간층은 도대체 뭔가?"라고 답하였다.
이에 대해 박미숙 기자가 "운동권 시절의 가치를 이제는 시대 변화에 맞게 좀 바꾸라는 것이 국민의 요구다."라고 하자,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버릴 수 없다. 그걸 버리면 정치를 왜 하나? 나보고 이라크 파병을, 한미FTA를 찬성하라는 건가? 내 생각의 변화가 있다면 옛날에는 각목 들고 바꾸려 했던 것을 지금은 표로 바꾸려 하는 것 정도다. 지난 총선과 대선의 실패는 지휘부의 리더십 책임이지 진보의 가치를 고집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고 본다."고 답하였다. 이로 인해 '화석화된 진보'라느니 '민중에게 권력을 주긴커녕 고립을 안겨주는 원리주의자'라느니 '약자심리, 피해자심리, 방어심리로만 가득한 운동권 출신'이라느니 하는 비난을 당하였다.
2015년 2월 전당대회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결과는 3위로 낙선.
2015년 7월에는 새민련 내에서 청년세대 정치인인 이동학과 공개논쟁을 벌였다. 이동학 혁신위원이 공개 편지를 통해 "선배님들을 응원할 든든한 후배 그룹 하나 키워내지 못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해왔고, 또 변해 가는데, 우리 사회의 새로운 어젠다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지금의 계파 전쟁이라고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이인영을 비판하면서, 이인영에게 내년 4월 총선에서 '약세 지역'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인영은 자신이 지역구를 바꾼다고 혁신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혁신위원회가 정리해고,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3권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응수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까마득한 후배에게 굴욕을 당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인영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 같아, 많은 지지자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상황이다.[1]
참고로 이때 20대 총선에서 이인영이 고향인 충북 충주로 사실상 하방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충북 충주는 야당에게 사지라고 보는 것이 맞다. 7전 7승 이시종이 충북지사에 출마하면서 사퇴한 이후의 선거에서 모두 새누리당이 64%이상의 득표를 했다. 이인영이 아무리 야당 당대표 경선까지 출마한 나름 거물일지라도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곳. 어쨌든 20대 총선에서는 단수 공천을 받으면서 자신의 지역구인 구로 갑에 그대로 출마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경쟁 체제로 불린 새누리당의 이범래 역시 20대 총선에서 타 지역구로 옮길 것을 주문 받았는데, 이범래는 실제로 지역구를 옮겼고 낙천했다(..)
2016년 4월 13일 치러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구로 갑' 더불어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최종 득표율 52.02% 로 1위로 당선되었다.
3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서울시 구로구 갑) | 새천년민주당 | 41,432 (47.0%) | 낙선 (2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서울시 구로구 갑) | 열린우리당 | 48,970 (44.7%) | 당선 (1위)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서울시 구로구 갑) | 통합민주당 | 38,878 (45.4%) | 낙선 (2위)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서울시 구로구 갑) | 민주통합당 | 58,381 (52.2%) | 당선 (1위) |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서울시 구로구 갑) | 더불어민주당 | 64,063 (52.0%) | 당선 (1위) |
- ↑ 하지만 이는 이동학 당시 혁신위원이 존재감을 어필하려는 의도로 그랬다는 분석도 있다. 별로 영양가 없었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