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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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民錫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그리고 386세대정치인.

한때는 386세대의 명실상부, 확고부동한 원톱이라 불렸으며, 대통령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 할 정도로 촉망 받았던 정치인이었다.[1] 미남이고 언변이 뛰어나고 의정 활동도 잘했기 때문에 젊고 참신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졌으며, 더군다나 서울대 졸업 + 하버드대 석사 출신이라는 넘사벽급의 커리어로 수도권에서 많은 표를 모을 수 있었고 호남에서도 DJ와 인연으로 많은 표를 모을 수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PK 출신이기 때문에 영남권에서도 상당한 득표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즉, 노무현의 젊고 잘생긴 버전이라는 것이다 물론 정몽준이 덜썩 지지를 철회한 이후로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라갔지만 말이다.

그러나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갑자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후보의 휘하로 들어가는 바람에, 한국 정치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그 후 10여년간 나름대로 재기를 시도해왔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더불어민주당이 사실상, 그가 당대표로 있었던 원외 민주당을 흡수해 더불어민주당으로 복귀하면서 겨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모양새다.

2 생애

1964년 5월 29일 부산직할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3살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서울로 올라와 초, 중, 고를 마쳤다. 그의 어머니는 재일교포로 한국말을 완벽히 구사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3형제[2]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와는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는 듯 하다.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며,[3] 4학년 때인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초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위 사진이 좀 그렇게 나왔지만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에 학생운동 시절에 미남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여대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하며, 여장도 꽤 어울렸던 모양인지(...) 경찰의 추적을 상당 기간 피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4]

그렇지만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및 삼민투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3년간 복역하였다.[5] 수감중 작은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하루 휴가를 내 찾은 병원 영안실에서 조문객으로 찾아온 김대중을 만났고 이때를 계기로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6]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등이 주도한 `꼬마 민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민주당과 김 대통령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한 `통합민주당'에 참여했다.

당시 민주당 당수이던 DJ에 의해 상품성을 높이 평가 받아, 약관 28살의 나이로 1992년 총선에 제1야당 공천을 받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던 것. 김대중의 전폭적 지원 하에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불과 200여표 차로 안타깝게 낙선하면서 나름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14대 총선에 실패한 뒤인 1993년 KBS 아나운서인 김자영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후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귀국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조순(趙 淳)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 및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후 김대중의 정계 복귀로 인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김대중을 따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제14대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최영한(최불암) 의원을[7] 꺾고 마침내 초선 의원이 되었다.

1997년 한보청문회 때는 돋보이는 논리와 질문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됐다. 19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해 외곽 지원조직인 `젊은 한국'을 결성, 차세대를 의식한 행보를 계속해왔다. 1999년 10월에는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에 의해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며 386 세대의 대표주자 위상을 확보했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순풍에 돛단 듯한 행보였다.

그러나 그때쯤 그에 대해서 "지나치게 정치, 권력 지향적"이라는 비판적 평가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 5·18 전날 새천년 NH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고, 소위 학생운동의 지도자라는 인간들이 그 신성한 날에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서 파티를 열고 환락을 즐겼다니... 사건의 사후 처리도 잘못하여 인격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었다.

게다가 2000년 12월 `권노갑 2선 후퇴' 요구를 계기로 민주당이 쇄신 파문에 휩쓸렸을 때, 당내 주류편에 섰는데, 이에 대해 너무 속 보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등 소장 개혁파 의원들에 대해 "방법론상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였는데, 그때 명분은 누가 보더라도 소장개혁파에게 있었기 때문.

그래도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언변 덕분에 새천년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체로 인기가 좋아서 2001년 당내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8]까지 오르며 유력 대권 주자로 주목 받았다. 그 결과,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상수를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인데 왜 대선 대신 서울시장에 나섰냐면, 2002년 기준 만 38세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출마의 자격은 만 40세 이상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선거 초반 판세와 토론시의 반응과는 다르게 월드컵의 영향을 제대로 받아버리는 통에(...) 이명박 후보에게 10%가 넘는 큰 차이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9] 그리고 당선된 분서울시장을 계기로 승승장구하며 대통령까지 올랐음에 반해 김민석은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고 여겨졌지만,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노무현과 결별하고 탈당을 결행하면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찍히기 시작했다.[10] 그리고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정몽준 지지를 선언하면서 국민통합21로 이적하는 바람에 철새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 때의 행적 하나가 지금까지도 김민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고 말았다. .[11]

게다가 정몽준은 후보 단일화 이후 대통령 선거 전날 노무현 지지 철회를 선언하며 레이스에서 이탈하였고, 그 바람에 결과적으론 철새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지지 철회는 노무현 승리의 큰 역할을 하게 됐다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 항의해 분신 자살하기 전까지는 명예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했지만, 이후로 출마하는 선거마다 고배를 마셨다. 당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가 당선되었고 2위조차 열린우리당 김명섭 후보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이후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자신의 출생지인 부산광역시 시장 출마를 선언했지만 경선에서 김정길대한체육회장에게 밀렸다.

2008년에는 민주당의 정세균계로 들어가,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곧바로 불법 정치 자금 수사가 발목을 잡았다. 억울함을 주장하며 당사에서 한 달 간 농성을 벌였지만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결국 통합민주당을 탈당하고 강신성이 창당한 원외 민주당에 들어가 의장 및 서울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아예 당대표로 취임했다.[12] 참고로 새정치민주연합에선 당명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돌고 있는 상황인데, 먼저 쓰던 '민주당'이란 이름은 김민석이 선점해버리는 바람에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존의 '민주당' 대신 더불어민주당(약칭 더민주)으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총선에서는 군소 정당의 한계로 결국 단 한 석도 얻지 못했고, 결국 고육지책으로 원외 민주당더불어민주당과 다시 합당 이라 쓰고 흡수라고 읽는다 하면서 도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그래도 명실상부한 제1야당으로 복귀한 덕에 다시 제대로 된 재기를 노려볼 수 있는 상태가 됐다.

3 가족관계

1993년 서울대 동창인 KBS 김자영(金慈英.38) 아나운서와 결혼했다.[13] 결혼할 당시 `운동권과 제도권의 결합', '한국의 케네디-재클린 커플' 한마디로 운동권 엄친아와 방송인 엄친딸간의 결합이라며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다가 2014년 12월에 이혼했는데, 그 이유는 김자영의 간통에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14]

정치 상황이 매우 유사한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숨겨진 형이 있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2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민주당48,151 (40.9%)낙선 (2위)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새정치국민회의49,657 (48.9%)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새천년민주당50,438 (60.4%)당선 (1위)2002. 5. 25 사퇴
(서울시장 선거 출마)
2002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새천년민주당1,496,754 (43.0%)낙선 (2위)이명박 후보 당선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갑)새천년민주당21,033 (20.9%)낙선 (3위)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2번)민주당-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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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민석과 같은 정치진영뿐만 아니라 상대 한나라당 의원들끼리도 '김민석은 10년 안에 대선 한번은 나올 거다'라고 생각했던 수준. 정치쪽 언론들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386 운동권 출신 중 중앙 정치계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던 인물이다.
  2. 김민석은 그 중 막내아들이다.
  3. 더불어민주당은수미 의원과 같은 과, 같은 학번의 동기이기도 하다.
  4. 마찬가지로 임종석도 학생운동 시절에는 미남으로 꽤 이름을 날렸으며 여장을 하고 도주한것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100분 토론에서 자신이 여장했으며 진작에 잡혔을것이라고 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5. 1988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6. 당시 김민석의 어머니가 재야단체인 민가협 회장을 맡았던 인연 때문이다.
  7.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정주영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이 낙선하면서 사실상 국민당이 해체되자 민주자유당으로 이적했던 것. 이때는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해도 국회의원직 유지가 가능했다.
  8. 1위 이인제, 3위 한화갑, 4위 노무현
  9. 당시 상황을 덧붙이자면, 초반에는 오차범위 내의 박빙을 보였으나, 월드컵의 위엄으로 유례없는 낮은 득표율과 우세했던 강북의 저조한 투표율로 인해 온갖 불리한 요소를 받으면서 큰 차이로 패배하였다.
  10. 당의 대선 후보 정도 되면 지방선거 출마자들에게 선거 자금 지원을 당연히 해줘야 하는데, 노무현이 김민석에게 돈 한 푼 안 쥐어줬다고 한다. 그래서 김민석이 수십억 원의 선거빚을 졌다고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반론하자면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확정되고도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에게 공격당하고 선거자금 돈 한 푼 쓸 수 없는 상태였다는 주장이 있다.
  11. 김민석은 2016년 김어준의 파파 이스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노무현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오로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몽준한테 갔으며 그렇게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를 만들어내어 이회창 후보에 대해 승세를 굳혔으나 다만 유세마지막날 정몽준의 지지철회떄문에 대선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명했다
  12. 현존하는 정당 중 당명이 중복되지 않기에 문제될 것은 없는 사항이다. 일례로 새누리당의 당명 변경 후 군소 정당 한나라당이 창당했으니...
  13. 방송인 김자영의 젊은 시절도 화려하긴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던 그녀는 87년 KBS 공채 14기 아나운서가 됐고 입사 직후부터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각종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두각을 나타냈다.
  14. 김자영의 내연남 아내가 김자영을 간통 혐의로 고소하였고, 이를 김민석이 알게 된 것. 물론 김자영은 간통 혐의를 부인하였고, 고소인 측에서 결정적 증거를 제출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이런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은 이혼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