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요 NL계 학생운동 단체 | |||||||||
전대협 남대협(남총련) 1992년 1994년 해산 | 한총련 2011년 이적단체 지정 | 한대련 활동중 |
1991년 전대협 5기 출범식 당시 모습.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존재했던 학생운동 단체. 약칭 전대협.
모토는 구국의 강철대오였다.
1 역사
6월 항쟁과 전대협 결성 1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1997)
1986년 10·28 건국대 사태로 1300여 명이 구속된 뒤 비합법 지하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선도투쟁에서 대중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 중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장례 절차를 위해 1987년 7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의 학생회장들이 모여 '통일된 학생운동단체'를 만들기 위해 회의를 거쳐 그 해 8월 19일에 서대협[1] 의장 이인영의 주도로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95개 대학에서 모인 3,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족식을 가졌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조국의 평화통일, 민중연대, 학원자주화, 백만학도의 통일단결 등을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은 1987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과 대선투쟁[2], 1988년 6 ·10/8 ·15 남북학생회담 시도[3] 등으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1989년에 문익환과 임수경 무단 방북 사건으로 인해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그 해 5.3 동의대 사태를 계기로 화염병 처벌법이 제정된 뒤 6월 30일에 한양대에서 열린 평축 출정식 당시에 인문관에서 고립농성하다 수천여명이 구속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수배를 당했고, 특히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그 해 총학생회 선거에서 전국 140여개 대학에서 비운동권이 당선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1년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 때처럼 정국전환을 시도하려 했으나 김지하와 박홍의 운동권 비난 발언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 사건으로 운동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결국 전대협 7기 당시인 1993년 3월 경희대에서 대의원 총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전대협은 자진해산였다. 이후의 역사는 한총련 항목 참조.
2 전대협 진군가
작사/작곡은 윤민석이 담당한 걸로 알려져 있다.
일어섰다 우리 청년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아래 (후렴) 강철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은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아아 전대협이여 우리의 자랑이여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길로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길로 |
3 역대 의장
- 1기 이인영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더불어민주당 구로구갑 국회의원
- 2기 오영식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전 더불어민주당 강북갑 국회의원
- 3기 임종석 :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전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 4기 송갑석 :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 지역위원장 [4]
- 5기 김종식 :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녹색친구들[5] 대표. 녹색당(대한민국) 당원
- 6기 태재준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카고 대학교 사회복지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