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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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東源
1934년 7월 25일 ~

1 소개

햇볕정책의 총지휘자
김대중의 키신저

대한민국군인, 정치인이다. 종교개신교이다.

2 초기 이력

1934년 평안북도 위원군에서 태어났다. 위원소학교, 선천중학교, 신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6.25 전쟁이 일어나자 1.4 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했다. 이후 국민방위군에 들어갔다가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민방위군이 해산되는 바람에 미군 부대에 들어가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고 영어를 공부했다.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제13기로 입교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직업군인으로 복무하였다. 이종찬 등과 청죽회를 결성하여 하나회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전방 소대장으로 복무하다가 육군사관학교 교수사관을 지냈다. 이후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과장, 보병 연대장, 육군본부 전략기획처장 등을 지내고 1980년 10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전두환 정부 때 주 나이지리아 대사, 주 호주 대사 등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통일원(현 통일부) 차관 등을 역임하며 북방정책의 대북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통일원 차관 재임 중인 1992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발생한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이동복대통령 훈령 조작사건 때문에 통일부 차관에서 경질되었다.

3 김대중 정부에서

1995년 아태재단 사무총장에 임명되어 김대중과 인연을 맺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 이어, 국가정보원을 지냈다. 특히 2000년 6월의 첫 남북 정상회담에도 국정원장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방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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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왼쪽),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함께 한 모습. 임동원에 따르면, 당시 김정일이 귓속말로 "임 선생, 내가 졌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당초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당국은 정상회담 조건으로 김대중 대통령 등의 방북단이 김일성이 안치된 금수산 기념궁전에 참배하는 것을 요구했고, 김 대통령 일행이 평양에 도착한 후에도 이를 고수했다.

그러나 임동원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응수했고, 결국 북한측도 고집을 꺾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대북 송금사건이 폭로된 후,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보수 진영은 위 사진의 귓속말 장면이 돈 잘받았다 대북 송금에 관한 것 아니었냐는 의심을 제기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 국정원장에서 통일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재임 중인 2001년 8월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고 경질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하는 등, 신임을 계속 인정받았다.

이후 2005년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4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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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북 포용정책이 유지되면서, 이후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는 이종석이 그의 포지션을 물려받게 되었다. 임동원은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던 1990년대에 막 박사학위를 받은 이종석이 세종연구소에 취직하도록 주선하여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북한 연구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이종석을 수행원에 포함시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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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저서로는 회고록 <피스메이커>가 있다. 이 책은 영어, 일본어판으로도 번역,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