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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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요인들이 환국 전 상하이 공항에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 태극기를 든 소년이 이종찬이다. 오른쪽에 눈물을 닦고 있는 중절모 쓴 노인이 이종찬의 작은할아버지인 성재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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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贊
1936년 4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이다. 자는 계원(桂苑), 호는 삼인(森人)이다.

1936년 4월 29일 중국에서 출생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67년 3월 17일 - 1932년 11월 17일)의 손자[1]이자 현 국회의원변호사이종걸의 사촌 형이다.[2] 이종찬의 어머니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고종의 생질녀였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둘째딸인 전주 이씨가 조정구와 결혼해서 나은 딸이 조계진이라고.

서울 창신초등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3],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였다.[4]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였고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중정에서 근무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에는 정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이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김지하와 가까운 사이여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정권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김지하가 1972년 '비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중정의 분위기가 심히 험악해지자 김지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연락을 한 바 있기도 하다.[5] 중정 수사관들로부터 조영래의 인품을 전해 들은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조영래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준 적도 있다고 한다.

이후 제 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새한국당-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을 지냈고, 국민의 정부 시절 안기부 등을 지냈다.

제5공화국 시절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는데,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들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이미지가 좋은 편에 속했다. 심지어는 진보진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라는 점에서 플러스점수를 받았던 것도 있지만, 군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학구적, 논리적인 데다, 정치적 뚝심과 사람됨, 업무능력 등에서도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 5월 17일 밤에 전두환이 김대중을 연행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전두환은 그 날 밤 김대중이 연행된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이것이 이종찬이 김대중을 돕는 정치 쇼였다. 김대중 연행은 보안사가 아닌 중앙정보부가 한 사실은 이종찬의 부하로서 김대중을 연행한 이기동이 신동아 1999년 7월호에 기고한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 전문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이종찬은 김대중에게 불리한 내란음모 증거 등을 감추어 주었다.
김대중을 중앙정보부로 연행하도록 지시한 인물은 이종찬이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자유당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서 김영삼에 도전하기도 했다. 당시 박태준, 이한동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김영삼이 대세론을 타고 있었고, 노태우도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바에야 김영삼을 밀어주자는 생각으로 김영삼을 밀어준 바람에 좌절하고 말았다. 그 후로 김영삼의 눈밖에 나자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을 창당하였다. 1995년 새한국당이 민주당에 흡수되자 민주당으로 옮겨갔고, 같은 해에 이기택계와 동교동계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및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더불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6]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회의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 전략을 조율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안기부장에 임명되었고, 안기부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7]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홍보 기획을 하기도 했다. 다만 수상했을 때 수행원에 포함되지 못해 아쉬웠던 듯하다. 동아일버에 연재 중인 이종찬 회고록 중.

김대중 대통령 당시 차기 주자로서 각광을 받던 때도 있었으나, 국가정보원 언론문건 파문 당시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 국가정보원장 자리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그 후 2000년 총선에서 종로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8]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나고 말았다. 정계은퇴 이후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근에는 종로구의 자택 1층에 조부인 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사업과 대학생들의 사회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기도 한데, 최근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전쟁'을 의식한 듯, "김구, 이승만이 화해하고, 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기념관을 건립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아내인 윤장순과는 상하이에서 막 귀국했을 당시 서울 창신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나서[9] 꾸준히 연애하다가 육사 졸업 후에 결혼하였다. 아들은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10]이다.

연예인 중에서는 가수 이선희와 친분이 있다. 이선희가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도록 권유하였다. 기타 연예인 중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는 경기고등학교 동창인 배우 신구 등이 있다.

이회영의 손자라는 점, 중앙정보부-안기부 인사이나 야당, 재야 출신 인사들에게도 평이 괜찮았다는 점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을 받고 있으나, 환빠 의혹을 받고 있다는 반전이 있기도 하다. 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이나 김석동 전 금감위원장 등과 같이 묶이는 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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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당의 둘째 아들인 이규학의 4남.
  2. 다만 두 사람의 부친은 어머니가 다르다. 본처인 달성 서씨가 1907년에 사망하면서 우당이 이듬해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했기 때문. 이종걸은 우당의 다섯번째 아들의 아들이다.
  3. 대우그룹 회장인 김우중과 경기고 동기로서 매우 친했다고 한다.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4. 원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에 가려고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5. 이외에 김지하 본인의 주장으로는 이종찬에게 쿠데타 제의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6. 김대중의 오랜 참모들은 신당 창당에 회의적이었으나 이종찬이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결국 신당을 창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7.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그의 후임인 천용택 때부터다.
  8. 1996년에도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이명박, 노무현과 함께 3자 구도로 진행되어 무난하게 이명박에게 졌고, 2000년에는 한나라당 정인봉에게 석패하였다.
  9. 그 당시 이종찬은 한국말도 잘 못하고 중국말을 섞어 쓰고 하여 '짱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10. 서울법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성균관대 법대를 거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되었다. 전공은 법사회학이다.
  11. 이덕일이 이회영 평전을 쓴 바 있는데, 이 덕분에 가까워져서 영향을 받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둘이 강연을 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