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1
張臶
(136 ~ 240)
거록 출신으로 마음을 수양해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고 권유가 올 때마다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 시대 사람으로서는 징하게도 105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동일하게 105년 동안 산 사람으로는 탁발역미가 있다. 삼국지 커뮤니티에서 장수의 아이콘중 한명으로 불리는 그 사섭보다 1년 일찍 태어나서 14년 뒤에 사망했다. 조조의 아버지뻘인 인물이 조조의 손자인 조예보다 1년 더 살았다.
소년 시절 태학에서 학문을 배워 내학과 외학에 통달해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의 소식을 들은 원소가 그를 등용하려고 했지만 장천은 이를 거부하고 상당으로 이사가 첫번째로 관직을 거부한다.
하지만 관직을 피해 달아난 상당에서도 고간이 장천을 악평의 현령으로 추천해 장천은 또다시 상산으로 이사가 두번째로 관직을 거부했으며, 상산에서도 문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자 장천은 또다시 임현으로 이사간다. 그런데 승상을 지내던 조조가 그를 임용하지만 장천은 당연히 부임하지 않아 세번째로 관직을 거부한다.맹모삼천지교의 노력 따위 이미 넘어섰다.
한동안 조용히 사는 것으로 보였다가 태화 연간[1]에 조예가 조서를 내려 은거하면서 학식이 높은 선비나 재난을 없애고 이질적인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자를 구했는데, 이는 장천을 가리키는 말인지라 군에서는 앞다퉈 장천을 천거해 그를 파견하려고 했지만 장천은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아 네번째로 관직을 거부했다[2].
광평태수 노육이 관리로 임명된 지 3일 만에 측근은 전례에 따라 명함을 장전의 집에 보내고 찾아뵙기를 권했다. 노육은 훈계하길,
장 선생은 이른바 위로는 천자를 섬기지 못하고, 아래로는 제후들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이오. 이런 사람에게 나의 명함을 바친다고 그것이 어찌 그런 분에게 장식이나 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주부를 보내 서신을 바치고 양고기와 술을 보내는 예의를 차린다.
236년 위나라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린다.
장액군의 현천이 범람해 거센 물결이 치자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보석이 나타났는데, 그 형상은 신령스런 거북이와 유사하고 물 서쪽에 머물러 있으며, 반석처럼 우뚝 솟아있고 푸르스름한 바탕에 흰색 무늬가 있소. 기린, 봉황, 용, 말은 각각 형체를 이루어 빛을 발하며, 문자가 천명을 고하는 것이 찬연히 빛났소. 태사령 고당륭이 말하기를 "이것은 고대의 성제와 선황이 일찍이 받지 못했던 신비로운 징조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는 우리 위나라가 합당하게 천명을 이는 것이니 황궁의 동쪽 벽에 넣어 대대로 이 보옥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하에 널리 퍼지니 장천이 있던 임현의 현령 우작은 예물과 함께 몇 차례 장천을 찾아가 이것에 대해 장천에게 물으니 지성이면 감천이었는지 장천은 은밀히 우작에게 말한다.
무릇 신비로운 징조는 앞날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 이미 지난 일을 좇아 기록하는 것이 아니오. 징조가 먼저 나타난 후에 흥하고 폐함이 그것을 따르는 것이오. 한나라 왕실은 이미 망한지 오래되었고 위나라도 이미 천하를 얻었는데, 무슨 이유로 과거의 흥기의 징조를 나타내겠소! 이 돌은 응당 지금의 변이로서 장래에 대한 서단이오.
라며 고당륭과 반대의 의견을 말한다.[3]
240년에 오디새가 장천의 집 음한 곳에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장천은 자기 제자들에게
무릇 오디새는 양조(陽鳥)인데, 집을 음한 곳에 지었으니 이는 흉한 화가 닥쳐올 징조이다.
라며 곧 금슬을 타고 노래를 불러 시 두 편을 지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열흘이 지나 죽으니 그의 나이 105세였다.
그 해에 광평태수 왕숙이 막 부임해 관할 현의 현령들에게 말하길
이전에 경성에 있었을 때, 장자명에 관해서 들었는데, 이곳에 와서 물으니 이미 죽었다고 해 매우 애통하오. 이 선생은 학문이 돈독하고 은둔생활을 했으며, 당시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고 오직 덕망으로만 자신을 즐겁게 했소. 옛날 강현 노인은 진흙 속에서 몸을 굽혔으므로 조맹이 그를 중용해 제후간의 관계가 화목했었소. 나는 그가 백 세 고령에도 이처럼 성실하게 배우고 도를 좋아했으나 오히려 황가의 총애를 받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오. 문서가 도착했다면 관리를 보내 그의 집을 위로하고 표창의 글을 써서 달고 특별한 관심을 보이도록 힘쓸 것이며, 이로써 고인이 된 자를 위로하고 장래 사람들을 권면하시오.
진수가 그를 기록한 이유를 말하길 문을 닫고 절조를 지키고, 세상의 영리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2
張泉
(? ~ 219)
장락위위를 지냈고 219년에 관우가 이끄는 촉군이 번성을 포위하고 이를 구원하려는 7군을 전멸시키면서 번성이 더욱 위급해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이 때 송충의 두 아들, 왕찬의 두 아들, 유위 등을 포함한 다수의 인물들과 함께 위풍과 친분이 있었는데, 위풍이 위나라 전복을 목표로 업성을 기습하는 쿠데타를 꾸민 것이 발각되면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조비에게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어 장수의 혈통은 끊어졌다.
위풍의 모반에 대해 상세한 것이 알려진 바가 없어 실제로 모반에 가담했는지, 억울하게 참살된 것인지, 의도적으로 엮어서 참살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1 미디어 믹스
창천항로에서 위풍의 반란에 가담해 위풍을 포함한 다른 이들과 함께 업의 궁전으로 진격했지만 사전에 조비가 반란을 알아내면서 오히려 포위당했으며, 위풍이 조비의 자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비는 인망은 손권, 기량은 유비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할 때 모습이 나오고 위풍을 제외한 다른 이들과 함께 화살을 맞고 죽는다.
진삼국무쌍6에서는 완성의 전투에서 등장해 전편에서는 중앙의 좌령을 격파하면 양정과 함께 동쪽에서 원군으로 등장하며, 후편에서는 성 안에서 중앙에 장수, 가후, 호거아와 함께 있다가 유표군이 원군으로 와서 조조군의 본진을 공격하면 장수, 호거아와 함께 조조군의 본진을 공격하기 위해 성에서 바깥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