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

1 용어

  • 揚程, Lift, 기계공학에서, 펌프가 을 퍼올리는 높이.
  • 良丁, 고전용어로 양인(良人) 신분의 장정을 얘기하는 말.
  • 羊鼎, 옛날에 제사을 삶던 .

2 楊汀

?~1466

조선 수양대군 휘하의 정치깡패이자 무신. 황보인김종서를 제거하는데 두루 공을 세웠다.[1]

그후 북방 사령관으로 일하다가 신숙주의 야인 토벌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신숙주가 문관이라서 무시하고 멋대로 몰래 병사들을 이끌고 여진들을 공격하다가 역으로 공격받아 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신숙주가 양정의 실수을 눈감았주었지만. 이렇게 신숙주를 무시하다가 망신당한 일을 제외하면 딱히 세조의 공신들답게(?) 별 일은 없지만.

후일 세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해 처형당한다. 정확히 말하면 세조에게 양위할 것을 종용했다가 목이 잘리는데 이것이 엄청난 일이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대신에 의해 하야가 권유된 일이 딱 세번인데 첫번째가 양정 사건이고 둘째가 유성룡, 정철이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자꾸 명나라로 넘어갈 눈치를 보이자 이왕 갈거면 광해군에게 양위하라고 가라고 말하려다 말아 그나마 미수에 그친 일이며 셋째가 이완용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킨 고종보고 "너님 미쳤구나? 어떻게 일본 천황폐하에게 그런 극악한 죄를 지을 수 있니? 어서 퇴위해서 사죄해라!"라고 깽판을 친 일이다.
이중에서 양정의 일을 빼고는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해있던 경우다. 그나마도 임금이 의주까지 피란을 와서 중국으로 넘어가려고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음을 어필하는 상황에서도 대신들이 감히 하야를 권유하지 못했는데 양정은 세조의 위엄과 권위가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양위를 요구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건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1466년, 즉 세조 12년에 양정은 오랜 북방 근무를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왔고 이에 세조는 연회를 베풀어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했다. 이에 세자와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병조 판서 김국광(金國光)·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도총관(都摠管) 심회(沈澮), 위장(衛將) 오자경(吳子慶)·허형손(許亨孫)·신주(辛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서거정(徐居正)등의 대신들이 참석했고 한창 흥이 무르익던 찰나였다.
당시 논쟁 공연이란 것을 즐기던 세조는 그 날도 가장 총애하던 두 논쟁꾼인 최호원과 안효레를 데려와 논쟁을 즐기려고 했는데 둘은 세조가 니들 기분 나쁜거라도 있냐?라고 재촉까지 했는데도 신경전을 벌이며 입을 열지 않았고 술에 취한 세조는 "임금이 명하는데 이것들이 말을 안해? 니들이 그러고도 신하냐?"라고 화를 내고 둘을 하옥하게 했다. 좌중은 급격히 싸늘해졌는데 세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세조가 이런 적이 한두번은 아니다. 술만 들어가면 까불었던 정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바른말 한번 했다가 강맹경은 최단임 영의정 기록을 세워야 했고 권람은 최단임 좌의정 기록을 세워야 했다. 아마 세조의 특성상 술김에 확 하옥시키긴 했어도 며칠 안가서 풀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양정이 갑자기 세조 앞에 꿇어앉았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대화이다.

양정(楊汀)이 앞에 나아와 끓어앉아서 아뢰기를,

“성상께서 어찌 과도하게 근로(勤勞)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주(君主)는 만기(萬機)를 모두 다스리고 있으니, 어찌 근심하고 부지런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양정이 대답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임어(臨御)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오로지 한가하게 안일(安逸)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말하는 바는 곧 사시(四時)의 순서(順序)에 성공(成功)한 자는 물러 간다는 것인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부터 왕위(王位)에서 물러나 스스로 편안하려고 했으나 감히 하지 못하였다.”

하니, 양정이 말하기를,

“이것이 신(臣)의 마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서방(西方)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서방의 인심(人心)도 또한 이와 같던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그 누구들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죽고, 신숙주와 한명회도 죽고, 경(卿)도 또한 죽어서 임금과 신하가 모두 죽는다면 국가의 일은 누가 다스리겠는가?”

하니, 양정이 대답하기를,

차차(次次)로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

하고, 즉시 승지(承旨) 등에게 명하여 대보(大寶) 를 가지고 오게 하여 즉시 세자(世子)에게 왕위(王位)를 전하려고 하니, 승지(承旨) 등이 부복(俯伏)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신숙주·한명회 등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성인(聖人)은 천하를 관가(官家)로 여겨서 집안에 현명(賢明)한 아들이 없으면 도부(陶夫) 를 구하여 천하를 물려 주었는데, 하물며 지금 세자(世子)의 재주가 능히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이겠는가? 내가 이미 덕이 적어서 백성의 마음이 떠나버리었다. 양정은 정직한 신하인 까닭으로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감히 임금의 자리에 오래 있겠는가?”

하면서 신면(申㴐)을 재촉하여 나가서 대보(大寶)를 가지고 오게 하니, 신면이 마지 못하여 나가서 상서원(尙瑞院)에 이르러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서 옥새(玉璽)를 받들고 앉아 있으므로, 또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재촉하니, 윤필상이 나가서 신면(申㴐)과 더불어 서로 이르기를,

“신(臣) 등이 비록 죽더라도 어찌 감히 옥새를 받들어서 바치겠는가? 차라리 임금의 명령을 어긴 죄를 받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承旨) 등은 어찌 옥새를 가지고 오지 않는가? 옛날에 우리 태종(太宗)께서 왕위(王位)를 전하려고 하니 그때의 여러 신하들이 즉시 옥새를 가져 오지 않았는데, 오늘날에도 어찌 마땅히 이와 같이 하는가? 만약 큰 일이 이미 정해졌다면 어찌 대보(大寶)를 전하고 전하지 않는 데에 관계되겠는가? 그것을 속히 가지고 오라.”

하고, 또 홍도상(洪道常)·정난종(鄭蘭宗)·이수남(李壽男) 등에게 명하여 이를 재촉했으나, 홍도상 등도 또한 상서원(尙瑞院)에 와서 죽어도 명령에 응하지 않기로 기약하였다. 또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물거윤(勿巨尹) 이철(李徹)과 의빈(儀賓) 정현조(鄭顯祖)·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 등에게 명하여 옥새를 가져 오게 했으나 부(溥) 등도 또한 나가서 머뭇거리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양정(楊汀)이 아직도 어탑(御榻) 아래에 있다가 부르짖기를,

“임금의 명령이 이와 같은데, 승지(承旨) 등은 어째서 대보(大寶)를 가져오지 않는가?”

하면서 이를 재촉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었다. 임금이 또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가서 가져오게 하니, 세자가 마지 못해서 보루문(報漏門) 밖으로 나갔다. 승지 등이 끓어앉아 아뢰기를,

“대보(大寶)는 신(臣) 등이 맡아서 지키는 바이니, 신 등이 마땅히 친히 받들어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세자가 도로 들어왔으나 복명(復命)하기가 어려워서 겉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다. 신숙주·한명회 등이 전상(殿上)에서 슬피 통곡하면서 되풀이하여 진청(陳請)하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마지 않았다. 이때 밤이 이미 삼경이 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서 신숙주에게 명하여 술잔을 올리게 하고는 마침내 내전(內殿)으로 돌아갔다. 신숙주가 물러와서 신면(申㴐)에게 이르기를,

“이미 임금의 뜻을 자세히 알았으니, 임금의 노여움을 더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신면이 옥새를 받들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오니, 임금이 명하여 대보(大寶)를 강녕전(康寧殿)에 두게 하고, 신면을 불러 술잔을 올리게 하고서 말하기를,

“그대는 신숙주의 아들이니, 진실로 인물(人物)이 무리가 각기 같지 않도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또한 모두 헤어져 나갔다. 신숙주·한명회·한계희 등은 사정전(思政殿) 문 밖에 남아 있으면서 아뢰기를,

“양정(楊汀)의 말은 정상(情狀)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법사(法司)에 내려서 추국(推鞫)하여 중한 형벌을 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신숙주 등을 불러 다시 술자리를 베풀고는 전교(傳敎)하기를,

“양정이 어찌 정상이 있겠는가? 이것도 또한 바른 말을 한 것뿐이다.”

하였다. 신숙주 등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뢰기를,

“양정의 말은 도리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은 양정이 공신(功臣)이라 하여 차마 가두어 국문(鞫問)하지는 않고 논의하다가 시간이 넘어서야 파하였다.

한마디로 너 오래 해먹었으니 이제 그만 물러나라! 라고 대놓고 요구를 하면서, 원로 대신들이 주저하자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재촉까지 한 셈인데, 좌중은 발칵 뒤집어졌고 노한 세조는 옥새를 가져오길 재촉했다. 세자는 아예 겁을 먹고 들어오질 못했고 신하들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는 엄청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하들이 양정을 죽이라고 청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양정은 6월 8일에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고 4일 만인 6월 12일에 참수되었다. 다음은 실록의 기록이다.

도승지(都承旨) 신면(申㴐)과 의금부 판사(義禁府判事) 윤자운(尹子雲) 등이 강녕전(康寧殿)에 들어가서 양정(楊汀)에게 과죄(科罪)할 일을 친히 아뢰니, 임금께서 글로써 유시하기를,

“양정(楊汀)이 나를 도와 나라를 안정시켜 이름이 훈록(勳錄)7586) 에 성대(盛大)하고 변경(邊境)을 지킨 지도 몇 해가 되었으므로, 바야흐로 칭찬하여 더욱 존중(尊重)하려고 했었으나, 성품이 본디부터 경망하고 우매하여 나의 강직(剛直)하고 명민(明敏)한 것을 꺼려서 빨리 왕위(王位)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언설(言說)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죄주기를 청하고 종친(宗親)과 훈신(勳臣)도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건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지나친 일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의로운 일과 다름이 없다. 대체로 두 마음을 품고 금장(今將)7587) 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대악(大惡)이니, 공의(公議)에 힘써 따라 사정(私情)을 끊고 죄를 정하여 8도(道)에 돌리게 하는데, 부자(父子) 이외에는 모두 연좌(緣坐)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말하기를,

“양정의 죄는 비록 크지마는, 그대로 훈로(勳勞)가 있으니 참형(斬刑)은 그 자신(自身)에만 그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즉시 명하여 양정을 도성문(都城門) 밖에서 목베게 하고, 그 아우 양지(楊沚)·양호(楊浩)·양형(楊泂) 등을 모두 파직하게 하고, 그 아들은 그대로 가두어 두게 하였다. 양정은 처음에 매우 미천(微賤)했으나 팔뚝힘이 있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임금이 정란(靖亂)할 적에 공로(功勞)가 있었으므로 존귀(尊貴)해져 양계(兩界)에서 오랫동안 진수(鎭守)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훈구(勳舊)로서 오랫동안 외방에서 노고했다고 여겨서 평거(平居)할 때 늘 마음에 불만(不滿)을 품고 있었다. 그가 평안도(平安道)에 있을 적에는 교만하고 방종하여 꺼림이 없어서 사람을 죽인 것이 또한 많았었다. 한명회(韓明澮)가 여러 번 말하기를, ‘평안도는 양정에게 진수(鎭守)시킬 필요가 없습니다.’고 하니, 임금께서도 또한 양정을 소환(召還)하려고 했으나, 그 대신할 사람을 어렵게 여겨서 이를 지체(遲滯)시켰더니 양정이 더욱 분개하여 원망함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주대(奏對)하는 데에 조리가 없었고 말이 문득 불손하였으므로 마침내 대륙(大戮)에 이르게 되었다.

사관은 양정이 북방에 오래 처박아 놓아 불만을 품고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추측했으나 박시백 화백의 경우에는 그래도 이제 호화로운 한양 생활이 시작되는 마당에 그랬을 것 같지는 않고 북방에서 병사들과 같이 고생을 하여 노고를 아는 인물이 한양에서 세조와 신하들이 노는 꼴을 보고 속이 뒤틀려서 그랬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했지만 누가 알리오, 당사자만이 알겠지.

그러나 세조는 결국 양정이 죽은 3년만에 예종에게 양위했다.(...) 양위한 다음 날 붕어하셨기는 한데...

3 후한 말의 장수

楊定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 동탁 수하의 장수. 자는 정수(整脩).

양주의 대인으로 192년에 동탁이 피살되자 왕윤의 편에 붙었지만 본래 왕윤과 친하지 않았고 이각이 군사를 일으킬 때 호진과 함께 부름을 받아 해산하라고 지시해 서영, 호진 등과 함께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과 싸우러 갔지만 왕윤이 동탁을 죽인 뒤에 교만해져 별로 마음에 안 들던 상황이라 호진과 함께 배신을 해서 서영을 죽이고 이각 등이 권력을 잡는데 협력한다.

195년에 이각과 곽사가 서로 싸울 때 이 둘을 피해서 천자가 수레를 호송할 때 따라갔는데, 가을 7월에 후장군이 되었고 겨울 10월에 양봉과 함께 곽사와 싸워 격파했다. 그 후에는 단외가 다스리는 화음에 주둔했다가 단외와 사이가 나빠 천자를 자신의 진영에 모시려 하는 것을 저지하다가 싸웠는데, 승부를 내지 못하다가 이각, 곽사가 단외를 지원하자 형주로 피신했다.

4 양정의숙(養正義塾)

1905년도에 설립된 대한 최초의 민족사학. 몽이양정 양심정기(蒙以養正·養心正己)라는 창학이념으로 세워진 양정의숙은 황실의 재정을 바탕으로 순종 황제의 황비였던 엄귀비가 설립을 추진하였고, 군부협판으로 있던 엄주익이 초대 숙장에 취임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구식 법학을 도입해 헌법, 형법총론, 민법총론,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국제법 등 20여 개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1913년 일제에 의해 양정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고, 1930년대에 만리재 고개 중턱으로 이사했다. 당시 양정고보에서는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수가 배출되기도 했다. 이후 5대 사립고등학교라는 명칭으로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는 학교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고교평준화 이후로 대학진학률이 떨어지던 양정고등학교는 1988년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에 신 교사를 짓고 이전하였다. 이후 강남에 뒤지지 않는 대학진학률을 보여주게 되었고 깊은 역사와 특색 활동으로 명성을 날리던 양정고등학교는 2011년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하였다. 깊은 역사와 높은 학교명성으로 재학생들은 모교를 '대양정' 이라 칭한다.

5 양정역

해당 항목 참고.

6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

현토성의 태수. 본래는 개마국의 왕자 출신으로 금와왕과도 친분이 있었으나 한나라에 볼모로 간 뒤로 등을 돌렸다고 한다. 작중 주몽을 적대하는 강력한 악역으로, 딸인 양설란을 대소에게 시집보내며 부여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끝내는 주몽에게 사로잡혔으나, 투항 권유를 뿌리치고 죽음을 택하였다.
  1. 아닌게 아니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직접 찔러 죽인 핵심공신이 바로 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