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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정훈(鄭勳) |
생년월일 | 1979년 2월 9일 |
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시 |
학력 | 충암초 - 충암중 - 낙생고 - 성균관대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신체조건 | 197cm, 85kg |
프로입단 | 2002년 울산 모비스 1라운드 2순위 |
소속팀 |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2002~2003) 원주 TG삼보 엑써스(2003~2004) 국군체육부대(2004~2006) 원주 동부 프로미(2006~2007) 전주 KCC 이지스(2006~2009) 대구 오리온스(2009~2011) |
국가대표팀 | 2005 도하 ABC[1] - 4위 |
등번호 | 7번 |
1 개요
한국 남자농구 매니아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비운의 유망주 중 대표적인 선수. 대학시절 장신 포워드로서 경기장을 휘젓는 전천후 플레이에 많은 팬들이 기대를 했지만 KBL 특유의 양궁농구와 빈약한 멘탈문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망가진 대표적인 선수다.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농구를 시작하기 전엔 야구선수로 장성호와 충암중에서 같이 뛰기도 했던 정훈은 개인사정으로 1년만에 야구를 포기하고 일반 학생으로 명지고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우연히 농구를 시작하게 된 뒤 자신의 은사인 박성근 감독을 만나 낙생고로 전학하게 되었다. 이후 정훈은 박성근 감독의 지휘아래 이한권, 진경석과 함께 활동하며 주목받는 고교농구선수로 등장해 대어급 유망주로 지목받았고 이들은 낙생고 3인방이라 불렸다. 결국 박성근 감독과 함께 성균관대로 진학해 농구를 계속했고 2002년 드래프트에서 중앙대학교의 거물 센터 김주성에 이어 2순위로 모비스에 드래프트되었다.
일찍이 고교, 대학시절만해도 농구 매니아들의 로망과도 같은 선수가 바로 정훈이었다. 197cm라는 센터급 신장에 가드급 스피드와 볼 핸들링, 다양한 개인기 돌파나 이타적인 패싱마인드까지 가졌던 전천후 포워드인 정훈은 농구 매니아들의 갈증을 풀어줄 장신 스몰포워드 유망주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흔히 한국농구 국제대회에서 2,3번 라인을 전담한 허재나 문경은이 국내리그에서 보여준 활약덕에 많은 시청자들이 이들을 약점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중국 이상의 팀 상대로 국제경기에서 이들은 늘상 약점이었다. 부동의 포인트가드 강동희, 이상민은 아딜잔(위구르족) 한명 정도만 제외하면 중국의 포인트가드진에 늘상 상대우위를 보였고, 김유택, 서장훈은 야오밍, 왕즈즈, 산타오 등 중국의 210cm이 넘는 빅맨들 상대로 어떻게든 버텨줘서 포인트 가드와 골밑은 의외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번번이 허재, 문경은보다 10cm는 큰 중국의 스몰포워드진 후웨이동, 류웨이 등의 2미터대 장신 스몰포워드진이 우리 수비를 앞에 두고 3점슛을 마구 성공시키면서 추격, 역전에 실패하는 시나리오가 일상적이었을 정도. 허재는 그래도 2번 포지션에서 득점을 해주면서 그 차이를 메꿨지만 결국 높이를 앞세운 외곽슛 수비는 한계가 있었고 문경은은 거의 자동문 수준이었다.
특히 이시기 연세대학교의 김동우, 양희종이나 고려대학교의 김동욱, 오용준, 중앙대의 송영진, 성균관대 동기 이한권 등 한국농구가 정말 필요로 했던 장신 스몰 포워드 유망주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갔던 선수가 정훈이었다. 그러나 정훈뿐만이 아니라... 이들 대부분이 망했다. 정훈과 비슷하게 한국프로농구에선 어정쩡하기 그지 없었으며 많은 선수들이 신장과 스피드의 부조화 때문에 고질적인 무릎부상을 달고 살면서 더더욱 힘을 잃었다. 김동욱의 경우는 여기에 수능점수 미달로 1년을 통째로 쉰 것이 더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있던 포워드 이규섭은 사실상 센터에 3점슛기능만 달아둔 선수였기 때문에 스몰 포워드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3 프로 선수 시절(몰락)
그러나 정작 프로에 와서는 대학시절의 활약과 위상은 오히려 철저한 약점이 되었다. 한국프로농구에서는 외국인 선수들과 국내선수의 체격조건 차이와 기량차이가 명백히 존재했고, 외국인 선수와 같은 포지션에서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국내파 포워드들은 국내 감독들의 공격 전술에서 제외돼 철저한 외국인 선수 보조역할에만 충실해야만 했다.
이 때 국내 10개 농구팀의 공격전술은 공히 외국인 선수들의 골밑 공략/빼주는 볼 3점 연결, 심한 팀들은 "핏마느님이 다 해주실거야!" 수준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KBL의 감독들은 안전빵 전술로 외국인 선수 외에는 철저하게 패스 혹은 받아먹기 3점 외의 개인 전술을 금지했고 이런 여건에서 정훈처럼 볼을 가져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공격형 포워드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훈보다 한 살 많고 키도 비슷했던 촉망받던 빅맨인 이규섭은 프로에서 3점을 장착해 슈터-_-로 정착해버리고 만다.
때문에 정훈의 장점인 올라운드 능력은 프로에선 이도저도아닌 어정쩡한 능력으로 전락하고 몸싸움에 약한 면을 드러내며 기회를 잃어갔다. 또한 운동선수치고 상당히 소심한 편이었던 정훈은 승부근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으며 팀내에서도 기회를 받지 못하고 사실상 실패한 유망주로 취급되어 모비스에서 한시즌 만에 원주 동부로 팔려가고, 상무 제대후에도 제대로 실력을 내지 못하고 전주 KCC, 대구 오리온스를 옮겨다니며 저니맨으로 전락했다.
국내 프로농구의 현실에 희생된 대표적 유망주. 그리고 국내 농구계가 왜 아시아에서조차 경쟁력을 상실했는지 보여주는 산 증인이라 하겠다. 대신 이 기대는 최진수에게로 갔다. 그리고 또 다시 최준용에게로 간다
- ↑ 상무 입대 후 대학시절의 폼을 어느정도 되찾으면서 상무를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었고,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전창진 감독(정훈의 원소속팀 원주TG의 감독이기도 했다.)에 의해 이규섭의 대체선수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된다. 그러나 양궁농구를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대표팀은 방성윤-문경은-양희승 등 외곽슈터들이 중용되었고면서 정훈은 수비전문으로 간혹 기용될뿐 출장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다.(팀에서도 안썼는데, 대표팀에서 쓸리가.. 전창진 감독은 애초에 전술이해도 낮은 선수는 기용하지 않는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