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은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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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26일, 일본에서 일어난 은행강도 및 살인 사건.

사건의 현장인 제국은행.

1 개요

1948년 1월 26일, 일본 도쿄 토시마구에 위치한 제국은행에 오후 3시가 넘어갔을 때, 도쿄도 방역반의 하얀색 완장을 찬 중년 남자가 나타나 후생성 기관의 명함을 내밀고선, 은행 직원들에게 "가까운 곳에서 집단 이질이 발생했습니다. GHQ가 이 은행을 소독해야 하는데, 소독 전에 우선 여러분들은 예방을 위한 약을 먹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은행안에 있던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남자가 건네주는 약이란 걸 받아먹었다. 그것은 남자가 제일 먼저 약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약을 그냥 먹으면 치아의 에나멜질이 상하기 때문에, 혀를 쭉 내밀어서 먹어야 된다고 해 사람들은 남자의 말을 따랐다. 약을 먹고 난 뒤 약을 먹은 이들에게 마치 위스키를 마신 것처럼 가슴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자, 남자는 두 번째 약을 먹으면 괜찮아진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두 번째 약을 받아 마셨다. 한 여자가 물을 마셔도 되겠느냐고 묻자, 남자는 허락했고 여자는 물을 마셨지만 고통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 당시 신문에 실린 중독되어 쓰러진 이들의 사진.

사실 그 남자는 후생성 직원도 아니었고 그 약이란 것도 예방약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건넨 것은 약이 아니라 시안화칼륨 혹은 아세톤시아노히드린으로 추정되는 청산화합물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후 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된 상수도 시설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라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범인의 이런 수법이 통했던 것이다. 은행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먹고 중독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틈에 남자는 유유히 은행 창구에 있던 현금 16만엔과 수표 17,450엔을 챙겨서 도망쳤다.

사건이 알려진 것은 한 여성이 실신을 계속 하면서도 은행 밖으로 나와 도움을 청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16명이나 되는 사람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쓰러진 탓에 경찰의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1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한명은 병원으로 이송된 후에 숨졌다. 도난당한 수표는 사건 바로 다음날인 27일에 현금으로 환전되었지만, 경찰이 이를 확인한 건 28일이 되어서였다.

2 수사 과정

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유사한 범행이 두 차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1947년 10월 14일, 은행 영업시간이 끝난 후,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에 한 남자가 나타나 후생성 기관 의학박사 마츠이라고 쓰인 명함을 내밀면서, 이질에 걸린 환자가 오전 중에 이 은행에 왔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은행직원들과 돈을 소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점장은 경찰서에 연락해 순경을 불러서 확인하자, 순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면서 확인을 해보겠다고 했다. 순경이 나간 사이 남자는 제국은행 때와 완전히 똑같은 수법으로 약을 먹였지만, 사망자는 나오지 않아 도망쳤다. 남자가 건넨 명함은 진짜였고, 후생성 기관에 마츠이라는 사람이 근무하는 것도 사실이어서, 마츠이가 범인으로 의심을 받았지만 그의 알리바이가 증명되었기 때문에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 1948년 1월 19일, 미츠비시 은행 나카이 지점에 한 남자가 나타나, 후생성 기관 의학박사 야마구치 지로 도쿄도 방역과라고 쓰인 명함을 내밀고, 야스다 은행 에바라 지점에 나타났던 남자와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지점장이 은행 직원들에게 약을 먹이고 돈을 소독하겠다는 말을 의심해, 은행 업무시간이 지나 현금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자 남자는 직원들의 창구에서 소액 우편환을 찾아내, 소독액이라면서 투명한 액체를 뿌린 후 나갔다. 후에 명함은 가짜였고 야마구치 지로라는 사람도 없는 사람이란 게 밝혀졌다.

사건 초기에 경찰은 구 일본군, 특히 세균전 부대였던 천하의 개쌍놈 731 부대의 관련자들에게 혐의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사건의 수법 등이 화학물질의 취급에 익숙한 자가 아니면 힘든 방법이었고, 방역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을 사칭했다는 점에서 731 부대 관련자가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사팀은 구 일본군 육군 제9연구소 소속의 반 시게오라는 자로부터 유력한 정보를 입수해, 형사반장은 구 일본군의 특수요원들 쪽으로 수사망을 좁혔다. 그런데 갑자기 GHQ에서 구 일본군 특수요원들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수사는 난항에 봉착했다.

다른 한편으로 유사사건들에서 나온 명함, 특히 마츠이의 명함을 가지고 수사를 진행하던 다른 팀이 마츠이 명함의 행방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갔다. 당초 수사팀 내에서 명함을 가지고 수사하던 팀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지만, 사건이 난관에 봉착하자 이쪽으로 수사방향이 급선회 되었다.

마츠이는 자신이 명함을 준 날짜와 장소, 상대를 모두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추적은 나름대로는 쉬운 편이었다. 100장의 명함들 중 마츠이 자신이 8장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92장중 62장를 수거했고, 수거하지 못하고 받은 이들이 분실한 명함이 22장이었는데, 이는 사건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머지 행방을 끝까지 추적하지 못한 8장이 있었는데, 이것들 중 한 장을 범인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3 범인 체포

그리하여 1948년 8월 21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유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히라사와 사다미치를 체포했다. 명함을 추적하던 수사팀이 히라사와를 체포한 이유는 마츠이와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들 중 히라사와는 그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사건 시간당시 제국은행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았으며, 과거에도 은행에서 사기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제국은행에서 도난 된 금액과 거의 똑같은 액수의 금액이 예금되어 있었던 것이 발견된 탓이었다. 히라사와는 그 예금에 대해서 해명을 하지 못했는데, 춘화를 팔아서 번 돈이 아니냐는 설에 히라사와는 끝까지 부정했고, 오늘날까지도 이 예금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에서 히라사와와 생존자들을 대질했지만, 어느 누구도 히라사와가 그 범인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히라사와는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하다가 9월 23일부터 자백을 시작해 10월 12일, 제국은행 사건과 앞서 일어난 유사사건 2건의 범인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12월 20일에 열린 공판에서 히라사와는 갑자기 자백을 뒤엎고 범행을 부인했다.

4 재판과정

그러나 히라사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1950년 7월 24일, 도쿄지방법원은 히라사와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하필이면 과거 히라사와가 니혼도 사기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여론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니혼도 사기사건과 제국은행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며, 범죄수법도 사기와 대량살인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히라사와는 다시 항소했지만 1951년 9월 29일, 도쿄고등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최후로 다시 최고재판소에 항소했지만, 1955년 4월 7일, 최고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하고 5월 7일 최종적으로 사형을 확정했다.

사실 히라사와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 사건의 정황이 히라사와가 범인이라고 상정하고 보면 무리한 게 많다는 점
• 히라사와가 광견병 예방접종의 후유증인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있어, 그 진술에 신빙성의 의심스럽다는 점
• 히라사와를 심문한 당대 일본의 유명형사 히라츠카 하치베의 심문이 고문에 가까웠다는 점
• 결정적으로 히라사와의 사형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히라사와의 자백조서 3통이, 실은 사건조사에 관여하지도 않은 이데이 요시요 검사가 히라사와에게 백지를 건네서 지장을 찍게 한 것임이, 자백조서를 감정한 오무라 토쿠조 박사에 의해 밝혀진 것.

등이 의혹으로 제기되었기 때문. 이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추리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등이 히라사와의 무죄를 주장하며 탄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의 법무대신들은 엔자이 의혹이 있는 사건에 대한 이전의 대처와 마찬가지로 히라사와에 대한 사형집행 명령서에 서명하는 걸 거부했다. 만일 범인이 아닌 걸로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감당이 안된다는 것이 이유. 심지어는 신문기자들 앞에서 한꺼번에 26명의 사형수들의 사형집행 명령서에 서명한 법무대신 타나카 이타이조차도, 히라사와는 범인이 아니겠지라고 말하면서 사형집행 명령서에 서명하려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1962년, 히라사와는 토호쿠의 미야기 형무소로 이송된다. 토호쿠의 기후가 좋지 않은 탓에, 일각에서는 일본 법무성이 히라사와를 처형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계속 가둬두면 뉴스가 되니까 기후가 안 좋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병으로 죽어서 잊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저명한 잡지 타임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런 점을 꼬집었을 정도였다.(…)

5 뒷이야기

1968년, 전후 GHQ 통치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들 중 몇 건에 대해 재심을 시행하는 특별법안이 통과되었고, 그중에는 이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법무장관이 특별법안의 대상이 된 사형수 7명에 대한 특별 사면을 검토하기도 했다. 결국 멘다 사건등은 무죄로 확정되었지만, 히라사와는 무죄도 특별 사면도 받지 못했다. 그는 계속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일본 정부는 사형은 집행하지 않는다 해도 무죄가 될 때까지는 구치소에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결국 히라사와는 계속 사형집행도 되지 않고 재심도 받지 못한 채로 감옥에 있다가 1987년 5월 10일, 하치오지 의료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다만 히라사와의 양자와 구명운동가들이 히라사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도쿄 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여 재판은 계속되고 있다.

히라사와가 과연 범인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당시 범인이 사용한 독극물에 대해 희생자들의 사체를 부검하거나 토사물 등에서 추출해 검사했으나, 액체의 보존상태가 나쁜 등의 이유로, 청산 화합물인 것까지는 알아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물질인지는 끝내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건 당시,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가 이 사건을 추적한 결과, 구(舊) 일본군 육군 제9연구소에서 아세트시아노히드린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청산가리가 인체에 들어가면 즉시 효과를 나타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과는 달리, 아세트시아노히드린은 인체에 들어가도 약 1~2분 후에 효과가 나타나는 점, 피해자들이 죽어도 사체에서는 청산화합물이란 거 외에는 밝혀낼 수 없을 정도라는 것 등이 특징이었다는 것. 그러나 경찰이 GHQ의 외압으로 구 일본군 육군 관계자들을 수사하지 못하면서, 요미우리 신문도 더 이상 이 사건을 취재하지 못했다.

1985년 GHQ의 기밀문서가 공개되어 요미우리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사건의 범인의 수법이 군비밀과학연구소의 독극물 취급 매뉴얼에 나온 것과 일치하고, 범행 시 사용한 도구가 그 연구에서 사용한 도구와 일치하며, 1948년 3월에 GHQ가 이 연구소에 대한 취재를 일체 금지했다는 내용이었다.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대로라면, 히라사와는 범인이 될 수 없는 게 당연했는데도, 일본 법무성이나 법원은 이 보도를 무시했다.

히라사와가 사망한 다음날, 당시 사건 수사에 협조했던 반 시게오가 TV에 출연해 진범은 히라사와가 아니며, 구 일본군 육군 관계자다라고 강조했으며, 사건 당시 수사팀의 일원이었던 나루치 히데오의 회고록에도, 범행은 히라사와처럼 화학물질이나 독극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며, 진범은 구 일본군 특수부대에 있던 군인 출신이라면서, 731 부대 관련자 50명중 S모 중령이 진범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731부대 출신 인사들은 나루치 히데오가 말한 S모 중령과 같은 동일 인물은 확인하지 못하고, S모 중령과 성은 같고 이름이 비슷한 2명의 다른 사람이 있다고 말해, 나루치 히데오가 이들을 혼동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사건으로부터 6년 후인 1954년 이바라키현에서 이 사건과 흡사한 수법의 청산 독극물을 이용한 대량 살상사건이 일어났다. 제국은행 사건처럼 사람들에게 보건소에서 나왔다고 말한 뒤 독극물을 약인 것처럼 먹게 하는 수법이었다. 변호인단이 이 사건과의 관련성을 캐내기 위해 현지에 잠입했지만, 체포된 용의자가 음독자살했기 때문에 끝내 이 사건과의 연관성은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 수사에서 히라사와가 어떻게 독극물을 입수해서 사용했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과 사건의 정황으로 볼 때, 히라사와가 범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GHQ가 외압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실제 범인이 GHQ의 필요에 의해서(어쩌면 구 일본군의 비밀 연구자료를 받는 대가로) 숨겨지고, 엉뚱한 히라사와가 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GHQ의 일본 통치기간에 벌어진 대표적 사건인 일본 국철 3대 미스테리 사건도 무리한 경찰, 검찰의 짜맞추기 수사와 GHQ의 개입 의혹 등으로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이 사건 또한 그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 사법부가 의심은 가는데 1심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관행 때문에 히라사와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가둬두기로 했다면 얼추 들어맞는다.

6 창작물에서

사건의 수법이 워낙 극적이라서인지 여러 소설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 히라사와의 구명운동을 벌였던 마츠모토 세이초는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 "제국은행 사건"과 GHQ 통치기간에 일어난 의문의 사건들을 추적한 "일본의 검은 안개" 등의 대하 논픽션을 집필했다. 이 작품 마지막에는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사건이 이런 검은 안개의 종착점이라고 한다. 이 시리즈는 이어령에게 제대로 비난받았다. 일명 마츠모토 정신병자설. 근데 마츠모토 세이조 단편선집 하권에서 이어령의 비난을 다시 비판하는 글이 있다.

•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의 한권인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에서 소설 첫 부분에 나오는, 10명을 독살하고 보석을 훔친 천은당 사건은 이 사건을 모델로 했다.

• 미국의 추리소설가 엘러리 퀸도 이 사건의 대담성에 놀라 "엘러리 퀸의 국제사건부"에서 소재로 삼았다.

• 교고쿠 나츠히코의 백귀야행 그림자 제9탄 사매의 우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자로 여겨지는 인물에 대한 기술이 있다. 또한 망량의 상자에서도 작중에서 이 사건이 언급된다.

•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에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아오사와가 독살 사건 역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 영국 작가 데이비드 퍼스의 "Occupied City"는 이 사건을 다룬 논픽션으로 워너브라더스가 이를 영화화할 예정으로 있다.

•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악마의 포식에서는 상기(上記)된 가설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독을 먹일 수 있다는 건 경험에서 나온다는 이유로, 당연히 마루타를 대상으로 해본 적이 있는 731 관계자가 유력한 용의자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 2004년에 나온 이마가와 야스히로의 철인 28호에 등장한 괴도 블랙 마스크 에피소드의 초반부에 나온 나레이션이 설명하는 식으로 나온 사건은, 이 사건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