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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은 쏠림 현상이 심해요. 왜 똑같은 소리만 하냐. 팔로우가 10만이라고 자랑하지 마세요. 내 필터에는 10만 개의 다른 의견이 있다. 이런 걸 자랑해야죠. 나는 내가 지금까지 써 온 글이 전부 엉터리라고 하는 자기 부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일찍 죽어도, 나중에 죽어도 똑같아요.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요. 내가 오죽하면 ‘젊음의 탄생’이라는 말을 썼겠어요. 젊음은 있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것이다. 오늘 태어나고 오늘 죽어라. 끝없이 태어나고 죽어라. 우린 영원할 순 없지만 무한히 태어나서 무한히 죽을 수는 있다. 이게 내가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말이에요.
1 개요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 사회기관단체인이자 관료로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으며 소설가, 시인이자 수필에 희곡까지 써낸 작가이다. 종교는 원래는 무종교였으나, 언젠가부터 개신교에 귀의해서 현재의 종교는 개신교이다.
호는 능소(凌宵)이다. 1934년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 이민아(1959년~2012년)는 목사이자 변호사였으며 소설가 겸 정치인 김한길의 전 부인이었다. 그리고 재종숙부(7촌)가 이병도이다.
부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다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강사,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실은 1933년생이라고 한다. 집안 형편은 부잣집도 가난한 집도 아닌 중간 정도였다고. 그래도 그 시절에 아버지가 사업을 하실 정도이셨다고 하니 중산층 중에서도 비교적 잘 사는 집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업이 실패하든 말든 마음이 끌리기만 하면 무슨 아이템이건 간에 시작하고 보는 성격이셨기 때문에 물론 성공해도 흥미를 잃으면 때려치셨다는 얘기다 어렸을 때는 실패한 상품들이 재고가 남는 것들은 모두 자기에게로 와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어령은 이후 이런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어머니는 아주 감성적인 분이셔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거기다가 형들도 모두 예술 하는 사람들이어서 자연스럽게 그쪽 분야에도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할 때쯤에 6.25 전쟁이 나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크게 어려워지자 형님 한 분이 "서울대 의대나 법대를 가면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사실 본인은 국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의예과도 문리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가족 몰래 국문과에 원서를 내고는 그냥 문리대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리고 정말로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집안 사람들은 전부 의예과에 간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잔치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상태였다. 나중에 사실대로 국문과라고 말하자 집안 어른들은 "아니 언문 배우러 대학 가는 놈도 다 있냐!"고 낙담하셨다고 한다.
2.2 데뷔와 논쟁
2.2.1 1956년, 우상의 파괴
1955년 서울대 재학 시절 자신이 학예부장으로 있던 문리대 학보에 「이상론」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이상은 작가라기보다는 그냥 미친 사람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의 그 난해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풀어가는 솜씨를 보자 새로운 관점을 지녔다고 판단한 문학계 쪽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느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기성 문단에 대한 의견을 밝힐 기회가 생겼었는데, 그 자리에서 아주 혹독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 일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이던 작가 한운사의 귀에 닿게 되었고, 한운사는 겨우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이어령에게 그 발언의 요지에 관한 글을 신문에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 이어령이 이를 받아들여 써낸 글이 「우상의 파괴」였다. 이 글이 이어령의 정식 데뷔작이 된 셈이다.
1950년대--또다시 아이코노클라스트(iconoclast)의 깃발은 빛나야 한다.무지몽매한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그렇듯 고가(高價)한 우리 세대의 정신을 제물로 바치던 우울한 시대는 지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금 가고 낡고 퇴색해 버린 우상과 그 권위의 암벽을 향하여 마지막 거룩한 항거의 일시(一矢)를 쏘아야 할 때다.
우리는 조소한다. 고루와 편협을 자랑하는 아나크로니스트들의 가소로운 독백과 관중의 덧없는 박수 속에 '자기(自己)'와 '트릭'마저 상실해 버린 마술사의 비극을 조소한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 공허한 우상의 자태--그것은 우리 사색(思索)의 선혈을 흠씬 빨아먹고 교만한 웃음을 웃는 기생충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경(究竟) 낡은 유물은 그 낡은 구세대의 시간과 더불어 소진(消盡)되게 마련이며 혹은 박물관의 진열장 속에 정좌한 골동품으로서의 운명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우상은 우리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는다. 표피(表皮)를 스치고 지나가는 일진의 광풍에 불과하다.
우리의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그 거추장스런 달팽이의 껍데기를 등에 지고 다닐 필요는 없다. 혈혈단신 물려받은 유산도 없이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작업을 개시해야 한다. 50유년의 신문학 시대 그것을 과도기나 초창기의 혼란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지루하고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이 문학 선사 시대의 암흑기를 또다시 계승할 아무런 책임도 의욕도 느끼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새로이 출발해야 될 전환기인 것이다. 우상을 파괴하라! 우리들은 슬픈 아이코노클라스트, 그리하여 아무래도 새로운 감격이, 비약이 있어야겠다.
-한국일보, 1956년 5월 6일
이어령은 이 글에서 당시 문단의 거두였던 소설가 김동리, 모더니즘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각각 '미몽(迷夢)의 우상', '사기사의 우상', '우매(愚昧)의 우상'이라고 비판했다.[1] 당시 이어령은 겨우 22세였기 때문에 '뭐 신인이고 하니까 조그맣게 나오겠지' 싶었는데 한국일보는 이 논설을 전면에 실어버린다. 4면 신문에서 한 면을 통째로 쓴 셈이다. 당시에는 작가들이 대중 사이에서 스타 역할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지금처럼 연예인이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시절이다. 1956년이면, 당장 한국에서 원로가수라고 하면 곧잘 떠올리는 이미자나 패티김이 데뷔하기 2,3년 전이다.) 이어령은 그야말로 화려하게 데뷔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황순원, 염상섭, 서정주 등을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한 비평을 가했다. 1959년에는 한 경향신문 지면을 통하여 김동리와 이른바 '비문 논쟁'을 벌였다.[2]
2.2.2 1967년, 분지 필화사건
1965년 3월, 작가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가 발표되었다.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이상으로 죽은 어머니의 영전에 대고 주인공인 홍만수가 하소연을 하는 형식으로 된 작품이다. 애당초 발표될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2개월 뒤 북한의 한 잡지에 이 소설이 실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남정현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이 소설은 북괴의 누군가가 써서 건네준 것일 터이니 그 접선 내용을 밝히라는 이유로 끌려간 뒤 고문을 당했고, 검찰에 송치되었다가 7월에야 풀려났다.
하지만 1년 뒤인 1966년 남정현은 다시 반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반미 사상을 부추겨 북괴의 대남적화 전략의 상투적 활동에 동조한 작품'을 썼다는 것이 검사 측의 기소 요지였다. 이어령은 법정에 피고인 측 증인으로 출두했다.
변호인: 이 소설이 반미적인가?이어령: 이 소설은 하나의 상징이므로 찬미도 반미도 아니다.
변호인: 저항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어령: 문학은 본질적으로 저항이다. 아무리 평화 시대라도 작가는 저항성을 지닌다.
변호인: 북괴에 동조했다는 데 대해서는?
이어령: 작자는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장미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지 사람에게 담배 파이프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남정현의 <분지>는 창작 과정의 꽃이다. 그가 만일 다른 의도로 썼다면 상징적, 우화적 수법이 아니라 준거가 확실한 리얼리즘 기법으로 썼을 것이다.
변호인: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놀랐다. 증인은 이 소설이 용공적이라 보지 않는가?
이어령: 나는 놀라지 않았다. 병풍 속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자는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자는 놀라지 않는다. <분지>는 소설이지 신문 기사가 아니다.
변호인: 증인은 반공 의식이 약한가?
이어령: 내 사상은 내가 써 온 글과 저작물들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훗날 남정현은 "당시엔 지금보다 더욱 반공이란 것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절대명제로 평가받던 때였다. '분지 사건'은 반미 문제가 주된 쟁점이 아니었던가. 그런즉 여야를 막론하고 '반미는 곧 용공이다'라는 등식이 별다른 거부감이 없이 통용되고 있으리만큼 철저하게 친미 일변도로만 경색되어 있던 당시의 제도권의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분지 사건의 증인으로 평론가 이어령이 법정에 출두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을 가지고도 사회의 일각에서는 일종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그리고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추세였다. 그리하여 당시 우리 변호인들이 이어령 증인에게 거는 기대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검찰은 남정현에게 최고형이었던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구형했으나 법정은 이를 팍 낮춰서 징역 6개월, 자격정지 6개월에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2.2.3 1968년, 불온 논쟁
1968년에는 김수영과 더불어 불온시 논쟁을 펼쳤다. 불온시 논쟁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벌어진 앙가주망 논쟁의 한국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학의 현실 참여를 두고 문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창작을 해야 하는가를 두고 조선일보나 사상계 등 주요 언론 지면을 통해 논전을 펼친 것이다.
이어령: '에비'란 말은 유아 언어에 속한다. 애들이 울 때 어른들은 '에비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는 어른도, 그 말을 듣고 울음을 멈추는 애들도 '에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67년도의 문화계를 한마디로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에비'다.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 자신들의 소심증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에비'를 멋대로 상상하고 스스로 창조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김수영: 우리나라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더 큰 원인은 정치권력의 탄압이다. 해방 직후와 4.19 이후를 회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서랍 속 불온한 작품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발표될 수 있는 사회가 현대 사회이며, 그런 영광된 사회가 머지않아 올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어령: 이승만 독재가 끝났을 때 참여 시인들의 저항은 시작되었다. 창조와 참여의 언어는 시체에 던지는 돌이 아니다. 문화를 정치 수단의 일부로 생각하는 오도된 사회참여론자들이 예술 본래의 창조적 생명에 조종을 울리고 있다.
불온한 작품이 서랍 속에 있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을 밖에 내놓을 때 비로소 그 문학은 참여하는 것이다. 봄이 오듯 영광된 사회는 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참여의 본질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자는 것이다.
김수영: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문화의 본질은 꿈을 추구하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령이 말하는 오도된 참여론자들은 교정될 수 있는 일시적 현상이지만, 한번 상실한 정치적 자유는 쉽게 회복될 수 없다. 우리의 질서는 조종을 울리기 전에 벌써 죽어 있다.
이어령: 김수영의 추종자이기도 한 60년대의 젊은 비평가들은 "문학은 진보 편에 서야 한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을 모든 문학 작품에 강요하고 있다. 자기 이데올로기에 맞으면 삐라 같은 글도 명작이라 치켜세우고,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어떤 작품이라도 반동의 낙인을 찍고 있다.
김수영: 나는 문화의 본질로서의 불온성을 말했다. 정치적 불온성으로 좁혀 구분하지 말라. 불온성은 예술과 문화의 원동력이며, 인류의 문화사와 예술사는 불온의 수난을 담은 역사이다.
이어령: 김수영의 불온성이 좁은 의미로 해석되는 까닭은 "서랍 속 불온은 작품"이라 했기 때문이다. 문학적 불온이라면 무엇 때문에 서랍 속에 있겠는가. 문학의 가치는 동시적 불온성의 유무로 제한될 수 없다.
이 편집은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이어령 편'에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각 문단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 조선일보, 1967.12.28.
「지식인의 사회참여」, 사상계, 1968년 1월호
「누가 그 조종을 울리는가?」, 조선일보, 1968.2.20.
「서랍 속에 든 '불온시'를 분석한다」, 사상계, 1968년 3월호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조선일보, 1968.2.27.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 조선일보, 1968.3.10.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조선일보, 1968.3.
「논리의 이론검증을 똑똑히 하자」, 조선일보, 1968.3.26.
사실 이 불온시 논쟁은 곧 순수/참여 논쟁이 다시 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논쟁의 흐름은 20~30년대 카프를 둘러싼 논쟁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직접적으로는 이어령 자신이 1950년대 말기부터 이미 순수 문학을 공격하며 '저항의 문학'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운 이래 논전이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것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김수영이 '(내용상으로든 표현상으로든) 불온한 시라고 할지라도[3] 마음대로 발표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좀 더 급진적인 형태의 참여 문학을 주장한 반면, 이어령은 여전히 참여 문학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그런 작품이 발표될 수 있도록 창작하는 문인의 철저성을 주장했다는 점.
이어령은 이렇게 1950년대 평단의 젊은 기수로 등장해 주목을 받게 되면서 1960년에는 만 26세의 나이로 서울신문 논설위원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조선일보를 거쳤다. 1973년에는 잡지 '문학사상'과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한다.
2.3 창조의 달인
2.3.1 1963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지프차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경적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는 했지만 너무나도 놀라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집으려고 뒷걸음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칠 뻔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사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스런 표정, 마치 가축처럼 둔한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갔던 그 뒷모습, 그리고.. 그리고 그 위급한 경황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앙상한 두 손.. 북어 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 잡은 또 하나의 손..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 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그렇다. 그들은 분명 여유 있게 차를 비키는 아스팔트 위의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운전사가 어이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떼들이 차가 달려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 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도 같은 몸짓으로 쫓겨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우리의 피부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경향신문, 1963년 8월 12일
1963년 이어령은 한국의 풍토에 대한 에세이를 연재할 것을 제의받는데, 이를 받아들여 경향신문에 연재한 것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였다. 연재 당시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해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1년 동안 국내에서만 10만 부가 나가고 해외에서도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진기록을 세웠다. 발표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도 한국인의 특성을 독창적인 관점으로 집어낸 명저로 꼽힌다. [4]
이 에세이는 지금까지도 이어령의 놀라운 관찰력이 가장 돋보이는 글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언어적 특성을 이용한 분석, 통념적인 행위에서 새로운 의미 찾기를 통한 특유의 설명 방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제목 역시 무슨 론, 무슨 고 하고 제목을 달던 시절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고 붙여서 새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단순히 '풍토'의 순서를 바꾸고 한글로 바꿔서 지시사 '저'만 덧붙인 것일 뿐인데, 그리 대단한 창조가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이 안 하던 것이었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새롭게 여겨진 것이었다고 이어령은 회고했다.
2.3.2 1982년, 축소지향의 일본인
나는 지금 희끗희끗한 새치가 돋기 시작한 대학 교수로서 혹은 시력 0.2의 근시 안경을 낀 문예 평론가로서 일본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선 국민학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일본의 모습을 보고 생각하려고 한다. 서가에 꽂힌 책들, 그 중에서도 일본에 관한 그 많은 책들은 잠시 덮어 두기로 하자. 그 대신 작은 어깨에 멘 란도셀 속의 흰 공책과 몽당연필 한 토막을 준비해 두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말랑말랑하고 잘 지워지는 지우개일는지도 모른다.단순한 알레고리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나의 일본어와 그 지식의 대부분은 식민지 통치를 받던 국민학교 교실에서 배운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내가 굳이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일본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데 있다.
이 당돌하고도 무모한 모험을 하게 된 이유는 그 유명한 안데르센의 동화 「발가벗은 임금님」이 그런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군중이 만들어 낸 환상의 옷을 통해서만 임금님을 바라본다. 남들이 모두 떠들어 대니까 임금님이 발가벗은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못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잠자코 있다. 그러므로 임금님의 알몸을 발견한 것은 아이들의 눈이었고, 동시에 큰 소리로 그것을 말한 것도 아이들의 입이었다.
지금까지 일본에 대해 씌어진 글들은 프랑스의 패션 북처럼 수많은 유행을 낳기도 했다. 그 중에는 일본인, 외국인 할것없이 저명한 학자, 예술가, 평론가를 비롯하여 관광 여비에 보태 쓰기 위해 씌어진 것 같은 여행자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필진만 해도 천차만별이다. 일본에 하루쯤 있는 외국인은 아키하바라에 가서 전자제품을 사고, 일주일쯤이면 후지산을 보러 가고, 한 달 넘어 머무르면 일본론을 쓴다고 할 정도니까 전쟁 전에는 그만두더라도 전후 일본에서 나온 일본론 저작이 천 권 이상이 넘는대도 이상할 게 없다.
'국화와 칼', '아마에의 구조', '종적인 사회' 등 그 책제목에서 유행어가 된 것도 있고, 거꾸로 '일본주식회사', '이코노믹 애니멀' 등 떠돌아다니던 유행어가 책의 주제로 둔갑하는 일도 적지 않다.
일본에서 일본론이 베스트 셀러가 된다는 것은 오미코시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것을 둘러메고 '마쓰리'를 벌이기 때문이다. 그 유행어들은 신문의 표제로 쓰이기도 하고 잡지 권두 좌담회의 제목이 되기도 한다. 방송에서는 독창성이 빈약한 시사 해설자에 의해 감초처럼 쓰이는 말이 되고, 이따금 술자리에서는 안주 대신 오르기도 한다. 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제법 엄숙한 강단 용어가 어느 틈에 대중가요의 한 구절처럼 거리의 골목길을 왕래한다. 그러므로 이런 형편에서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일본 문화의 알몸을 보고 만져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군중과 유행이 만들어 낸 환상의 옷'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묻지 않은 눈으로 나는 차라리 국민학교 어린이가 되어, 일본 문화의 맨살을 보고 이야기해 보자는 작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1973년, 프랑스에 머물면서 롤랑 바르트의 「일본론」과 조르주 플레의 「플로베르론」 등의 책을 읽다가 이어령은 우연히 축소지향의 개념을 떠올리고, 이것이 일본론을 풀어나갈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문학사상'의 잡지 관계로 자주 만나던 삼성출판사의 김봉규 사장이 그 말을 듣고 그 책을 일본에서 한번 출간해 보자고 제의했고, 이어령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당시의 분주한 사정으로 이 기획은 점차 잊혀져 갔다.
이후 김 사장의 주선으로 일본의 출판사인 학생사에서 책을 내자는 권고가 들어왔다. 계약을 맺고 난 뒤 약 8년간 틈만 나면 일본 관련 책들을 읽고 자료를 수집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준비한 자료의 일부를 일본의 잡지 아세아공론에 발표한 것을 계기로 일본 국제문화교류기금의 초청을 받아 1년간 동경대에서 연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책의 전체 분량으로 1천 매가 넘는 원고를 반 년만에 써냈다. 그것도 일본어로. 그야말로 두문불출하며 집필한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각종 언론과 강연의 초청을 받게 된다. 한국인이 쓴 책으로는 일본에서 최초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다.
이 책에서 이어령은 그동안의 일본론이 서양인과 비교한 일본인의 특징을 이야기한 것뿐이지 사실 그 중 대부분은 바로 이웃나라인 한국에도 존재한다고 지적하면서, 일본 문화가 가진 독창적인 특징이 바로 축소지향이라고 주장한다.하이쿠, 분재, 트랜지스터, 쥘부채 등 일본인이 가진 축소지향적 요소가 일본을 공업사회의 거인으로 끌어올렸으며, 반대로 침략의 야욕을 벌이는 등 확대지향을 하려는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이 났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도깨비가 되지 말고 난쟁이가 되라'고 역설한다.
2.3.3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
이어령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을 총괄 기획했다. 종전에 있었던 모스크바 올림픽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냉전의 여파로 한쪽 진영이 불참하는 불상사를 초래한 데 반해 서울 올림픽은 모든 진영이 참가하면서 화해의 장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어령은 당시 '화합과 전진'이라는 다소 딱딱한 느낌의 문장을 바꿔 '벽을 넘어서'라는 구호를 만들어내어 주제의식과 역동성을 모두 표현해낸 명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개막식에서 등장한 굴렁쇠 소년 역시 이어령의 기획이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우던 단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아주 평화로운 정적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그것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의 개최지 선정을 선언한 바로 그날 태어난 아이였다)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 중앙을 사선으로 지나가는 모습은 전쟁고아의 이미지에 불과했던 한국의 인상을 새롭게 바꾸어놓겠다는 계획의 소산이었다. 거기다가 여백의 미를 살린 전통적인 문법도 있는 것이었다.[5] 이어령은 이후 인터뷰에서 "왜 문학 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느냐고 하기도 하는데, 원고지에 쓰던 것을 잠실 주경기장으로 옮긴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이것을 시로 쓰면 1행시가 될 것이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2.3.4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1980년대에 이어령은 두 번의 장관 제의를 받았다. 첫 번째 제의는 문화공보부 장관 자리였는데, 문화라면 몰라도 공보행정에 관해선 아는 게 없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문화부와 공보부가 분리되면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 자리를 다시 제의받아 이를 수락했다. 이어령은 1990년 1월 3일부터 1991년 12월 19일까지 장관 직에 있었다.
두 번째 제의가 들어왔을 때 나는 일본에 있었죠. 그 당시 생각에 우리가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 일본과 경쟁하는 건 힘들겠지만 문화적으로 경쟁하는 건 승부를 걸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죠.그 무렵에 아들 결혼식 때문에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또 제의가 온 거예요. 문화부가 처음 시작될 때라,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있었죠.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연구할 것도 있고, 관직이나 정치는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끝내 고사했어요.
그래서 장관 발표가 날 때에도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KBS에서 강연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연락을 받고 집에 돌아와 보니 카메라맨과 기자들이 인터뷰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찔한 순간이었지요. 수십 년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때에도 학과장도 마다한 사람이 중앙정부의 신설 문화부의 수장을 맡게 되다니 앞이 보이지 않았지요.
(Q. 당시 인터뷰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 벌판에 집을 세우러 가는 목수이다. 목수가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문화부의 네 기둥을 다 세워놓고 나는 떠난다. 그때 정말 이 집 주인이 올 것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본심이었지요. 장관이 아니라 목수라고 불러다오. 목수는 집을 짓는 사람이지, 새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아니다. 장관 취임사가 곧 이임사였던 것입니다. 약속대로 네 기둥 다 세우고 자진해서 장관직을 떠났지요. 예술종합학교의 법안을 국무회의에 통과시킨 바로 그날이 문화부를 떠나는 날이었지요.
이어령이 장관 재임 때 한 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외국어인 '로드 숄더'를 '갓길'로 바꾼 일이다. 애초에 '갓길'이라는 말이 이어령이 창시한 단어다. 원래는 노견(路肩, 직역하면 길어깨)이라는 심히 어려운 한자어를 고친 것이다. 이 외에도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 발족,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 계획 수립 등이 그의 재임 중에 실시되었다.
2.4 2000년대 이후의 행보
2.4.1 2006년, 디지로그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같은 동양 문화권인데도 중국 사람들은 나이를 첨(添)한다고 하고 일본 사람들은 도루(取)한다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이 먹는다고 한다. 이 지구상에는 3000종 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하지만 나이를 밥처럼 먹는다고 하는 민족은 아마 우리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를 묻는 환자에게 "나이만 먹지 말고 다 먹어라"고 했다는 어느 의사의 이야기는 한국인만이 웃을 수 있는 우스갯소리다.시간을 상징하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버린다. 하지만 한국인은 매년 설이 되면 자식까지 삼켜버린다는 그 무시무시한 크로노스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음식이나 시간만이 아니다. 마음도 먹는다고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한국인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돈도 떼어먹고 욕도 얻어먹고 때로는 챔피언도 먹는다. 전 세계가 한 점 잃었다(lost)고 하는 축구경기에서도 우리 붉은 악마는 한 골 먹었다고 한다. 모든 층위에서 먹는다는 말은 유효하다. 심리적으로는 겁을 먹고 애를 먹는다. 소통 행위에서는 "말이 먹힌다" "안 먹힌다"고 하고 경제 면에서는 경비를 먹거나 먹혔다고 한다. 심지어 성애의 차원에서는 따먹었다는 말까지 등장한다. (중략)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가상현실(VR)의 삼차원 공간에서는 센서 글러브를 끼고 보조장치만 갖추면 실제 현실 그대로 보고 듣고 만지기도 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냄새까지 맡는 향기통신의 웹 사이트도 생겼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로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설날의 떡국 맛이다. 모든 감각을 모두 디지털화해 보낼 수 있지만 컴퓨터가 천 번 만 번 까무러쳐도 안 되는 것이 미각의 씹는 맛이다.
그러기에 애플 컴퓨터의 로고는 입으로 반쯤 저며 먹은 모양을 하고 있고 실리콘 밸리의 마돈나 킴 폴리제는 인터넷 쌍방향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그 이름을 커피 브랜드인 '자바'에서 따다 붙였다. PC방을 인터넷 카페라고 부르는 것처럼 모두가 먹을 수 없는 디지털 미디어에 미각 이미지를 보완하려는 고육지책의 산물이다. (중략)
디지털 혁명의 장밋빛이 조금씩 먹구름과 거품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양극화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틈새에 다리를 놓아주는 누군가의 힘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새해가 되면 떡국과 함께 나이(시간)도 마음도 새로 먹는다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디지털의 공허한 가상현실을 갈비처럼 뜯어먹을 수 있는 어금니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이버의 디지털 공동체와 식문화의 아날로그 공동체를 이어주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파워가 2006년 희망의 키워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디지로그의 뉴 파워가 무엇인지 성급하게 묻지 말고 이번만은 차분히 함께 검증해 보지 않겠는가. 줄기세포처럼 정말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그런 원천기술을 보유하고나 있는 것인지 더 이상 기대가 실망이 되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일이 없도록 그야말로 큰 마음 먹고 시작해야 한다.[6]
-중앙일보, 2005년 12월 31일
2006년 1월,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친 말인 '디지로그'를 전면에 내세운 신문 칼럼을 연재했다. 사실 이전에도 '디지아나'라던가 '디지로그' 같은 말이 간간히 쓰이기는 했으나 이를 사회적 용어로 사용한 사람은 이어령이 최초였다. 이 글에서 이어령은 디지털만을 앞세운 당시의 정보화 사회의 측면을 지적하면서 후기 정보화 사회를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 상생하는 디지로그 사회로 정의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금니로 씹는 디지털'인 것이다. 이 주장은 이후 본격 출시된 닌텐도 wii와 아이폰의 대성공으로 여실히 증명된다.
2.4.2 2007년, 지성에서 영성으로
요즈음 나는 70평생 동안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삽니다. 세례를 받은 것과 시집을 낸 것이 그렇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면 망령이 났다고들 합니다. 요즘엔 그것을 점잖게 알츠하이머라고 부르기도 하지요.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꼭 그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어쩌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질문은 한 가지이지만 묻는 사람들의 말투는 제각각 다릅니다.
예수님을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이 하는 안티 크리스천들은 경멸조로 묻고, 카뮈의 경우처럼 신 없는 순교자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배신자를 대하듯 질책하는 투로 말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금시 혀라도 찰 듯이 혹은 한숨을 쉴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라고 내뱉듯이 비웃습니다. 오랜 세월 글을 써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어느새 나를 '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욕쟁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요. 화내지도 않습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갑자기 성인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과 거동에서 나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외롭고 황량한 벌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찌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 말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에 이미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이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도 거북한 무엇이 암종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가 봅니다. 겉으로는 강한 싸움꾼인 척하지만, 옆에서 누군가 한 마디 훈수를 하고 조금만 역성을 들어주면 금시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약한 무신론자들인 겁니다.
2007년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서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김승옥과 함께 기독교로 전환한 대표적인 한국의 무신론자 지식인이다 이어령은 원래 무신론자였는데다가 1970년대에는 기독교계 쪽 사람들과 논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때 그는 이성의 편에 섰었다. 그런데 노선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이어령이 이렇게 기독교인으로의 변신을 결심한 가장 큰 계기는 딸인 이민아 목사와 관련된 사건에서 비롯되지만, 2010년 출간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는 그 과정이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교토에서 생활하는 동안 느꼈던 고독이 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하와이에서 살던 이민아 목사의 실명 위기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을 굳히게 된다. 현재는 종교를 주제로 한 강연이나 인터뷰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실명 위기 사건을 대강 말하자면 이렇다. 당시 갑상선암이 재발해 있던 딸이 설상가상으로 실명하게 되자 이어령은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내 남은 생은 당신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는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그 뒤 놀랍게도 7개월 만에 딸의 망막박리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간증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사건에 관해 이민아 목사는 "아버지가 나더러 간곡히 부탁하셨다. 절대로 밖에 나가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모든 사람이 널 비웃고 우리를 박해할 거라고. 기적은 구제의 사인이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지 않으냐고 하셨다."고 증언한다.
이후 당연한 일이겠지만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강신주의 경우 "이어령의 보수성은 기독교로 넘어간 데서도 알 수 있어요. 인문학자가 어떻게 종교를 가져요? 인문학자는 고통의 폭이 더 넓어야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데, 그만큼 고통스럽기 전에 교회에 가는 거예요. 그럼 안 돼요. 인문학자는 신을 믿는 순간 글을 쓰면 안 돼요. 왜냐하면 신에게 구원받고 위로받기 이전에 겪어야 될 고통들이 있거든요."[7]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빙성이 약하긴 하지만, 오랜 기간 워커홀릭으로 살아온 이어령이 아버지의 애정을 적게 받고 자란 딸을 위한 (그것도 암 투병 중이므로, 어쩌면 딸이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는) 선택으로 볼 여지도 있을 수 있겠다. 김정운은 그의 책 「남자의 물건」에서 "그의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제대로 이야기 한번 해본 적이 없다. 이어령은 더 늦기 전에 '지상의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자신의 딸이 믿는 '하늘의 아버지'를 함께 믿는다고 했다."고 쓰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민아 목사는 2012년 사망했지만 아버지가 기독교로 전환한 뒤부터의 마지막 5년간의 부녀관계는 더없이 좋았다고 한다.
2.4.3 2010년, 생명자본주의
아무래도 50여 년 전 그 겨울밤의 기억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될 것 같다. 전쟁과 피난살이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무렵, 나는 단칸 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이따금 아궁이의 연탄불이 꺼져 잉크병이 어는 일도 있었다.그날은 더욱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방안은 얼음장이었고 어항까지 얼어있었다. 어제만 해도 곧잘 헤엄치던 금붕어들이 살얼음 속에 화석처럼 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중략)
얼음의 돋보기 효과 때문이었는가. 유난히도 큰 금붕어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주전자에 물을 끓여왔고 나는 급히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어항 속에 물을 쏟았다.
입김 같은 수증기가 올라오면서 어항이 숨 쉬는 소리를 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살얼음 사이에서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헛본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했던 것인데 정말 금붕어들은 꿈틀거리더니 헤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우리가 잠든 사이 매서운 추위는 문고리도 흔들지 않고 내 신부의 방과 너희들의 어항을 침범했다. 얼어붙은 너희들을 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우리가 한방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나의 추위가 바로 너희들의 추위였다는 것. 나에겐 지느러미도 아가미도 없지만 어항 속 겨울을 함께 숨 쉬고 있었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모르고 지내온 거다.
너희들 이름처럼 빛과 환희, 꽃피는 축제의 생명을 위해 오늘 아침 우리는 함께 겨울과 싸웠다.[8] 그리고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났다. 한 주전자의 끓는 물이 온 방안의 냉기를 생기로 바꿨다. 미안하다. 절대로 다시는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겠다. 맹세하마. 그리고 아내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건 내 아내와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을 두고 하는 맹세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온 세상이 금붕어의 지느러미처럼 반짝이며 헤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언 잉크병이, 아내의 화장대와 방바닥에 벗어놓은 때묻은 양말, 일상의 얼룩과 먼지들까지도 일제히 수면으로 떠올라 금붕어처럼 숨을 쉰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음과 생이 이마받이를 하는 전율의 순간, 추위를 밀어내면서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나는 어항인지 모태인지 모를 따뜻하고 조용한 공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슬프기까지 한 그 곳은 이미 10제곱미터의 단칸 셋방이 아니었다.
금붕어의 어항이 그것들이 태어난 강물과 바다로 이어지면서 지구 크기의 생명권으로 번져나간다.
2013년 출간된 책 「생명이 자본이다」에서 이어령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다음 키워드로 생명을 제시한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경제 패러다임 중에서, 산업자본주의가 가진 병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드러나고 있었고 미국을 필두로 하는 금융자본주의 역시 2000년대 후반을 강타한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그 그늘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의 경제 이념은 돈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상생을 위한 생명의 자본주의로 거듭나야 한다고 이어령은 주장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이어령은 「젊음의 탄생」, 「유쾌한 창조」, 「우물을 파는 사람」, 「가위바위보 문명론」, 「보자기 인문학」 등을 지속적으로 내놓았다. 비록 여러 논란에 휩싸이고 있기도 하지만, 이처럼 이미 팔십객에 접어드는 지식인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글을 쓰겠다는 열정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듯하다.
3 비판
3.1 이어령의 평론이 지니고 있는 한계
문학평론가 강경화에 따르면 이어령의 문학평론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로는 그의 비평이 '창조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독자들을 현혹하는 사기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가령 평론가 홍정선의 경우 이어령이 "논리성을 결한 수사적 문체의 부당함과 자의성, 언어의 곡예에 가까운 말재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말했으며, 평론가 최동호의 경우는 "항거해야 할 정신과 창조의 혼 그리고 힘과 땀의 노동을 강조하고 있지만, 항거해야 할 정신의 토대가 미약한 현실 인식을 화려한 수사로 분장시키는 일회적 마술의 경작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둘째로는 60년대 중반 이후 뚜렷해진 참여에서 순수로의 방향 전환의 불순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들 수가 있다. 평론가 염무웅의 경우 "그들 자신의 진정한 감수성이나 절실한 이념에서 불가피하게 유도된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이름만 빌려온 것이 많았고, (중략) 현대 작가의 책임과 저항의 문학을 화려하게 외쳤고 거기에 간단히 동조했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상을 겉으로나마 보지 않게 되고 직장을 구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됨과 때를 같이하여, '역시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라는 다른 하나의 구호를 마련하고, 옛 문학 노트와 일역판에서 보았던 '메타포'니 '분석 방법'이니 하고 유창하게 지껄이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후에 줄기차게 외쳤던 증언이니 행동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는 말들이 겉으로만 그럴듯했지 사실은 구호에만 그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노선 전환이 이루어진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다만 평론가 유종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어령의 비평은 참여와 순수의 두 가지 시각이 함께 들어오면서 생겨나는 "절충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했고 김현의 경우는 오히려 "50년대 문학인들의 방향 전환을 통해 한국 문학 이론의 급격한 발전이 뒤따랐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이어령은 1970년대 이후로는 문학평론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고 사실상 에세이나 사회활동에 주력해왔는데, 그렇다고 문학 연구를 게을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시기에 이어령이 저술한 삼국유사나 하이쿠에 관한 연구는 그 성과에 비해 저평가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드물게 현대문학을 다룬 평론인 '다시 읽는 한국시'는 2015년 「언어로 세운 집」이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3.2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사건 방조 논란
1991년 일어난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계기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실시한 '움직이는 미술관'에서 이 미인도라는 그림의 복사본을 장당 5만 원에 총 900장을 팔아넘기는 데에서 출발한다. 애초에 작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었기에 이 점만 해도 문제가 크다. 그런데 문화부에서는 또 큰 문제를 일으켰다.
'고바우 영감'의 작가인 김성환 화백을 비롯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화랑협회에서 처음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판정하고 나서 논란이 거세지자 문화부 측에서 진품인 근거를 찾지 못하면 심사위원 7명의 목을 치겠다고 압박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밝혀내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진짜인 것으로 만들라는 소리가 된다. 당시 '움직이는 미술관' 프로젝트의 기획자가 이어령 당시 장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보여줬던 잘못된 대처, 그리고 그로 인한 천경자 화백의 심적 고통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 사건에 대한 배후 책임자로 이어령을 지목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며 또 이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지 않는 것 역시 분명히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문화권력인 셈.
자세한 사항은 SBS 스페셜 '천경자 미인도 스캔들' 편 참조.
3.3 문화권력 논란
위의 사건의 경우는 문화권력이 분명하지만, 이어령이 오랜 기간 동안 문단에서 활동해 왔다는 사실 때문에 문단 내에서의 소위 '문화권력'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우선 이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측의 의견은 이러하다. 이어령이 20대 때부터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성 문단 전체를 비판하는 데에 나섰기 때문이다. 비판의 대상 역시 진보진영의 김수영에서부터 극우보수진영의 서정주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문단에 데뷔한 직후의 이어령은 기성 문단을 장악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대 문단 내의 파벌들로부터 위협을 당했다. 잡지 문학사상을 창간한 것 역시 순수문학 계열의 문학과지성과 참여문학 계열의 창작과비평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 위한 시도였고, 문학사상에서 주관했던 이상문학상 역시 '서울의 달빛 0장', '저녁의 게임', '엄마의 말뚝', '흐르는 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당시 거대한 회사였던 '현대문학사'나 '사상계', '조선일보'에서 주관한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과는 다르게 말하자면 소형 기획사에서 만든 문학상치고는 빠른 속도로 공신력을 인정받았다. (심사위원이 당시 문단의 원로들이었다는 점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위의 작품들은 요즘도 간혹 교과서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지금은 이어령이 문학사상사를 떠난 상태이다)
이어령은 1950~1960년대에 문단 내에서 보수주의가 만연할 때에는 '저항의 문학'을 제창했고, 1970~1980년대에 문단 내에서 참여문학이 활발하게 일어났을 때에는 오히려 진보진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스탠스를 취했다. 그의 활동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어령은 문단 내에서 비주류로서 활동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인물이 현재의 문단 권력을 조직해 나갔다고 보는 것은 당시의 한국 문단 구조를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반박하는 이들의 의견은 이러하다. 기존 권력의 해체와, 그 공백의 선점은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차기권력집단 형성의 과정이다. 없던 권력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거나 불가능하다. 대부분이 기존의 권력에 저항하는 스탠스를 취하면서, 기성권력의 해체와 동시에 그 자리를 차지하는 형태로 폐쇄적 권력집단을 형성한다.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흔히 목격된 현상이며,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도 짧은 시간 내에 수차례 목격된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어령이 한때 기성주의를 반대하는 스탠스를 취했다는 것이 지금의 이어령을 평가하는 절대척도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존 기성권력의 해체에 앞장선 사람일수록 그가 다음시대 기성권력의 대표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역사적 추론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문피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이어령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차기 문학세력에 대해 강한 저항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기성의 장벽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점 역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반드시 옳다고는 볼 수가 없다. 이어령이 차기권력의 주축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어령이 1970년대~1980년대에 크게 대두되었던 이른바 민중문학론이나 민족문학론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보수적 문학평론 진영으로의 이동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 역시 잘못된 사실이다. 이어령은 자신이 저항했던 기성권력이 힘을 잃은 직후 등장한 새로운 차기권력의 어느 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어령이 문화권력이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이들의 말대로 기성권력이 가라앉은 뒤 차기권력이 등장했고 그 공백을 메워 나갔지만, 정작 이 차기권력과 이어령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동하는 이 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에 인용된 (이동하는 불온 논쟁에서의 이어령의 글들을 인용했다.) 이어령의 발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왜 그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문학평론계의 한 고독한 아웃사이더로 머무르게 되었는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주는 단서가 그 속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그 첫째는, 그의 이러한 발언이 그 당시나 그 이후의 많은 우리나라 문학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중략) 그 둘째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그의 이러한 발언이 나온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3선개헌과 유신을 거치면서 정치권력의 억압적 성격이 날로 더 강해지기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다는 점이다. 그러한 역사의 전개 과정은 당연히 "문화인 자신에게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이냐"라고 대드는 김수영 식의 태도에 더욱 큰 무게를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중략) 이어령이 위의 발언에서 김수영을 비판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피력한 주장의 내용으로 보건대, 1970년대 한국 문학평론계의 가장 큰 세력으로 떠오른 이른바 민중문학론 혹은 민족문학론에 대하여 그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것인가는 불문가지의 일이다.지금까지 내가 해온 이야기는 그러나 위에서 이미 전제했던 바와 같이 문학평론가로서의 이어령이 1970년대 이래로 짙은 고독의 그늘을 거느려야 했던 이유의 단지 한 부분밖에 설명해 줄 수 없다. "1970년대 이래의 우리 문학평론계에서 민중문학론 혹은 민족문학론 계열의 세력이 가장 큰 흐름을 형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평론계를 독점하지는 못했으며 그것에 대하여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를 발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았는데, 그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어령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형식주의, 바슐라르의 이론, 구조주의, 기호학, 원형이론 등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며 그런 것들을 자기들의 중요한 무기로 삼는 태도를 보였는데, 왜 이어령은 그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고독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까지가 제시되어야만 비로소 우리의 해답은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방금 제기된 새로운 물음에 대해서는 실제로 어떤 답변이 가능할까. 나는 크게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 민중문학론 혹은 민족문학론 계열의 세력에 대하여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를 발하며 러시아 형식주의 기타 등등의 이론을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문학을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일이라는 원칙 자체에 대해서는 이의를 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어령은 그러한 원칙 자체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태도를 취했다.
2. 민중문학론 혹은 민족문학론 계열의 세력에 대하여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를 발하며 러시아 형식주의 기타 등등의 이론을 열심히 연구한 사람들 중에서도 남달리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사람들은 배타적인 집단을 결성하여 평론계 내부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나서는 데 대단한 재능과 집념을 과시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배타적인 집단을 결성하기 위해 동지를 모으는 마당에서 주로 의지했던 기준은 '세대' 개념(대체로 보아 4.19 당시 대학 재학생-그 중에서도 특히 1학년생이면 더욱 좋다-정도에 해당하는 연령층일 것!)과 '전공분야' 개념(주로 외국문학 전공자일 것!)이었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해서 동지를 모으고 배타적인 집단을 결성한 문학평론가들은 1970~1980년대 내내 민중문학론 혹은 민족문학론 진영의 문학평론가들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쳤으며 자기들의 제2세대에 해당하는 집단까지 다시금 조직적으로 키워내는 놀라운 정치적 지혜를 과시한 바 있다(제2세대에 이르러서는 국문과 출신까지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변화를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이어령은, 세대의 개념으로 보나 전공 분야의 개념으로 보나, 누구보다 먼저 배척되어야 할 존재였다. 한편 이어령 자신은 이런 점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나? 그는 배타적인 집단이건 배타적이지 않은 집단이건 도대체 집단을 만들어 움직인다는 것을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문학사상'이라는 잡지를 간행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집단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이어령은 문화권력이다'라고 보는 이들 중 일부는 이어령이 2번에서 볼 수 있는 축의 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이어령은 신인 시절인 1960년대가 지나가고 문단의 중진급이 된 후에도 문단에서의 세력을 구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설가 김채원의 회고에서 동료 작가인 송영이 "이어령의 크게 좋은 점은 어떤 파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만한 사람이면 능히 문단에 어떤 파를 형성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은 그만큼 무엇을 바로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증언은 결정적이다.
하지만 지금의 문학계가 점차 권력적으로 변화하고, 침체되는 것을 (반세기 이상 문단에 몸담아 왔음에도) 결국 막지는 못한 점, 그리고 그로 인해 탄생하게 된 현재의 한국문학의 권력구조가 비주류 문학도들의 문학계 진입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 역시 당연히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3.4 기타
본래는 무신론자로 기독교계와 '이성과 영성 논쟁'을 열렬하게 펼쳤으나, 상기한 딸 이민아 목사의 암 투병을 계기로 개신교를 믿게 되었다. 다만 종교적으로 너무 믿어서인지 스콧 버거슨은 이어령을 비난한 바 있는데 일본은 개신교인 수가 없으니 영적으로 몰락했다. 한국은 이와 다르다는 이어령의 말을 이야기하며 이처럼 종교적으로 미치는 헛소리는 유럽에서 지겨운 종교전쟁 빌미가 되었다고 깠다.
문화부장관 시절, 일본 만화 일어판 반입을 금지하였던 바 있다. 공항 및 세관에 협조공문으로 일본 만화 및 그 어떤 것도 들여와선 안된다고 1994년 게임챔프 지에서 비난한바 있다.
4 기타
'마호가니의 계절', '장군의 수염', '의상과 나신' 등의 소설을 집필하였다. 또한 '흙속에 저 바람속에', '디지로그 선언편' 등의 수필도 집필하였다.
1990년 1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였다[9]. 현재는 중앙일보 고문,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이다.
팔순이 넘은 고령이지만, 서재에 일곱 대의 컴퓨터를 두고 활용하고 있으며, 태블릿 컴퓨터 등의 모바일 기기 활용도 능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뷰에서 헬조선 관련 발언을 했다[10]
참고로 2015년 경향신문 인터뷰 '[경향사람들 (1) 28세 때 논설위원 입사 이어령]'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1973년 2월 현장 기자 경력이 전무한 첫 해외 특파원이 됐다. 숨이 탁탁 조여오는 한국땅을 벗어나려면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 국문과 교수 당시에 박사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박사를 안 딴 이유는 비범하게도 감히 누가 이 이어령이의 논문을 심사하겠는가였다.[11]
여담으로, 본관이 을사오적과 같은 우봉 이씨.- ↑ 훗날 이어령은 이것이 단순히 문단 권력을 갖고 있던 문인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이승만 체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 ↑ 이어령이 오상원의 작품을 비평하면서 '한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작품을 두고 김동리가 지성적인 문장 운운했다'라고 한 것을 들어 김동리가 '그런 잣대면 이어령 너도 마찬가지'라고 응수하며 벌어진 논쟁이다. 말이 논쟁이지 요즘으로 치면 그냥 키보드 배틀이고 봐도 될 정도로 제법 험한 글싸움. 하지만 이어령은 비평이 그냥 물에 물 탄 것처럼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 김수영이 적시하진 않았으나, 유작인 '김일성 만세' 같은 시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이 논쟁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수영은 사망한다.
- ↑ 2007년 우리시대의 명저 50에 선정되었다
- ↑ 원래 이 아이는 무심하게 굴렁쇠만 굴리도록 지시받았는데 실제 개막식에서는 중간에 멈춰서서 사람들한테 손을 흔들었다. 오히려 이것을 본 사람들이 크게 호응하기도 했다.
- ↑ 여담이지만,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어령은 사회에 관한 글을 쓰면서, 어떻게 보면 노골적으로, 한국인의 역할을 자주 강조해왔다. 지나친 민족주의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유 있는 접근인 것은 사실이다.
- ↑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단단한 인문학」
- ↑ 이어령은 자신이 사온 금붕어 세 마리에게 삼미신의 이름을 따서 아길라, 에우프, 탈라라고 지었다.
- ↑ 문화부 장관 시절 대표적 사업 중 하나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행사이다. 이후 '움직이는 미술관' 행사는 100여 차례 이상 전국적으로 확대 진행될 정도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통적인 행사의 하나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통해 미술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의 제1회 '움직이는 미술관' 때 그 유명한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아직도 진품 여부가 100%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행사가 이어령 (전)문화부장관의 기획에서 출발했던 만큼, 만약 해당 그림이 위작이 사실이라면 (정황상) 이어령 (전)문화부장관도 그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 ↑ 기성세대로서 부끄럽다. 낯이 뜨겁다. 그런데 되묻고 싶은 게 있다. 지옥 같은 조선을 떠나 이민 가고 싶은 나라가 있으면 한번 적어보라. 그리고 그곳이 천국인지 공부해봐라. 스위스에는 민병대가 있고, 하와이에선 집밖에 내놓는 꽃까지 간섭을 한다. 취업난·양극화 등 눈앞의 고통은 정보기술의 발전에 따른 ‘트레이드 오프(trade off·상충)’의 결과다. 전 세계적 현상이다. 이걸 떨치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숱한 고비를 넘겨왔다. 지옥을 천국으로 만드는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남만 탓하면 영원히 지옥이다. 젊은이에게는 희망과 용기가 있다.
- ↑ 확인되지 않는 얘기지만 어느 정도 이어령의 문단 권력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이어령이 교수로 임용되던 시절에 있다. 석사 학위만으로도 교수에 임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그러다가 나이 지긋이 든 상태에서 뒤늦게 박사 학위를 따는 학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어령은 학문적 성과보다는 문예 비평의 성과가 교수 임용의 근거였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문학비평계의 거장이었던 고 김현 전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도 석사 학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