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오거스틴 앨로이시어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년 2월 2일 ~ 1941년 1월 13일
1 개요
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시인.아일랜드의 이상
영어권에서 대서양 기준으로 20세기 최고의 작가와 작품을 뽑을 때 서쪽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뽑는 경향이 강한 반면 동쪽은 이 사람의 율리시스를 뽑는 경향이 있다.
2 생애
아일랜드라면 자연스러운 얘기지만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녔다.
1888년 6살 때의 제임스 조이스. [1]
아홉 살인 1891년에 첫 시인 Et Tu Healy를 썼는데 아일랜드의 독립투사인 찰스 파넬에 대해 썼다. [2] 조이스는 킬데어에 위치한 클롱고스 우드 칼리지(Clongowes Wood College)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곳은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고 남들에 비해 빠르게 월반했던 그는 처음에는 잘 적응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1898년에는 UCD(University College Dublin)에 진학해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공부했다. 유럽 제언어에 능통했던 그의 언어적 역량은 이미 그 당시부터 두각을 드러낸 모양이다. 특히 헨릭 입센의 희곡을 마음에 들어해서 독학으로 노르웨이어를 배우고 리뷰를 쓰기도 했고 입센에게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기도 했다. 1900년의 일이니 그의 나이 18세 때 일이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희곡을 두어편 쓰기도 했는데 현재는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1903년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로 가 의학을 공부했는데 기술적인 프랑스어가 어렵다고 생각해 이를 관둬버렸다. 어학의 천재이긴 했지만 업계 용어는 불편한 모양이었나 보다. 1904년에는 미학적인 관점을 다룬 예술가의 초상이란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는데 Dana라는 잡지에서 거절당했다. 이 소설은 그가 21번째 생일 때 쓰기로 마음 먹은 스티븐 히어로(Stephen Hero)란 작품에서 기인하는데 이 작품은 10년 후에 나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edalus)인데 디덜러스란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다이달로스에서 따온 것이다. 아일랜드 사람이 듣기엔 꽤나 괴악한 성인 듯하다. 단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스티븐 히어로 사이엔 원고에 꽤 차이가 있다. 그 때문인지 이웃에 살던 개신교 소녀에 관한 언급 같은 것들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선 많이 빠졌다고 한다.
1904년 6월 16일 노라 바너클이란 여자와 싸돌아 다닌 경험은 뒷날 율리시스의 사건과 관계가 깊다. 이 여자와 만난 뒤 이른 바 자기유배(self-exile)의 길을 떠나 스위스의 취리히 등에서 산다. 거기서 영국인의 도움을 받아 학교의 영어교사가 됐는데 일이 꼬여서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로 갔다가 로마로 갔다가 한다. 그 와중에 자식을 낳기도 하고 형을 불러 일자리를 주기도 한다. 1909년에는 다시 아일랜드를 방문해 더블린 사람들을 출판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1912년에 다시 출판하려고 아일랜드를 찾는데 이번에도 일이 파토나자 그 후 그는 평생 런던이나 더블린을 찾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 번 오라고 해도 안 왔다고 한다. 같은 아일랜드인이자 시인인 윌리엄 예이츠가 불러도 당연히 안 갔다. 다시 트리에스테로 돌아갔는데 1915년에 1차 세계대전으로 자기 제자들이 다 군대로 차출되자 취리히로 옮겼다. 1920년에는 에즈라 파운드의 초청으로 파리를 방문했고 20년을 거기서 살았다. 여기서 율리시스를 집필했다. 이 시절부터 조이스의 눈에 문제가 생겼고 루이 보르슈에게 9번이나 수술을 받았다.[3] 1929년 보르슈가 죽자 스위스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딸인 루시아도 정신분열로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칼 융이었다. 융은 뒤에 율리시스를 읽더니 아버지나 딸 둘 다 정신분열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뒤 파리에선 마리아 졸라와 유진 졸라[4]의 간호를 받으며 피네간의 경야를 썼다. 1940년에는 나치의 프랑스 점령을 피해 취리히로 옮겼다. 1941년 1월 11일에는 천공궤양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당일엔 회복했다가 다음 날 상태가 악화되면서 코마 상태가 됐다. 결국 1월 13일 새벽 2시에 간호사에게 아내와 아들을 불러달라고 했는데 그들이 도착하기 전인 2시 15분에 사망했다고 한다.
취리히에서 장례가 열렸는데 아일랜드 대사가 스위스에 둘 있었지만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일랜드 정부는 조이스의 유해 일부를 본국으로 보내려고 한 노라의 제안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의 종교 문제를 두고 말이 많기도 한데 그의 초기 작품에는 종교적, 민족적 색채를 탈피하려는 예술가적인 면모가 많이 드러나 그가 무신론자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그가 성령 주간 등에 교회에 모습을 내비친 적이 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도 있긴 하다. 자세한 것은 영문 위키[5]를 참조하는 게 나을 듯 한데 대개 이런 부류의 견해에는 왜곡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가려서 읽는 게 좋을 것이다.
헤밍웨이에 따르면 낭비벽이 굉장히 심했다고한다.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주인인 실비아 비치의 극진한 금전적 지원에도 낭비벽 때문에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3 작품 성향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불어닥친 유럽의 민족주의 분위기나 혹은 그에 반대 기류로 형성된 사해동포 이런 류의 관념에 조이스는 굉장히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종교에 대해서 같은 관점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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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품 목록
5 문화적 영향
- 대서양 서쪽에서 최고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스콧의 첫 장편소설인 로맨틱 에고이스트는 교양소설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꽤 영향을 받았다. 다만 그 이후로는 스콧이 플래퍼 등을 다루는 등 완전히 현대적인 느낌으로 가는 바람에 갈리기에 두 사람의 작풍은 전혀 다르다.
- 워낙에 글이 뛰어나다보니 인용도 자주 되는 편이다. 영화 디파티드에서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나온 Non Serviam이란 말이 인용되기도 했다. 라틴어로 뜻은 나는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I will not serve)인데 원래는 루시퍼가 했다는 말로 종교적으로 불복종한다는 의미로 많이 쓰였는데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가리키는 말로 조이스가 재해석했다.
- 전설적인 미디어 학자인 마셜 매클루언의 저작물에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이 종종 인용된다. 특히 그를 대표하는 작품인 <미디어의 이해:인간의 확장>에서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를 잊혀질만 할 때마다 주요 대목들을 언급하며 설명한다.
가뜩이나 요약을 할 수가 없는 책인데 인용된 저작물마저 절망스러울 수준이다.
- ↑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영토였고 그 때 영국의 유행이었던 세일러 복장을 입었다.
- ↑ 파넬에 관한 언급은 그의 자전적 작품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가족 식사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파넬을 추모하는 데 비해 단티는 파넬이 불륜을 저질렀다며 비난한다. 파넬은 '아일랜드 무관의 왕(the uncrowned king of Ireland)'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가톨릭계는 친영적인 성향이 강했고 그의 장례식은 가톨릭의 방해로 아일랜드에서 치뤄지지 못 했다.
- ↑ 이 시기에 관련된 대표적인 일화로는 우유배달원 유니폼을 입고 글을 썼다는 것이 있는데 흰색 유니폼에 햇빛이 반시돼서 눈이 더 잘보일 것 같아서 그랬다고(...) 그 밖에 하루에 7단어밖에 못 썼다고 우울해해자 친구가 "그래도 자네 입장에서는 많이 쓴 편이니까 괜찮치 않은가?" 하고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이스는 7단어의 순서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친구 앞에서 엎드려 울었다고
- ↑ 마리와 유진은 부부다
- ↑ http://en.wikipedia.org/wiki/James_Joyce
- ↑ 이 말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연구자들도 많았다는 뜻의 농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