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량(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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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61위 안평후(安平侯) 악천추62위 유후(留侯) 장량(張良)63위 남안후(南安侯) 선호
한삼걸(西漢三杰)
찬후(酇侯) 소하(蕭何)유후(留侯) 장량(張良)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
생몰년도? ∼ BC 186
이름장량(張良)
자방(子房)
작위유후(留侯)
시호문성후(文成侯)
중국사를 대표하는 대전략가.
유방의 브레인.[1]

1 개요

지낭(智囊)[2]
후대까지 모사(謀士)의 대명사로 불리우게 된 인물

중국 초한쟁패기부터 전한(前漢) 한고제(漢高祖) 시대 정치가. 본래 한(韓)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의 막료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했다.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2 출신

유방(劉邦)이나 소하, 한신 같은 다른 인물들이 별달리 그럴듯한 출신이 아닌 사실에 비해, 장량은 대대로 한(韓)의 귀족 가문으로 그들과는 출신 성분 자체가 많이 달랐다. 그냥 귀족 가문도 아니라, 장량의 조부였던 희개지(姬開地)[3]신불해(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한나라의 짦은 전성기를 만들었던 한소후(韓昭侯)를 비롯하여 선혜왕(宣惠王), 양왕(襄王) 등 세명의 왕 밑에서 상국(相國)을 지냈고, 아버지 희평(姬平)은 희왕(釐王), 환혜왕 두 명의 왕 아래서 상국을 지냈다.

한신이 강소성 회음 출신이고 소하 역시 강소성 패현[4] 출신인데 비하여, 장량은 출신이 사기에 명확하게 언급이 되진 않는다. 다만, 생각해보자면 장량의 조상들은 바로 아버지 시기까지 한나라의 상국을 지내던 인물이었으니, 전국시대 한나라의 수도였던 신정(新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BC 230년, 압도적인 기세를 타고 있던 진나라의 군사력에, 장량의 조국은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장량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고관대작이었으니 장량도 시간이 지났으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장량은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었다. 이 당시 장량의 집에서 일하는 가노(家奴)만 300명이 넘었는데, 한신을 비롯한 유방과 다른 개국공신들의 갭과 비교해보면 참 묘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3 진시황 암살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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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유하던 장량이었으나, 조국이 멸망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그는,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털어 유능한 자객을 찾으러 다녔다. 목적은 원수 진나라의 괴수,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는 것.

회양(淮陽) 땅에서 잠시 예를 공부했던 장량은 이후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창해군(倉海君)이라는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 한 명의 역사(力士)를 소개받게 되었다. 창해 역사(滄海力士)를 위해 장량은 무려 120근[5] 이나 되는 철퇴를 만들어주었고,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수(巡狩) 하러 나오는 시기를 노려, 마침내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동남쪽인 박랑사(博浪沙)에서 황제를 요격하였다.

그러나 뒤따르던 부거(副車)를 잘못 공격했기 때문에, 진시황은 무사했으며 대노하여 천하에 대수색령을 내려 자객이라고 의심가는 인물들을 모두 잡아들이게 했다. 장량은 이름과 성을 모두 바꾸고 하비(下邳)로 들어가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몸을 감추었고, 항목에 보다시피 창해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사기에서 언급이 되진 않는다. 다만 황제를 직접적으로 노렸으니, 만약 잡혔다면 곱게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로 무협지 같은 일화다. 멸망한 나라의 후예가 가진 모든 재산을 털어 자객을 찾아다니고, 수수께끼같은 인물에게 역사를 소개받고, 혈혈단신의 몸으로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여섯 나라를 평정한 제국의 황제를 기습하다니.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유방은 소하에게 "유계는 본래 허풍이나 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라고 까이는 백수였고, 소하는 그 유계가 살던 고을의 하급관리였으며, 번쾌는 개 도살로 먹고 살았다. 한신은 남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이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상깊었는지, 남송(南宋)의 위대한 충신으로 손꼽히는 문천상(文天祥)은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정기가(正氣歌)에서 역대 의사들의 행동을 거론하면서, 장량의 이 일화 역시 '진나라 장량의 추(在秦張良椎)' 라고 언급하고 있다.

4 하비에서

4.1 황석공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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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에서 책을 전수받다[6]

장량 한 사람으로 인해 천하가 소란스럽게 되고, 진시황이 눈에 불을 켜고 대수색령을 내리던 판이라 장량은 당분간 하비에서 그대로 머물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장량이 하비의 어떤 다리를 건너던 도중, 노인 한 사람이 느닷없이 장량에게 다가오더니 다리 아래로 신발을 내던지고, 장량에게 이걸 좀 주워주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황당한 일이었지만, 상대가 늙은이고 하다보니 장량은 선선히 다리 밑으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 노인에게 주었다. 그러자 감사하다고 인사해도 모자를 판에 노인은 "그럼 신발도 신겨 주지?" 장량은 이때 직접 노인의 신발도 신겨주게 된다.

그러자 노인은 느닷없이 "자네는 가르칠 만하다." 고 하더니, 닷새 후 아침에 만나자고 권했다. 장량은 약속대로 닷새 후에 장소에 나왔으나, 이미 기다리고 있던 노인에게 욕만 먹게 되고, 다시 닷새 후로 약속을 잡고 전보다 좀 더 일찍 자리에 나왔으나, 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노인에게 욕만 얻어먹고 만다.

결국 장량은 닷새 후에는 아예 야밤도 되기 전에 미리 장소에 나가 기다렸고, 곧 도착한 노인은 장량을 칭찬하며 책 한권을 건네 주었다.

"이 책을 배우면 장차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년 후에는 능히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3년 후에는 젊은이는 나를 제북(濟北)의 곡성산(穀城山)에서 만나볼 수 있으리라! 그때 곡성산 밑에 노란 돌이 하나 있을 것이니 그것이 바로 나일 것이다.”

그리고 노인은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책의 이름을 보니,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는 책이었다. 장량은 기이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이 책을 열심히 보면서 공부하게 된다.

……그야말로 소설 등에서나 나올 이야기지만, 이 기록은 엄연히 정사(正史)인 사기(史記)에 언급되는 기록이다. 물론 갑자기 텔레포트 한 노인의 존재를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믿을 수 없으나, 적어도 장량 사후 불과 100여년 뒤에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의 시대에는, 이미 그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었다는 정도는 알 수 있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장량이 자신의 명성을 위해 일부러 신비로운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식으로 추측을 하기도 한다. 여하간에 그 내막이야 2200년 뒤의 사람들인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고……

장량이 만났다는 수수께끼의 인물은 황석공(黃石公)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천하를 통일한 13년 뒤, 장량이 유방과 함께 제북을 가다가, 곡성산 밑에서 황석(黃石)을 발견했다는 후일담 때문에 나온 이야기다. 즉, 그 돌이 바로 노인의 정체였다는 것.

4.2 항백을 만나다

만소당화전(晩笑堂畫傳)의 장량 그림

이때, 하비에서 장량이 만났던 인물 중엔 항백(項伯)도 있었다. 사실 항백의 정체는 초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의 아들이자, 훗날의 서초패왕 항우의 숙부였던 것이다. 이때 항백은 살인죄를 저질러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망국의 후예들끼리 은혜인지 장량은 항백을 숨겨 주어 위기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둘은 이때 친분이 생겼는데, 이 친분은 훗날 유방에게 있어 어마어마한 도움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장량은 사기에서의 기록을 보면 거진 10년간 협객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임협(任俠)으로 얽힌 태도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행적 때문인지 사마천은 본래 장량에 대해 '우락부락한 사람이었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훗날 초상화를 살펴 보니 "아녀자와 같이 예뻤다." 고 기록했다. 협(俠)의 세계라면 나름대로 거친 남자들의 세계인데, 그런 생활을 했던 사람이 여자같이 예쁜 외모였으니 사마천이 놀랄만도 한것. 게다가 그냥 이름만 협객이 아니라 실제로 영향력이 꽤 있었는지, 진승(陳勝)이 난을 일으킬 무렵에 사람을 모으자 100여명 정도가 장량에게 몰려왔다고 한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진승이 진승 · 오광의 난을 일으켜 장초(張楚)를 건국해서 불꽃을 당기자, 진나라 패망이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장량 역시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하지만 100여명 가지고 뭘 할 수도 없고, 먼저 일어난 사람에게 붙어보려고 했는데, 당초에 장량이 생각하고 있던 사람은 경구(景駒)라는 인물이었다. 실제로는 경구라는 인물은 얼굴마담이고, 진가(秦嘉)라는 사람이 실세로 경구를 가왕(假王)으로 만든것이었다.

5 유방과의 만남

그렇게 장량이 진가를 찾아가던 중에 유방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당시 유방은 옹치(雍齒)의 배반으로 근거지를 잃은 안습한 신세로, 진가에게 붙어먹고 있던 신세였다. 장량과 만날 당시 유방은 수천명을 이끌고 하비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유방은 장량을 말을 관리하는 구장(廐將)이라는 지위에 임명했다.

그런데 이 둘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장량은 유방에게 자신이 배운 태공병법을 설명했는데, 유방은 그때마다 좋아하면서 장량이 말한 태공병법을 실전에 사용해보곤 했다. 장량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태공병법을 유세해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장량은 “패공(沛公)은 아마도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진가에게 가는 대신, 그냥 유방의 휘하에 머물게 되었다.

5.1 조국의 부흥을 위해

이때, 회계(會稽) 에서 올라오던 군웅인 항량(項梁)은 진가를 단박에 때려부수고 그를 전사시킨뒤, 남은 세력은 자신의 세력에 편입시켰다. 유방은 당시에 여기저기 나가서 전투하던 중이라 그 피해에 휘말리지는 않았고, 항량이 세력을 잡자 설읍(薛邑)으로 가서 그를 만나 그 세력에 함께하기로 했다.

당시 항량은 초나라를 부활시켜 초회왕(楚懷王)을 군주로 옹립했던 시기였다. 이 모습을 본 장량은 직접 항량에게 발언했다.

“장군께서 이미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 왕으로 세우셨으니, 한나라 왕실의 후손들 중 횡양군(橫陽君) 성(成)이 어진 이름을 얻고 있어 그를 한왕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한왕으로 세워 한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시기 바랍니다.”

즉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한성(韓成)을 한왕으로 인정해주라는 부탁이었는데, 이때 장량은 영리하게 '한나라의 잔존세력을 규합 할 수 있다.' 며 미끼를 내걸어 승낙을 얻어내었다.

멸망한 조국을 부활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장량은 잠시 유방과 떨어져, 한성과 함께 1천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몇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곧 진나라 군이 거세게 반격을 하여 근거지를 잃어버렸고, 현재 하남성 부근인 영천(穎川) 일대를 떠돌아다니는 안습한 신세가 되고 만다.

5.2 다시 유방에게로

이 무렵 항량은 장한(章邯)에게 대패하여 전사하였고, 송의(宋義)가 잠시 그 자리를 맡아 조나라를 구원하러 나서는 군대의 상장군이 되었다가, 항우에게 살해당하였다. 그 혼란의 와중에 유방은 초회왕의 명령을 받고 병사를 규합하여 서쪽으로 나아가 관중(關中)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부근인 환원(轘轅)에 이르렀다.

이에 장량도 그 뒤를 따라나서, 10여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양웅(楊熊)의 군사를 격파했다. 이 시점부터 장량은 다시 유방과 함께했는데, 유방은 한성에게는 양적(陽翟)[7]을 지키게 하고는 장량을 데리고 같이 움직이며 완성(宛城)을 공격했는데, 당초에는 완성을 그냥 지나칠 요량이었지만 '후방에 적군을 남겨두면 좋지 않다.'는 장량의 발언에 완성을 공격했고, 진회(陳恢)라는 인물이 완성을 지키던 남양 태수를 설득하여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유방 일행은 이윽고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유방이 2만의 군사로 요관(嶢關)[8]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장량은 이를 말리면서 계책을 권했다.

“진나라 군대는 아직도 그 세력이 강하여 결코 가볍게 보시면 안될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진나라 장수들은 모두 장사꾼 출신들이라, 장사꾼은 이로써 유혹하면 마음이 쉽게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패공께서 일단 보루를 지키면서, 사람을 앞서 보내 5만 명의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산봉우리에는 모두 깃발을 빽빽이 꽂아 의병(疑兵)을 세우고, 다시 역이기(酈食其)에게 금은보화를 주어 진나라 진영으로 보내 적장들을 이로써 달래 항복을 권유하시기 바랍니다.”

계책대로 역이기를 보내 설득하자, 진나라 장수는 싸움 한번 안하고 항복해서 같이 함양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때 장량은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데, "진나라 장수가 항복 한다고 해도, 그 밑의 부하들까지 그럴 생각인지는 안심할 수가 없다. 적이 안심한 틈을 타 아예 격파 해버리자." 는 계략을 전했고, 유방은 장량의 계책대로 바로 공격을 가했다. 항복할 생각이었던 진나라 군은 와르르 무너졌고, 기세를 타고 진군한 유방은 마침내 함양에 입성, 진왕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5.3 유방이 인심을 사게 하다

패현 출신의 건달이었던 유방은, 진나라 제국의 수도였던 함양의 궁궐에 들어서게 되자 그 휘황찬란함에 혼을 빼앗겨 어쩔 줄을 몰랐다. 이에 궁궐에 머물면서 제대로 고삐 풀린 망나니짓을 한번 해보려던 찰나에, 번쾌(樊噲)가 "그러시면 안된다." 고 설득했지만, 유방은 번쾌의 말 따위는 가볍게 씹어버리고는(……) 사치와 향락을 즐기려고 했다. 그때, 장량이 나섰다.

“진나라가 포학무도했음으로 해서 패공께서 이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무릇 천하사람들을 위해 진나라의 남은 포악한 잔적들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그 본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막 진나라 도성에 입성하자마자 그 즐거움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걸(桀)을 도와 학정을 펼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어떤 일을 행하는 데는 이롭고, 성분이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라고 했습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번쾌의 간언을 받아 들여야 하실 것입니다.”

번쾌가 간언할 때는 들은척도 안하던 유방은 장량이 말을 하자 유방은 "씁, 어쩔 수 없지." 정도의 반응으로 선선히 그만두고 보물을 놔둔채, 그대로 함양에서 나와 주변에 주둔하였다. 그렇게 되자 함양 백성들은 군대가 입성해서 일으키는 온갖 문제와 약탈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유방이 여러 현의 사람들을 불러 위로하자 크게 인심이 동하면서 "패공이 진나라 왕이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걱정만을 하게 되었다.

5.4 홍문연

그러나 좋은 날도 잠시, 거록에서 진나라군을 문자 그대로 끔살시킨 항우는 어마어마한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항우가 못 오게 함곡관을 막아놓은 상태였는데, 이는 오히려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항우는 무려 40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고, 이에 유방은 10만의 병력이라 싸우면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 이때, 기막힌 우연이 발생한다. 항우가 유방을 공격하기 직전, 과거 장량에게 도움을 받은 항백은 만일 유방이 박살나면 같이 있는 장량까지 해를 입을까 걱정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일도 있고 해서 항백은 야밤중에 몰래 장량을 찾아와 이 모든 일을 밀고했다.

이에 장량은 "나 혼자 도망치면 의(義)가 아니다." 라면서,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방은 경악했으며, "항우를 이길 자신이 있느냐." 는 장량의 물음에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이에 장량은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했고, 둘의 자식들이 혼인하도록 약속을 한뒤 항백을 돌려보냈다.

환대를 받고 돌아온 항백은 "아, 패공은 자네에게 개기려고 그런게 아니라, 도적들 막으려고 함곡관을 잠근 것 뿐이야. 개길 생각은 전혀 없던걸?" 이라고 변명을 해주었고, 결국 항우는 유방을 죽일 생각은 그만두었고, 유방은 다음날 백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우를 찾아와 사죄하였다. 물론 장량도 같이 따라왔다.

하지만 항우는 몰라도 범증(范增)은 유방을 살려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연회가 벌어지는 와중, 범증은 수차례 항우에게 눈짓을 보내 유방을 없애도록 했지만 항우는 이를 못본채 했고, 이에 범증은 슬쩍 밖으로 나가 항장(項莊)에게, "검무를 추는 척 하면서 유방을 없애라." 고 명령했다.

항장이 칼춤을 추며 유방을 위협하자, 사태를 눈치챈 항백이 장량의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이를 본 장량은 나서서 번쾌를 난입시켜 깽판을 놓아, 이 위기를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후 유방이 돌아가고 난 뒤에 장량은 "그 양반 왜 그리 빨리갔지?" 라고 의심스러워 하는 항우에게 적당히 변명을 해 위기를 벗어났다. 범증이야 물론, 그런 항우가 너무도 답답해서 '어린놈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지만……

6 항우의 곁에서

유방은 항우의 결정으로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때문에 고마움의 뜻으로 각종 재물을 장량에게 주었는데, 장량은 모든 재물을 항백에게 가져다 주었고, 항백을 이용해서 촉 지방 뿐만 아니라 한중(漢中)까지 유방에게 줄 수 있도록 설득했다. 이에 항우는 한중 역시 유방의 세력에 포함시켜주었다.

하지만 장량은 일단 조국의 부활이 목표였기에, 벽지로 떠나는 유방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사천성 포중(褒中)까지 따라와 유방을 전송하였는데, 이때 떠나기 전, 항우의 의심을 덜기 위해 여러 절벽 등에 설치된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권하였다.

유방과 헤어지고 옛 한나라 땅으로 돌아온 장량이었지만, 항우는 한왕(韓王) 성(成)이 예전에 유방과 함께 움직였다는 이유를 구실삼아 그를 한나라 땅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의 세력권인 팽성에 데리고 가버렸고, 어쩔 수 없이 장량도 그런 항우를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방을 위해 계책을 마련해 두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한왕이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잔도를 불태워 길을 끊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중원이나 관중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듯 합니다.”

항우에게 그렇게 말해 유방에 대한 경계심을 줄이게 한 장량은, 이윽고 제나라의 전영(田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편지를 써서 항우에게 보냈다. 이에 항우는 유방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제나라를 막기 위해 북진하였다. 그런데 결국 항우는 후환이 생기지 않게 한왕 성을 죽여버리고 만다. 이에 장량은 간신히 달아나 서쪽으로 도망쳤고, 마침 한신(韓信)을 앞세운 유방은 삼진(三秦)을 깨며 진군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또 다시 헤어졌다 재회한 유방은, 장량을 성신후(成信侯)에 봉하였다.

7 천하를 논하다

7.1 한신, 팽월, 경포라는 장기말

기세 좋게 진군하여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까지 점령했던 유방은, 그러나 곧 항우의 공격으로 엄청난 대패를 당하여 밀려나고 만다. 간신히 패전을 수습한 유방은 말안장에 기댄 채로 "내가 천하를 먹으려는데, 누가 나를 도울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했고, 장량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강왕 경포(黥布)는 초나라의 맹장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왕과 틈이 벌어져 사이가 소원한 상태고, 팽월(彭越)은 제왕(齊王) 전영(田榮)과 함께 양나라 땅에서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불러 쓰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왕의 장수 중에는 오직 한신만이 큰 일을 맡기면 한 방면의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땅을 나누시려고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만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즉시 경포(黥布)에게 수하(隨何)를 보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팽월(彭越)에게도 별도의 사람을 보내 연락을 계속하였다. 또한 위표(魏豹)가 배신하자 한신을 보내 그를 격파하게 했고, 곧 북벌에 나설 수 있게 조치하였다. 사마천은 이 일에 대해 한왕이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사람의 힘 때문이었다.라고 평론하였다.

7.2 젓가락으로 천하를 설명하다

한신이 별동대를 이끌고 쾌진격을 벌이고 있을 무렵, 항우의 본대를 상대하고 있는 유방은 형양 · 성고 전역에서 그 무지막지한 압력을 정면으로 막아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BC 204년, 저 징글징글한 항우를 조금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역이기와 대화를 나누었다. 역이기는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옛날 탕왕은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토벌하고 나서, 하나라의 후손들을 기(杞)에 봉했고, 주무왕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한 다음 그 후손들을 송(宋)에 봉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나타나 덕과 도를 저버리고 각 제후국들을 침략하여 6국을 멸하고 그 후손들의 대를 끊어 그들은 송곳 하나 세울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다시 세우시고 그들 모두에게 제후의 인수(印綬)를 나누어주신다면, 그 나라의 군신들과 백성들은 폐하의 은덕에 감읍하여 대왕에게 달려와 귀의할 것이고, 폐하의 도의를 앙모하여 기꺼이 폐하의 신민이 되기를 자청할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과 정의가 행해지면 폐하께서는 남면하여 패자를 칭하게 될 수 있으며, 초왕은 틀림없이 의관을 정제하여 공손한 태도로 달려와 폐하께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

즉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삼아, 과거의 봉건제를 부활시키자는것. 이에 유방은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며 이 일을 준비하게 했다. 그런데, 마침 잠깐 외지에 나가있던 장량이 도착했고, 밥을 먹으려던 유방은 식사를 하다 말고 장량에게 "좋은 일이 있다." 면서 그 일을 설명 해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량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따위 계책을 폐하께 올린 것입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폐하께서 도모하려고 하는 대사는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오?"

"청컨대 앞에 있는 젓가락을 빌려주시면 대왕을 위해 당면한 형세를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7
그러더니, 유방의 앞에 있는 젓가락을 자기가 들어올리고는, 그 젓가락으로 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옛날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고 그 후손들을 기(杞) 땅에 봉한 것은 걸왕을 사지에 몰아 넣어 능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항적(項籍)[9]을 사지에 몰아 넣어 그를 제압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제후들을 새로 세울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나라주왕(紂王)을 정벌하고 그 후예들을 송나라에 봉한 것은 주왕의 머리를 이미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항적의 머리를 능히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은나라에 들어갈 때 상용(商容)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里門)에서 그의 어진 마음을 표창했고, 감옥에 갇혀있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했었으며, 또한 주왕에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무덤에 흙을 더 쌓아 그 높이를 높여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성인의 분묘를 다시 새로 쌓고, 현인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며, 재능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앞을 지나며 그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거교(鉅橋)의 창고에 있던 식량과 녹대(鹿臺)에 쌓여있던 금품을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부고 있는 식량과 금품을 모두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일이 끝나자, 병거를 개조해서 수레를 만들고, 병장기를 모두 거꾸로 세워 창고 속에 넣고 모두를 호랑이 가죽으로 덮음으로써 천하에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무력의 사용을 중지하고 문치를 행하여 다시는 병장기의 사용을 금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다시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전마들을 풀어놓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천하에 보였습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전마들을 풀어주어 다시는 그 말들을 전쟁에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돌아와 소들을 도림(桃林) 북쪽 기슭에 풀어놓고 다시는 용병(用兵)의 일로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겠다고 천하에 보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수레를 끄는 소들을 풀어 방목시킴으로써 천하에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겠다는 뜻을 보일 수 있으십니까?"

“난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일곱 번째의 이유입니다. 또한 천하를 돌아다니는 선비들이 그의 친척과 이별하고, 그 조상의 분묘를 버리며, 옛 친구들과 떨어져 폐하를 따라 천하를 전전하는 것은 단지 매일 밤마다 한 뼘의 땅이나마 떼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오늘 육국(六國)을 복국시켜 한(韓), 위(魏), 연(燕), 조(趙), 제(齊), 초(楚) 등의 후손들을 제후왕으로 세운다면, 천하의 선비들은 각기 그 주인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 친척과 친구 그리고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버릴 텐데, 폐하께서는 천하를 얻기 위해 누구와 함께 싸우려고 하십니까? 그 불가한 여덟 번째 이유입니다.

더욱이 지금 초나라보다 더 강대한 나라는 없어, 세력이 약한 육국의 제후국들은 결국은 초나라를 다시 따를 것입니다. 폐하께서 어떻게 그들을 신하로 삼으실 수 있겠습니까? 문객의 계책을 시행하신다면 폐하가 도모하려고 하는 일은 모두 그르치게 됩니다."

한 줄 요약 : 지금 항우 새퀴랑 싸움이 한참인데 애들 밥그릇 챙겨주면 애들 정신이 밥그릇에 팔려서 싸움 제대로 하겠습니까?'

이렇게까지 설명을 듣자 유방은 먹던 음식을 뱉어버리고 역이기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유생 놈 때문에 하마터면 천하의 공사(公事)를 망칠뻔 했구나!" 라고 격노하였다. 이때, 한나라 군 내부에서는 각 제후들을 임명하며 줄 인장들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유방은 즉시 이를 모두 녹여버렸다.[10] 장량의 이러한 태도는 봉건제에 대한 명백한 반대 의사표시였으며, 이후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고, 이는 훗날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亂)을 거쳐 한나라가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이때 장량이 봉건제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한것은, 한나라가 나아갈 그림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면해서, 항우는 자신이 봉건제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진나라 멸망 시에 이미 보여주었다. 장량으로 인해 유방은 국가체제의 큰 그림에서 항우와는 다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다만 장량의 젓가락 설교가 꼭 반 봉건제를 뜻하는 것으로만은 보기는 어렵다. 이 때 장량 자신이 육국의 후예를 모두 봉건하는 데는 반대했다고는 하지만, 결코 장량이 자신의 조국인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을 등한시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장량은 항우에게 한왕 성(成)을 한왕에 봉하도록 추천하였고, 한왕 성이 항우에게 살해당하자 한왕 신(信)을 유방에게 추천하여 한왕이 되도록 밀어주었다.

또한 이 젓가락 설교에서는 "유방을 따라다니는 장수에게는 봉건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펼치고 있으며[11], 해하 전투에서는 실제로 한신, 팽월의 봉지를 넓혀주고 세력을 확고히 인정해서 그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자는 주장을 펼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장량의 주장은 봉건해줘봤자 한나라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구 육국 후예들을 봉건하자는 주장을 반대한 것 뿐이지, 봉건제 자체를 반대하고 군현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시점에서는 한의 국력이 한정되어 있어 군현제를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한초에 정립된 군국제의 붕괴도 장량 시대로부터 한참이 지난 한경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본격화되고, 완전히 군현제로 돌아선 것은 한무제 시기의 일이니 장량이 살았던 시절보다 너무 미래의 일이다.

7.3 제후들을 움직여 천하대세를 종결짓다

한편, 이 당시 한신은 위, 대, 조,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동쪽 끝의 제나라까지 공격하여 제나라가 멸국의 위기를 맞이하자 어쩔 수 없이 원수였던 항우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항우 또한 한신이 제나라까지 정복하는 것 만큼은 막아야했기에 용저와 함께 대군을 보냈는데 이에 한신은 용저가 이끄는 20만에 달하는 초, 제 연합군을 유수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결국 하북을 평정한 한신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 명성이 온 천하에 떨쳤는데 이 때, 한신은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 즉 임시적인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반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제가 이곳의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이 안 되어 후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신의 제안이, 천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의 야심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저 일시적인 계책으로 제안을 하는 일인지, 그 동기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때 유방의 상황을 보자면 사수(汜水)에서 초나라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 장사 사마흔을 격파했으나, 소식을 들은 항우가 팽월(彭越)을 공격하다 말고 돌아와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2]

게다가 이미 한신은 역이기 사건으로 유방의 의중을 거스른 전례도 있었기 때문에 유방은 몹시 분개했다. 한신의 서신을 가지고 온 사자 앞에서 "이놈이 지금 가왕 시켜달라는 거냐?!" 하고 외치며 앞뒤 생각하지 않고 한신을 공격해버리려고 했다. 이때 곁에 있던 장량이[13] 유방의 발을 슬쩍 밞으며, "지금 한신을 건드려서 좋을게 없습니다." 라고 귀띔해주자, 열받긴 했지만 사리분별을 할 능력은 충분히 있던 유방은 바로 태도를 바꾸어 소리쳤다.

"사내 대장부가 왕 노릇을 하려면 진짜 왕을 해야지, 가왕이 될 말이냐?"

그리고 곧바로 장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을 제나라 왕으로 임명했고, 곧바로 초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전쟁은 최후로 접어들었고, 항우는 팽월과 유방의 협공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군량도 부족해졌으며, 또한 한신의 기세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항우는 먼저 유방에게 홍구(鴻溝)[14]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여 천하를 양분 하자는 제안을 내었다. 유방도 이에 승낙하여, 두 사람은 각자 동쪽과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제안으로 항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 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15]에 이르렀음에도 불구,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고,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 한신은 무려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해하 전투에서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한신은 처음에 초나라 군대에게 밀리는듯 물러나다가, 측면 부대를 이용해 초나라 군대를 요격했고, 다시 본대가 뒤돌아 공격을 퍼부어서 초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항우가 달아나다 자결함으로서 전쟁은 드디어 종결을 맞이했다.

8 황제의 책사

8.1 유후(留侯)

전쟁이 종결되자 그때까지 수고한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장량은 몸이 아프고 하여 직접 칼을 들고 전쟁터에서 세운 공이 없었는데, 유방은 스스로 장량의 공을 언급하며 칭찬하는것이었다.

"군중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것이 자방이 세운 공로이다. 장량으로 하여금 제나라 땅의 3만 호를 스스로 골라서 봉읍으로 갖게 하라!"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대우였나면, 한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고 공신 소하가 찬후(酇侯)로 봉해질때 식읍(食邑)이 7,000호 였다. 그런데 장량에게는 무려 3만 호를 내주겠다고 했으니, 장량에 대한 유방의 고마움과 신임은 그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신 순위는 62위다 그런데 장량은 이를 거절했다.

"원래 저는 하비(下邳)에서 몸을 일으켜 경구를 찾아가다가 도중에 유(留) 땅에서 폐하를 우연히 뵙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저에게 폐하를 만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저의 계책을 받아 주셨고, 다행히 저의 계책은 적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룬 공이 아니라 폐하의 배려로 인한 일이라, 저는 단지 유현(留縣)에 봉해지는 것만으로 과분하온데, 어찌 감히 제가 3만 호의 봉지를 바라겠습니까?"

이에 장량은 3만호 대신, 유방과 장량이 처음 만난 그곳, 유(留) 땅을 봉지로 갖는 유후(留侯) 가 되었다. 유방으로는 폭풍 감동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8.2 폐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때 유방은 주요 공신들에 대해 상과 봉읍은 주었지만, 그 밑의 공신들은 매일 같이 "내가 잘났다." "내가 더 잘났거든?" 하며 공을 다투는 통에 골머리를 썩히며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유방이 낙양의 남궁(南宮)에 머물며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다리 밑의 모래밭에 일단의 장수들이 모여 앉아 서로 간에 무엇인가를 쑥덕쑥덕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방은 곁에서 시종하고 있던 장량에게 "저거 뭐하는 짓임?" 이라고 물었고, 장량은 "보면 모르심? 지금 역적모의 하는 것임." 이라고 대답했다. 유방이 쟤들 뭐때문에 그러느냐고 묻자, 장량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평민의 신분으로 일어나, 저들의 힘으로 천하를 얻으시어, 지금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봉읍과 상작을 내린 사람들은 모두 소하(蕭何)나 조참(曺參)과 같은 폐하와 가깝거나 총애하는 옛 친구들 뿐이고, 폐하께서 살해한 자들은 모두 살아오시면서 원한을 품은 자들입니다.

지금 군리(軍吏)들이 저들과 같은 사람들의 공로를 모두 계산해 본 바, 천하의 땅을 전부 가지고도 그들 모두에게 봉읍과 상작을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했음으로, 저들은 폐하께서 자기들 모두에게 봉읍을 내려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또 평소에 자기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의심받아 살해될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삼삼오오 모여서 모반을 하려고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유방이 걱정하며 어떻게 해야하냐고 묻자, 장량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폐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군신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미워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에 유방은 과거 자신을 배신했던 옹치라고 대답했다. 이에 장량은 '군신들이 옹치가 봉읍과 상작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자기도 틀림없이 봉작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을 것' 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유방이 옹치를 섭방후(什方侯)에 봉하고 주연을 베풀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다른 신하들은 "폐하가 원수처럼 여기던 옹치도 상을 받았는데, 우리야 무슨 문제가 있겠어?" 라고 생각하며 모반할 마음을 모두 버리게 되었다.

사마광은 이 일에 대해 "장량은 틀림없이 모반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었지만, 일부러 말을 안하고 있다가 유방이 눈 앞에서 사태를 직면할때 충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누구를 해치지 않게 하고, 아랫 사람들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이다. 간언을 올리는 사람은 장량처럼 해야 한다." 고 평가하기도 했다.

8.3 제국의 수도

이때, 유방은 한나라의 수도를 어디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대부분 관동(關東) 출신들인 공신들은 관중에 들어가는게 싫어서 "낙양이 최고죠." 하고 유방을 설득하는 중이었는데, 여러 공신들이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이러하였다.

"낙양의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과 민지(澠池)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황하에 의지하고 있고,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마주 대하고 있어 그 험준한 지형과 견고한 성곽에 의지한다면 가히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촌동네 농사꾼 누경, 후에 유경이 되는 자가 나타나 '낙양은 방어에 용이하지 않아 덕이 많은 자에게만 어울리는데, 폐하는 워낙 전쟁만 벌이시던 분이라 전혀 아니올시다. 관중 쪽이 반란같은게 일어나도 안심입죠.'라는 거칠지만 적절한 조언을 올렸고, 솔깃한 유방이 장량에게 조언을 구하자 장량도 낙양을 수도로 삼는 일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낙양은 비록 그와 같이 지리적인 이점과 견고한 성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의 땅은 너무 협소하여 사방 백리에 불과합니다. 또한 토지는 척박하고, 사면에서 적군의 침입을 맞이할 수 있어 이와 같은 땅은 결코 군사적으로 유리한 땅이 아닙니다. 관중의 동쪽에는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이 있고, 서쪽에는 농산(隴山)과 민산(岷山)이 있어 그 사이의 비옥한 땅은 사방 천리에 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쪽으로는 물산이 풍부한 파(巴)와 촉(蜀) 두 군(郡)과 접하고 있고, 북쪽에는 호(胡) 땅의 대초원이 있어 능히 가축을 방목하여 기를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그래서 삼면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굳게 지킬 수 있고, 단지 동쪽 한 방면만을 통해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후들이 안정되어 있으면, 하수와 위수(渭水)를 이용하여 관동에서 산출되는 양식과 물자들을 관중으로 수송할 수 있을 것이며, 제후들이 반하여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면 위수나 하수의 순류를 타고 병사들과 그 군수품을 수월하게 수송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천리에 달하는 철옹성과 같은 땅이며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창고입니다. 유경(劉敬)의 올린 건의가 옳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그때까지의 논쟁이 무색하게 즉시 관중에 들어가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9 여후의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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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노인이 태자를 보호하다

유방이 관중으로 들어가자, 장량도 이를 따라갔다. 하지만 본래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장량은 이 무렵에는 정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양생법(養生法)을 쓰면서 밥도 거의 먹지 않고 집 밖으로도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이 무렵 유방은 척(戚)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문제로 여후(呂后)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태자를 폐하고 새로 다시 임명하는 일이라, 대부분의 공신들은 비판적이었지만 유방의 결심이 너무 확고해서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하고 있었고, 이에 애가 탄 여후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폐하는 유후의 말은 무조건 들어줌." 이라고 하자 여후는 오빠인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16]을 장량에게 보내 계책을 물어보았다.

처음에 장량은 "황실 가족의 일인데, 나같은 사람 백명이 있다 해도 폐하가 무슨 말을 들으시겠나?"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여택이 워낙 강하게 도움을 요청하므로, 이에 장량은 어쩔 수 없이 유방이 그토록 초빙하려고 했지만 초빙하지 못한 상산사호(商山四皓)라는 인물들을 초빙하여 태자 옆에 있게하면, 황제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여후는 즉시 많은 재물을 써가며 그들을 초빙했고, 훗날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태자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던 유방은, 그들까지 여후가 초빙한 모습을 보자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라고 하며 울면서 태자를 바꾸는 일을 그만두었다.

10 최후

장량은 대(代) 땅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한 황제를 따라 종군하다가 마읍(馬邑)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거나, 한신의 반란을 진압한 소하를 상국에 추천하기도 했다. 그 무렵에 장량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이윽고 진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포한 진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다가 천하를 진동시켰다.

오늘 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고 만호의 봉읍을 받았으며, 그 지위는 열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포의로 시작한 사람으로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라 나는 이것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적송자(赤松子)[17]의 뒤를 따라가 노닐고자 한다."

이때 장량은 밥도 거의 먹지 않으면서 몸을 가볍게 유지하고 있었는데, 곧 유방이 세상을 뜨자 태자의 일을 고마워한 여후는 억지로 음식을 먹이면서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게 인생인데,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필요 있음?"[18] 이라고 말했다. 이에 장량은 별 수 없이 억지로 음식을 먹게 되었는데, 바로 먹고 죽었다면 이게 참 웃기는 일이 되었겠지만 금방 죽지는 않았고 8년 뒤에 죽었다. 몸이 약해 골골대긴 했지만 소하나 조참등이 죽고난 후에도 살아 있었다.

장량이 다리 밑에서 노인과 만난 13년만에, 그 노인이 말했던 곡성산(穀城山)을 가보자 그 밑에서 황석(黃石)을 하나 발견했고, 이후에 이 황석을 집으로 가져와 보물처럼 여기며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장량의 후손들은 장량이 죽자 그 황석과 장량을 같이 묻어 주었다.

11 평가

한신의 경우는 전쟁의 신, 소하의 경우는 뛰어난 정치인으로 각각의 역할이 뚜렷한데 비하여, 유방과 보조를 같이한 장량의 역할은 명확해 보이지 않아 "장량이 대단하긴 대단하지. 그런데 뭘 했더라?" 같이 행적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때문에 간혹 소하나 한신에 비해 장량의 활약이 묻히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장량의 역할은 결코 적지 않았다.

장량의 역할은 유방과 함께 하며 큰 그림, 즉 대국적인 전략을 그려 자잘한 한두번의 전투보다도 초한전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1. 옛 진나라의 영토를 빠르게 확보함으로 안정적인 근거지를 다진다.
  • 2. 항우로 부터 분봉 받은 제후들을 외교적 회유와 군사적 정벌을 통해 항우의 세력을 줄인다.
  • 3. 근거지에서 펌핑 되는 물자와, 회유한 제후들을 이용해 항우를 끝없는 소모전으로 몰고간다.

라는 커다란 대전략의 골조는 그의 모든 결정이 영향을 미친 부분이었다.

소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관중에 있으며 관중의 자원을 끊임없이 유방에게 보충 해줬고, 한신은 별동대를 이끌고 대,조,연,제등 하북의 제후들을 제압해 항우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그런 한신화려한 전공과 달리 장량은 계속해서 유방의 옆에 머물며 그의 크고 작은 모든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약탈을 금지하고 진나라의 백성들을 위로 할 것, 호해처럼 황음무도에 빠지지 말고 진의 백성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일것."이라고 조언한 장량으로 인해 유방은 진나라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팽성 전투에서 최악의 대패를 당한 바로 그 시점에서, 장량의 건의로 경포와 팽월 등에 연대를 더욱 강화하여 오히려 우군을 더 끌어들여 항우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항우와 전쟁이 한창인 지금 이 시점에 분봉을 하면 대왕의 신하들이 봉지로 뿔뿔이 흩어질텐데 누가 대왕을 위해 계속 싸우겠느냐."라고 조언하여 역이기의 봉건제를 거절하도록 한 것은 이후 한나라의 정치 판도에 매우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며, 개국 초기에 있을 공신들의 반란과 반발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던 것도 장량의 덕택이었다. 제국의 수도를 관중 지방에 있게 한것도 장량의 공이었다.

이렇게 일일히 공적을 나누어 말하지 않더라도, 장량은 유방이 내린 거의 모든 결정에 영향력을 미쳤다. 특이한 점은 유방이 여러 공신들을 의심하고, 심지어 소하마저 의심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 장량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임을 보였다는 점이다. 유후세나 사기의 여러 언급에서 장량의 제안을 유방이 거절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거절은 커녕, 심지어 장량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는 식의 기록도 거의 없는데, 장량에 대한 유방의 신뢰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여후가 장량에게 조언을 구한 일도 유방이 장량의 말은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군을 이끌고 따로 군림하는 한신이나, 유방이 부재할 동안 본거지인 관중을 그대로 장악하고 있는 소하에 비해 별다른 직책도 없이 유방의 주위에 머물러 있기만을 하는 장량은 의심의 여지가 적긴 하다. 그러나 무려 3만의 봉읍을 내려도 이를 거부하는 장량의 태도 역시 유방에게 인상깊게 다가왔을 것은 분명하다. 유방은 장량과 함께 뭔가를 논의한 적이 대단히 많았는데, 사마천 역시 황제와 함께 천하 대사를 표시 안나게 논의한 것은 매우 많았지만, 모두가 천하의 존망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을 정도.

본래 세가나 열전마다 평론을 내리는 사마천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귀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괴이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 한 노인이 장량에게 병서를 준 일과 같은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며 장량의 신비스러운 행적에 대해 외경심 비슷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19] 사마천은 이렇게 평론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귀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괴이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 한 노인이 장량에게 병서를 준 일과 같은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가 여러번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그때마다 장량이 계책을 내어 공을 세웠으니 어찌 그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고조가 “무릇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 짓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라고 했다. 나는 장량의 외모가 매우 우람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화상을 보니 참으로 아녀자와 같이 예뻤다. 그래서 공자가 한 말이 있다. “외모로써 사람을 취한다면 내가 자우(子羽)[20]에게 실수를 한 것과 되리라!”

이는 유후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12 그 외 이야기

12.1 나의 장자방

워낙 임팩트 있는 인물이라 현재까지도 흔히 모사의 대명사로 통한다.

국내에선 워낙 삼국지 입김이 강해서 거의 듣보잡이고 제갈량이 모사의 대명사이긴 하지만. 조조순욱을 '나의 장자방'이라 칭한 일은 유명하다. 당태종 역시 위징을 장자방에 비견하는 등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공을 세운 참모나 정치가를 '장자방'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도 유명하다 보니 굳이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머리 좋은 사람을 장자방에 비견하긴 마찬가지다. 조선조선에서는 정도전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8월 26일 정도전 등의 졸기에 기록되어 있다.

개국(開國)할 즈음에 왕왕 취중(醉中)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고제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21]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22]

세조에게는 그 유명한 한명회가 있다. 한명회가 세조의 즉위에 얼마나 공헌했는지를 생각하면 장자방이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대한민국에서도 기획력이 능한 참모계 정치인을 이렇게 일컫는데, 한나라당 쪽에서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나[23] 민주당 쪽에서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각각 "장자방"이라고 불리며[24] 언론에서도 곧잘 '장량' '장자방'이라 칭하며 참모 정치인들을 소개하곤 한다.

사실 모사로 이름난 인물은 많지만, 대부분 제대로 된 주인을 못 만나거나, 계책이 어그러져 자신 또는 주군을 망치거나, 끝내 대업을 이루지 못하거나, 대업을 이룬 뒤 숙청 당하는등 뒤끝이 더럽게 끝났다[25]. 반면 장량은 이런 좌절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적인 모사 라이프로 여겨진다.[26]

12.2 후손들

아들로 장불의와 장벽강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위를 상속받은 장불의는 문제 때 불경죄를 범해 후의 작위를 박탈당해 버렸다.

장벽강은 뒷날 유방의 아들 혜제가 죽었을 때 여후가 곡만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보고 승상 진평에게 "태후가 저러는 건 대행 황제(혜제)께 장성한 아들이 없어서 승상과 같은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임. 여씨 일족들에게 요직을 주면 태후가 안심할 거라능!"이라고 조언했으며 진평은 장벽강의 진언을 따랐다.

잔뼈 굵은 책략가 진평에게 이 진언을 한 장벽강의 이 때 나이는 15세였으며 시중 직책에 있었다고 한다. 장량이 멀쩡히 살아있었던 시기였기때문에 장량의 견해를 장벽강이 그대로 진평에게 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삼국지장막, 장익은 이사람의 후손들이다.

12.3 대중 문화 속의 장량

12.3.1 만화

고우영 초한지에선 수염난 호걸상을 지닌 모사로 등장하는데(고우영 수호지의 오용을 닮았다) 오히려 여자같은 미남자 캐릭터는 한신이 돼버렸다.[27] 실지로 장량의 이미지인 모사의 이미지도 한신이 대부분 가져갔으며 한 왕실의 후예로서 한을 부흥시키려는 한신과 유방을 통해 한에 복수하려는 장량과의 약간의 대립이 있다.[28] 다만, 분명한 것은 고우영 초한지의 장량은 한신의 속마음조차 꿰뚫어 보는, 한신보다 한 수 위의 인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작중에서 한신 스스로 인정한 것. 장량을 평가하는 고우영 화백의 시선을 볼 수 있는 대목. 같은 초한대전을 다룬 십팔사략 5권에서는 한신도 장량도 미남으로 그려졌다. 요코야마 미츠테루항우와 유방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의 제갈량과 같은 얼굴로 그려졌다.

적룡왕에선 미남자 계열로 그려졌는데 여기서는 홍문연 때 항장의 상대를 직접 맡아서 칼춤을 추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항백이 등장하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황석공의 퀘스트를 하는 장면이나 여러 헌책을 하는 등 전체적인 묘사는 비슷하다. 물론 유방이 중심인 작품이라서 후반으로 갈수록 비중이 줄어드는 편이지만.

이문열의 초한지를 원작으로 형민우가 그리고있는 이문열 형민우 초한지에서는 삼국전기 시리즈육손(삼국지)이나 새벽의 연화의 계숙처럼 긴 머리카락에 도포를 입은 한푸스타일의 미청년책사로 등장한다.

해황기, 수라문의 작가인 카와하라 마사토시가 2016년 4월부터 장량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제목은 '용사의 날개(龍帥の翼)'. 부제로 '사기 유후세가이전(史記・留侯世家異伝)'이라는 제목이 붙어서 재해석이나 각색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12.3.2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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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유기의 장량)

코에이의 항유기에서는 삼국지 시리즈제갈량과 비슷한 위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최강의 군사. 범증보다 능력치가 조금 우위에 있다. 일러스트도 역사 기록을 반영했는지 미청년 스타일.그래도 저 얼굴로 나이가 40이라는 것에 신경쓰면 지는 것이다. 이마에 점이 없는 것을 빼면 옆머리가 길쭉한 것이 적룡왕의 장량과 비슷하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인터넷에서 고대무장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삼국지 9 PS2 이후로 정규 시리즈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시리즈 전반적으로 능력치는 통솔이 다소 떨어지는 것만 제외한다면 제갈량과 거의 판박이. 지력 100인 것부터 시작해서 삼국지 11에서는 특기(신산), 삼국지 12에서는 전법(팔진도)까지 모두 제갈량과 동일하다. 통무는 제갈량보다 능력치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10과 11의 일러스트는 어린 소년 같은 모습으로 나온 반면, 삼국지 12에서는 역시 약간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등장. 마침 실제 외모도 여자처럼 예뻤다고 하니까 작정하고 이런 모습으로 표현한 듯.

삼국지 9 PS2에서는 통무지정 68/6/100/94 교사, 혼란, 덫, 배반, 환술, 매도, 요술를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뒷렬에 배치해서 환술을 쓰는게 더 좋다.

삼국지 10에서는 66/38/100/95/92 특기 19개. 특기 중에 계략 특기는 저지빼고 다 가지고 있고, 설전도 위압, 면박빼고 다 있다. 또한 군사, 명사도 있으니 활용도가 높지만 전장에서는 통솔이 68이라 턴이 늦게 들어와서 내정이나 전방 태수로 쓰거나, 통솔을 올려주는 퀘스트나, 책을 주어서 하던가 하자.

삼국지 11에서는 65/33/100/95/91 병과적성이 노병 S, 공성병기 A외에는 C. 특기가 신산이라 백출, 주악, 시상 특기 무장만 얻으면 된다.

삼국지 12에서는 통솔이 74으로 올라가고, 무력이 40으로 올라갔다. 제갈량보다 우위가 있는 능력치는 무력 40뿐 병종은 궁병, 전법은 팔진도. 활용도는 전투력이 낮은 제갈량.

삼국지 13에서는 설전에서 누적 100승 달성시 숨겨진 고대무장에서 해제돼 사용 할 수 있다. 전법은 조조의 장자방이라고 불렸던 순욱과 같은 '왕좌(王佐)'이다. 지력만 100이고 통솔은 삼국지 12와 같이 70대라 전작보다 전투에서의 활용도가 낮아졌다. 그래도 중신특성은 가장 희귀한 '신산귀모(神算鬼謀)'이다.
능력치는 통솔 71, 무력 40, 지력 100, 정치 95. 특기는 상업 9, 농업 8, 문화 5, 설파 9, 교섭 8, 언변 8. 전수특기는 상업에 병과적성은 창병과 기병이C, 궁병이 S이다.

삼국지 DS 2에서는 SP무장으로 등장한다. 통무지정매 순으로 65/33/100/92/91. 역시 지력 100은 빼놓지 않는다. 거기다가 SP무장에만 있는 사기 특기 3가지중 2가지를 달고 나온다. 귀모와 낙뢰. 패왕이 있는 장수랑 붙여놔서 낙뢰를 감상해보자.

12.3.3 영화

영화 서초패왕에서는 단 한장면만 등장한다. 항우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고 우후가 항우의 시체를 안고 통곡할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신[29]에게 토사구팽의 이치를 따라서 은퇴해야 함을 권한다.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서는 유방이 노망이 들어서 한신까지 옥에 가두자 다른 가신들처럼 이제 늙어서 별볼일 없는 노인네로 보이게 매일 집에서 약을 달이고, 본인이 만든 약을 만들어 먹다가 다리가 마비되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6년간 옥에 갇힌 한신이 풀려나자 자신의 집안에 들여서 보살펴 주지만, 한신은 아직도 유방이 자신에게 왕위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본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황후에게 결탁을 하여 군에 남아있는 한신의 장군들을 제거하게 한다.

하지만 한신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때문인지 한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 집안에 기르는 약초들을 베어가며 울부짇고 있었다.

초한지:천하대전(2011)에서는 저잣거리에서 내기를 하다가 소하에게 발탁되어 유방을 돕는다. 한나라 건국까지 유방을 돕는 것은 거의 같으나, 한고조 즉위 후 범증의 계략으로 한신,소하처럼 반역자로 몰려 쫓겨나다 활을 맞고 절벽으로 추락. 죽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유방 사후 전 궁궐로 몰래 들어와 '천하를 통일했지만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하여 아무도 주위에 남지 않은 지금 모습' 이 원하던 결말인지를 유방에게 묻고, 이후 방랑하게 된다.

영화에서 바둑을 책략의 수 싸움을 묘사하는 요소로 사용하였기에 바둑의 고수로 설정되어 있으며[30], 전쟁 장면이나 회의 장면 정도를 제하면 대부분의 장면을 바둑두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12.3.4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신삼국에서 노숙으로 나온 곽청이 장량을 연기한다.

가산을 다 털어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암살자로 첫 등장한다. 창해 역사를 만나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나 실패하고 모두 죽지만 장량은 벼랑으로 뛰어내려 살아 남았다. 이후 패공인 유계가 초군에 병사를 빌리러 가는 길에 마주치며 첫 만남을 가진다. 그러나 항량이 자신을 휘하에 두려고 하자 한(韓)왕실 부흥에 힘을 보태주면 한은 초를 도울것이라는 핑계로 항량을 떠나고 패공 유계와는 다음을 기약하며 떠난다.

이후 무안후로 봉해지고 관중으로 진격하던 중 진군과 대치하던 유방과 재회. 이 때 유방 진영은 진군에 포위당하였다고 최후를 맞이할 것도 각오하였으나, 실은 장량이 이끈 한나라 군이 진나라의 갑주를 입어 위장하고 온 거라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그 이후 유방을 따라 군을 통솔하는 자리에 오르지만 통솔력은 그다지 높은게 아닌지 밑에 장수들의 불만을 제대로 해소도 못시키고 성 하나를 함락시키자 통솔권을 내주고 다시 책략이나 조언을 주는 즉, 군주 옆에서 보좌하는 모사로 돌아간다. 본인도 군통솔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정하였다.

이후 유방을 따라다니며 크고 작은 계책을 내주어 도와주고 있다. 홍문연에서도 말빨로 항우를 설득하는등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여러모로 전작이라 할수 있는 신삼국제갈량과 포지션이 비슷하다고 할수 있지만 촉으로 들어간 뒤 승상이 되어 촉을 위해 전략·전술·군통솔·행정업무 같은 모든걸 혼자 짊어졌던 제갈량과는 다르게 이쪽은 말그대로 유방을 옆에서 보좌하며 앞길을 제시해 주는 모사 이미지가 더 강하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야 장량 + 소하에 한신까지 더해진 이미지 하지만 드라마에서 분량이나 비중이 유방과의 대립이 점점 심화되어가는 한신이나 유방의 첫 봉기때부터 유방의 곁에서 그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함께한 소하에 비해 심히 떨어지는 게 문제. 마지막회에서도 서한삼걸 중 혼자 안 나왔다. 그래도 유방이 한신, 소하와 함게 지금의 자신을 만든 인재로 언급은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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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한전쟁 중에 가장 유방과 오랜시간 같이 있으면서, 그의 결정 하나하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장량이라는것. 때문에 어떤 조직보스의 가장 믿음직한 측근을 "(그 사람의)장자방" 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삼국지11에서도 책사를 등용했을때 가끔 이표현이 나오는데 만약 순욱을 등용하면 '이 순문약이 ○○님의 장량이 되겠습니다.'이런식으로 나온다.
  2. 꾀주머니라는 뜻이다.
  3. 이전 문서에서는 장량의 조부 및 아버지의 성이 '張'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는 장량이 도망다닐 때 붙인 성으로 원래는 희(姬)씨이며, 주나라의 성씨와 같다.
  4. 이곳은 산동성 강소성 하남성 안휘성 4개성이 교차하는 곳이다.
  5. 이 때의 1근은 2백 그램이었으므로 24kg
  6. 마태화보에 실린 그림
  7. 하남성 우현
  8. 지금의 섬서성 상현(商縣) 서남의 요산에 설치했던 관. 남양분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관문
  9. 항우를 가리킨다. 羽는 字, 籍이 이름.
  10. 여담으로, 역이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거 설명한다고 멀쩡한 젓가락을 여덟 개나 분질렀다(...) 귀족 출신이라면서 참 과격하시다 인생깨나 험하게 사시기는 했는 듯
  11. 선비들은 유방으로부터 땅을 나눠받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유방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12. 이 상황이 사기 회음후열전이나 한서 한신전에는 유방이 형양성에서 포위 당하여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묘사가 되는데, 고조본기나 한서 고제기를 보면 이미 형양은 5월 기신의 일이 있었을때 함락 당했고, 한신이 용저를 격파하고 왕 자리를 요구한 일은 11월의 일이며, 한서의 언급을 보면 당시 유방은 광무(廣武)에서 대치를 하다가 성고에 머무르고 있었다.
  13. 한서 한신전에는 진평도 같이
  14. 현 카이펑 부근
  15. 하남성 태강현
  16. 사실, 여택의 작위는 주여후(周呂侯)고 건성후는 여택의 동생으로 여후의 작은오빠인 여석지(呂釋之)의 작위다. 이 때문에 여기서 나온 여택은 여석지를 잘못 쓴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
  17. 전한시대의 신선. 사마광은 적송자 드립은 황당한 이야기고, 다만 장량이 처신을 잘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여담으로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볼때, "장량이 적송자를 따라 가서 놀았다는데, 그럼 장량은 안 죽은 것임?" 이라는 문제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강목에 보니 장량이 죽었다고 써져있던데?" 라고 답변하였다.
  18. 이것이 바로 白驹过隙백구과극의 고사성어이다.
  19. 사마천이 노장사상이 강하긴 했어도, 괴이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대완열전' 등에서 "곤륜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장건이 서역에 다녀왔는데 그런게 어딨었나? 우본기나 산해경에서 말한 기괴한 물체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배척해버린 사람이다. 애시당초 삼황에 대한 이야기를 사기에서 잘라버린 것도 '말도 안되는 것 같다.'는게 이유였고.
  20. 공자의 제자 중 용모가 매우 추했던 사람
  21. 한 마디로 "유방이 장량을 부린 게 아니라 반대로 장량이 유방을 이용한 거임. 그러니 한나라를 세운 건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이고 난 조선의 장자방." 라는 흠좀무할 정도로 드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정도전의 경우에는 이런 얘기를 할 만도 한 게 본인 스스로가 이성계를 목적의식을 가지고 찾아간 경우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유방과 장량의 인연은 우연적인 측면도 있고 장량의 초지는 유방의 한나라가 아니라 조국 한나라 부흥에 있던 만큼의 차이가 있긴 하다.
  22. 그러나 바로 다음 문단에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태조실록을 편찬한 이가 정도전의 정적인 이방원이었으니 주관적인 시선이 다소 들어가 있기 때문.
  23. 보수의 책사, 보수의 전략가, 보수의 장자방 등등 언론에서 윤여준을 소개할 때 쓰는 칭호들이다 ㄷㄷ. 매 선거국면마다 혹은 보수정권이 위기다 싶을때마다 윤여준의 이름이 항상 언론에서 거론된다.
  24. 이해찬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총괄지휘해서 자신의 주군이라 할 수 있는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25. 북송 태조 조광윤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 주요 공신들을 죄다 옷을 벗겨버렸는데, 이게 미담으로 언급될 정도로 피를 본 공신들이 많다. 멀리 갈 것 없이 장량의 당대에 토사구팽이라는 고사가 생길 정도로 한신을 포함한 여럿이 숙청되어 죽었고, 이는 수나라, 당나라, 명나라 등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숙청이 없었던 서진팔왕의 난이 일어났다!
  26. 장량의 선배라고 볼 수 있는 모사도 없진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구천의 모사였던 범려. 이 두사람의 특징을 보자면 장량은 곧바로 '내가 한게 뭐있나염 허허허 떡 안주셔도 됩니다.' 라고 똥꼬를 잘 빨았고, 범려는 구천이 승리하자마자 내는 굿바이하겠다'하고 날라 튀었다. 즉, 공신으로서 '나는 안전해'라고 안심하기보다는 자기 신변 관리도 나름 철저히 했다는 것.이 와중에 욕심 안부리고 은둔했다가 돌아와 달라는 불타는 러브콜과 함께 타죽은 공신인 개자추만 안습
  27. 고우영 화백의 유비-유방은 거의 모양이 같다. 이들은 고화백 본인을 모델로 했다 카더라
  28. 물론 이건 고우영 화백의 착각,한나라 출신의 한왕 신이라는 인물이 따로 있다. 한신은 초나라 사람
  29. 실제 초상화와 대단히 비슷하게 생겼다.
  30. 다수의 인원과 동시에 대국해서 이길 정도의 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