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데이빗슨 록펠러에서 넘어옴)

1 개요

200px-John_D._Rockefeller_1885.jpg
John Davison Rockefeller (1839년 7월 8일 ~ 1937년 5월 23일). 미국의 사업가.

석유왕

부정할 수 없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 중 한 명. 1937년도의 재산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3360억 달러로, 당시 미국 경제의 1.5% 이상을 차지했다. 단위가 원이 아니다. 달러다!! [1] 역사상 역대 부자 순위중 1위[2]. 그 유명한 빌 게이츠는 이것의 1/4수준이다. 말콤 글라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도 역대 부자 순위 1위에 당당히 올라있다. 앤드루 카네기가 2등이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자산은 1429억 달러로 전체 15위다! 빌 게이츠가 37위.[3] 이를 보면 재산이 어마어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 97세 10개월로 장수까지 했다. 인간으로서 거의 모든 축복을 받은셈 심지어 자수성가해서 30대의 젊은 나이에 미국 석유의 90%대를 독점했었다

한국에서는 이사람이 일본을 통해서 소개돼서 그랬는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록펠러'로 표기하고 있지만, 가운데에 e가 묵음이 아니어서, '로커펠러'[4]로 적어야 한다. 외래어 표기법에선 '맥아더'나 '대처'처럼 예외로 인정하였다. 문제는 그의 자손들도...

사업적으로 무자비하고 경쟁자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박살내었던 걸로 유명하다. 허나, 갤런당 30센트 하던 석유 가격을 갤런당 6센트, 1/5로 줄여버리고 독점하고 있는 동안 이 가격을 절대 올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5] 또한, 노예 해방과 같은 일에 아내가 종사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모르는척 해주고 은근히 도우는 등의 인도적인 모습 또한 보였다.[6]

석유왕 록펠러의 후손은 조상만큼 수완이 뛰어나진 못했어도,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후손은 3조원을 보유하여 세계부자 500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4세대로 교체된 가문 사람들 전체를 통틀어 20조 원 가량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니 정말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망한 게 절대 아니다.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록펠러재단으로 간접 상속시켰다.[7] 그래서 가문의 부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20조원은 가문 사람들의 순수한 개인 재산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꾸준한 기부 활동의 결과로 록펠러 재단의 자산은 2013년 3월 기준으로 41억 달러에 불과하여, 미국 15위의 재단에 랭크되어 있다.

2 록펠러의 삶과 사업

2.1 유소년기

1839년 7월 8일에 태어난 록펠러는 그의 전기에서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했다. "나처럼 전혀 가진 것 없이 시작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고아는 아니잖니

그 자신의 기적같은 성공을 더욱 포장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선택이었겠지만, 실제로 그의 집안은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았다.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당시의 평균적인 생활상과 비교해 보았을때, 록펠러의 유년시절은 경제적으로는 꽤나 괜찮은 수준이었다.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의사를 사칭하며 이상한 약장사까지 한 사기꾼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집을 오랫동안 비우는 행동이 잦은 사람이었다. 이 아버지란 인간은 본처가 살아있을 때도 가정부랑 바람을 펴서 사생아를 두명씩이나 뒀고, 본처가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아이들을 버리고[8] 가명을 쓰고 캐나다로 도주해 젊은 여자랑 재혼해서 오랫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기꾼겸 장사치라서 애들한테 장사 수완등의 교육은 아주 잘 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집안은 아버지의 부재하에도 여러 부업을 하며 좋은 장사 수완으로 중산층 정도의 생활은 했다.[9]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투신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작은 기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뭔가 큰 규모를 갖춘 업체에만 관심이 있었다" 라는 비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디딤돌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휴잇 & 터틀사의 경리직원으로 채용된다. 록펠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다. 이 당시, 심지어 대통령도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중퇴했고, 부통령은 장가가기 전까지는 문맹이었으니 고졸만 해도....[10]

2.2 창업, 그리고 석유왕이 되다.

1858년 연봉협상에 회사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대뜸 사업 파트너를 구해 자신들의 사업을 꾸려나기기로 하는데, 이 당시 회사를 만들기 위한 자본금이 부족했던 그는, 은행에서 닥치는대로 엄청난 돈을 빌려서 큰 자본금을 만들어 사업에 투자하고, 이득이 나면 돈을 갚는 것보다는 재투자로 돌려서 더 큰 이득이 나온 다음에야 갚는 방식을 이용했다. 한마디로 수익률이 이자율보다 한참 높아야 가능한 무모한 짓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업은 성공했고, 꽤나 준수한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이후에 닥친 남북전쟁의 바람을 타고 록펠러는 빠르게 사업을 확장한다.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록펠러의 삶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최초의 유전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The Oil King Rises 그 당시 석유는 별로 가치가 없었던 물건이었으나, 곧 연료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결과적으로 그 유전지대는 꽤나 번성하게 된다.[11]

당시 록펠러가 살던 클리블랜드는 중동 못지 않는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었다. 다만 클리블랜드 자체는 5만 정도에 소도시였는데, 당시 철도업계에 1인자인 밴더빌트가[12] 석유 운송을 장악할 요량으로 클리블랜드에 진출한다. 이는 록펠러에게 둘 도 없는 기회가 된다. 일단 석유를 생산하면 옮겨야 하는데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을 만나게 만나게 된 것 이다. 다큐멘터리 미국을 일으킨 거인들에 의하면 밴더빌트를 만나러 가는날 가는길에 마차가 고장나서 아침 기차를 놓쳤고 그 기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생기자 이를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이후의 사업에서 무자비한 행보를 이어가게 되었다고 한다.[13]

유전이 발견된 초기에 록펠러는 이쪽 관련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어느 순간 '이거다!' 라는 느낌을 받고 정유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석유업계에 발을 딛기 시작할 무렵, 록펠러는 동업자였던 모리스 클라크외에, 새뮤얼 앤드류스를 끌여들여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록펠러는 사업 확장에 별 뜻을 보이지 않는 동업자인 클라크를 못견뎌했고, 결국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기업을 사기로 결정한다. 이때의 일화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는데,

경매는 1865년 2월 2일에 열렸고, 록펠러는 앤드류스와 손을 잡고 클라크에게 맞섰다. 클라크가 500달러부터 입찰을 시작하자, 록펠러가 바로 1000달러를 불렀다. 가격은 계속 올라가서 4만,5만,6만 달러가 되었다.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동안 가격은 어느덧 7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7만 2000달러." 절망적인 목소리로, 모리스 클라크가 말했다.
"7만 2500달러." 록펠러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클라크는 손을 들었다. "이제 이 회사는 자네 것일세."

록펠러 스스로는 말하기를, 이 날이 살아갈 길이 정해진 날이라고 표현했다. 이때부터 록펠러의 인생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놀라운 것은, 당시 불과 26살에 불과했음에도 상기된 7만 달러 이상의 회사 매입자금을 신용 하나로 대출 할 수 있을 정도로 록펠러가 클리브랜드 금융가에서 이미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회사의 부채는 10만 달러가 넘어갔지만, 록펠러의 주장대로 당시는 긴축이 아니라 확장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고, 당해 연간 수입은 100만 달러였고 이듬해에는 200만 달러로 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록펠러는 자기의 회사가 얼마만큼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없었다. 비단 록펠러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이 일했던 그 누구도 몰랐다. 그리고 이때 상당히 운이 좋았는데, 바로 존 록펠러 바로 아래 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형을 보고 자신도 뉴욕에서 석유 사업을 하며 꽤 규모를 키운 뒤에 형의 회사에 인수되는 방식으로 합병을 해준 것이었다. 윌리엄 록펠러는 이외에도 여러 사업을 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서 그것을 스탠더드 오일에 투자하는 든든한 자금줄이 된다[14].

서서히 그의 사업이 확장되는 와중에, 록펠러는 그가 처음으로 여론의 비난을 받을 여지를 제공한 악명높은 방식을 개발해 내는데, 리베이트 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비단 정유업뿐만 아니라 철도운송에도 손아귀를 뻗치기 시작한다. 록펠러의 회사의 거대함으로 인해, 록펠러는 철도업계에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록펠러는 리베이트 계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친 스탠더드 오일을 창설했다.[15][16]

1880년대 들어서 전세계 원유 공급의 80%가량이 스탠더드 오일이 공급하고 있었고, 이를 본 다른 국가에서도 산유지를 찾아 원유를 채굴하기 시작한다. 즉 석유의 시대가 열렸다. 록펠러는 43세에 미국에서 최고부자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미국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으로 사업을 옮기며 입성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뉴욕 재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그는 철강 산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며 철강 사업에도 손을 댔는데, 그쪽에는 본좌인 카네기가 버티고 있었고 둘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다 아쉬울게 없는 록펠러 쪽에서 철강 산업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면서 스탠더드 오일측에서 보유하고 있던 대광산 채굴권을 "적절한 조건과 대우"를 받고 넘김으로서 록펠러측에서는 귀찮은 경쟁을 피히고 카네기는 독점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본업인 석유 사업은 꾸준히 성장하여 53세에 확고한 위치를[17]다진다.

2.3 성공의 비밀 : 착취, 비리, 독과점.

그러나 이와 같은 록펠러의 성공은 약소기업들을 잇달아 도산으로 내몰고[18] 더군다나 막대하게 돈을 버는데도 직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고, 봉급도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원들이 항의하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나마 당시 노조 자체가 인정 받지 못 하던 시기라 그리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하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자면 비난을 피하긴 어렵다.

1904년 이다 타벨이라는 여기자가 상당히 고된 취재과정 끝에 스탠더드 오일의 부정한 모습을 다 폭로했다.[19] 이 때문에 비판적인 여론이 일어나자, 록펠러는 아차 싶었는지 겉으로는 "그 여기자따위는 상관도 안 한다"라고 태연한 척하며, 몰래 이다 타벨을 불러 회유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기부와 사회환원활동의 액수도 수십배를 늘리며 여론을 무마하려고 한다.[20] 그러나 록펠러의 바람과는 달리, 독점 기업을 처단하기 위해 칼을 갈며 기다리던 시어도어 루즈벨트반독점법에 제대로 걸려 넘어졌다.

이후에 스탠더드 오일 사의 미국의 주마다 있는 지점을 쪼개 새로운 법인을 만들고, 규제가 강한 뉴욕주보다, 맨하탄에서 가깝고 규제도 상대적으로 약한 뉴저지주의 스탠더드 오일사를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어떻게든 유지[21]를 해보려고 했으나, 1911년 결국 스탠더드 오일은 최고재판소의 독점금지법으로 인해 해산 명령을 받게 되며 33개의 회사로 분리된다.[22] [23]

이때 지주회사인 뉴저지주 스탠더드 오일사(Esso : 스탠다드 오일 (SO) 오브 뉴저지)가 지금 석유회사의 본좌인 엑슨, 뉴욕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ony : 스탠다드 오일 오브 뉴욕)가 모빌,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더드 오일사(Socal : 스탠다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가 셰브론이다. 이렇게 쪼개버린 덕에 유럽계 석유회사들은 쾌재를 부르게 되었고, 쪼개진 스탠더드 오일사의 일부를 인수하기도 했다.[24]

1914년에는 월급을 올려달라는 광부들의 파업 현장에 총질을 해서 25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다치는 루드로 대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이 미 연방군을 파견해 이를 해결하려 했으나, 이때 7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25]

루드로 대학살 위령비

3 시한부 선고와 개과천선

이후 55세에 록펠러는 스트레스성 소화불량 및 우울증 증상을 보였는데 그동안 돈을 모으는데 몰입하여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26] 이 때, 록펠러는 프레드릭 테일러 게이츠라는 교회 목사에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지요.' 라는 말을 듣고,[27] 남은 1년 동안, 모은 재산을 의미 있게 쓰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가는 곳마다 고아원을 세우고, 도서관을 세우고, 연약한 자를 돕는 일을 하게 된다.

그후 청교도로서의 숙원대로[28] 자선사업들을 지원해주었고 이후 장수를 누리다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기업과 재산은 그의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에게 물려주었고[29] 그의 가문은 미국의 부유한 정치 유력가로 거듭나게 된다[30]. 뉴욕 주지사를 4선을 달리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 부통령이 된 손자 넬슨 록펠러가 대표적. 현재 록펠러 가문의 당주는 1915년생인 데이빗 록펠러이다.

4 음모론

유대인 배후자본설 관련 음모론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엮이고 마치 그가 유대인인것처럼 나오는데, 존 록펠러는 유대인을 싫어했다. 록펠러 가문은 일단 독일계 미국인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고, 그것도 종파가 엄격한 남침례교라 평생 술도 마시지 않았다. 카네기가 록펠러를 놀릴때 일부러 술병을 선물했을 정도. 유대인은 수천년 간에 걸쳐 혼혈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인종이나 혈통은 의미가 없으며 풍습과 유대교로 유대인의 여부를 가린다. 그러니 록펠러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음모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당시에 흔하고 사회적으로도 용납되던 반유태주의를 가지고 있었다[31]. 로스차일드 가문과 비슷한 점이라면 아마 엄청난 부자라는 것과 존 록펠러와 로스차일드의 조상이 같은 독일 출신이라는 것밖에 없다. 근데 그렇게 엮을려면 미국 백인중에 40%가 넘는 사람들도 독일계[32]이므로 로스차일드 가문과 엮여야 한다.

그외에도 가장 설득력있는 음모론 중에 아직 록펠러 집안이 엑슨-모빌과 셰브론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석유업계를 지배하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홀라당 넘겨줬을 리도 없으니,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이와 비슷한 음모론이 로스차일드 가문과 모건 가문과도 관련해서 있다. 그쪽은 둘다 아직 세계 금융은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모건 가문이 지배한다는 내용이고, 역시나 심증이야 충분히 있지만 물증은 없다. 단 이는 적어도 50년 전 이야기.[33] 직접 감 내놔라 대추 내놔라 할 수도 없는 마당에 실권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장악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1. 원으로 환산하면 395조 8,720억 원. 당시 미국의 국부의 약 5%를 이 사람 혼자 차지했다.
  2. 참고로 역사상 역대 부자 순위 1위는 아프리카의 황금왕 만사 무사라는것이 정설
  3. 3360억달러가 실감이 안 간다면 쉽게 생각해 베네수엘라 국가의 1년 국민 총생산보다도 좀 더 많은 액수를 개인이 가졌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참고로 베네수엘라는 경제규모 35위의 나름대로 중상위는 가는 나라다.
  4. 실제 영어를 쓰는 원어민들이 읽는 발음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앞부분을 더 정확히 말하면 '롸크'에 가까운데 적어도 'ㄱ'받침 발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록펠러보다는 로커펠러가 원래 발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 실제로 이 양반이 석유 값을 떨어트린 덕분에 석유를 기초로 한 사업들의 대발달이 있었다. 석유값 증가는 1973년 1차 석유 파동을 시작해서 증가 한 것이다. 대기업의 가격혁신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절실히 알려주는 사례.
  6. 사업가로서의 록펠러와 개인으로서의 록펠러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는 독실한 침례교인이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처음 취직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수입의 일부를 꾸준하게 기부해 왔던 기록이 남아있다. 록펠러가 석유 가격을 폭락시키고 영구 동결한 이유 역시 대중을 위한 이윤의 사회 환원과 무관하지 않다.
  7. 록펠러재단의 1975년도 기금은 당시 금액으로 약 300억달러 (현재 한화 가치로 약 373조원)에 이른다.
  8. 1856년이었으니 장녀만이 성인이었고, 그나마 존 록펠러와 바로 손아랫동생인 윌리엄 록펠러가 17세와 15세로 그나마 장성한 청소년이었다.
  9. 미국 다큐에서는 어렸을 때 가정살림을 위해 사탕을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소개 되었다.
  10. 단, 링컨처럼 나중에라도 배운 사람들이 꽤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정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도 은근 있기는 했다.
  11. 단순 석유 자체는 큰 의미가 없었고, 과학자들이 석유에서 등유를 정제할 수 있게 된다. 등유는 전기 없던 시절 밤을 밝혀주는 유일한 물건이었기에 수요는 대단했다.
  12. 밴더빌트 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철도왕
  13. [1] 참조
  14. 참고로 윌리엄은 사기나 여러 편법에 굉장히 능해서 비도덕적인 꼼수로도 돈을 엄청 벌었다. 1890년대에 유령회사를 이용해서 4천만불이나 되는 돈을 꽁으로 얻은 사건도 있었다. 어찌보면 난형난제.
  15. 좋은 협력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미국 철도업계를 장악한 코넬리어스 밴더빌트라는 재벌이다. 그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해운업을 그리고 철도와 기차를 보고는 곧바로 전재산을 쏟아부어 뉴욕으로 통하는 철로를 장악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약 절반에 가까운 철도를 장악한다. 즉 미국의 운송업계의 큰손인 셈이다. 그는 곧바로 석유가 미국 전역으로 쓰일 것을 간파하고 당시 이름 있는 록펠러와 손을 잡게 된다. 당시 록펠러에게는 둘도 없는 우군을 얻게 된다. 이 내용은 the men who built america 1화의 나온다. 그리고 이는 밴더빌트의 탁월한 선택인 동시에 몰락을 이끈다.
  16. 록펠러는 훗날 밴더빌트의 라이벌인 톰 스콧이라는 철도업계 대부와 손을 잡는다. 당연히 이의 격분한 밴더빌트는 톰 스콧과 연합해 록펠러에 등유를 받아주지 않는다. 운송을 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하자, 록펠러는 송유관을 길게 하는 방식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톰 스콧은 망한다. 철도는 이미 과잉 공급 되어 있는 상태라 석유 운송 비용으로 이득을 내고 있었는데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톰 스콧은 강철왕 카네기의 스승 같은 사람이라 한다.
  17. 당시 기부 사업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이대로 축재를 내버려 두다간 회장님이 본인의 돈에 깔려 죽을 수 있다고까지 경고할 정도로
  18. 약소기업이라 흔히 알려져 있지만 록펠러가 스탠다드 오일을 창립하는 과정은 거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잇달아 집어 삼키면서 끝간데 없이 성장하는 그림과는 꽤나 다르다. 록펠러의 경쟁상대는 그야말로 경쟁상대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굵직굵직한 정유회사들이었으며, 실제로 록펠러도 기업간 전쟁에서 꽤나 큰 타격을 여러번 입었다.
  19.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다 타벨의 아버지는 석유업계에 있다가 록펠러가 부상하면서 사업을 접은 사람이다. 또한 폭로된 내용의 일부는 객관적이지 못했지만, 당시 독점에 적대적이던 사회분위기상 이 부분에 대해 큰 이의가 제기되지는 않았다.
  20. 록펠러 센터 건립과 록펠러 재단의 설립의 시기가 용케 맞물려서 이렇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잦으나, 록펠러 재단은 일종의 숙원사업이었고, 주정부와의 오랜 줄다리기 끝에 겨우겨우 성사된 중요 프로젝트였다. 록펠러의 기부나 사회환원활동은 시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꾸준했다.
  21. 이전에는 발악을 했다고 쓰여 있었는데, 사실 록펠러는 이미 자신의 사업가로서의 숙원을 이루었고 회사에 큰 미련이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뭘 어쩌든 상관없이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22. 하지만 이 해체 결정은 묘한 여운을 남기는데, 이렇게 분리된 스탠다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조적으로 국정회의에서 "요즘 월가에서는 '자비로운 하나님, 제발 한번만 더 해체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를 한다는군."이라고 언급하게 된다.
  23. 심지어 록펠러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산될 때 쯤 같이 골프 치던 친한 목사님에게 돈 벌고 싶으면 스탠더드 오일 주식을 사두라고 말 했다.
  24. 해산되기 전 스탠더드 오일은 거진 전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을 장악한 이후 유럽의 로스트차일드와 러시아의 노벨브라더스(알프레드 노벨가족이 운영한 석유회사다.)와 경쟁했고, 결국 승리했다. 록펠러 시대의 스탠더드 오일은 역사에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없을 굴지의 기업 제국이었다
  25. 사건 당시 록펠러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고, 사건 책임과 사후처리 모두 아들인 록펠러 주니어의 몫이었다.
  26. 다만 록펠러 본인은 50대 들어서 동생들과 아들한테 사업을 넘기고 그냥 가진 돈 가지고 편하게 살고 싶어했다.
  27. 대중들을 위한 기초 교육과 기초 의료 시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설명해주었고 이는 나중에 그의 기부를 시작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28.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라는 잘못된 속설이 있는데, 록펠러는 사업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미 꾸준히 기부 등 자선사업에 매진해 왔으며 대중적인 평판 또한 괜찮은 편이었다. 그리고 은퇴 이후 평온한 삶은 록펠러가 평생동안 품고 있던 숙원이었다.
  29. 그의 가문은 상속세때문에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관련 법안의 입안 논의가 늦어졌더라면 상속이 늦어졌을 거라는 예측은 있지만 실제로 당시 상속법은 굉장히 느슨했기 때문에 록펠러 2대째가 가문의 힘을 이어받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30. 유력 정치가문과의 결혼한 덕이 컸다. 록펠러의 사돈집안은 당시 유명한 상원의원이었다.
  31. 미국은 현재까지도 굉장히 기독교적 사상이 근본이 되는 나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많은 미국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를 들어 싫어했다. 당연하게도 홀로코스트 이후로는 금기가 되었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만행으로 인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32. 저 40%도 그나마 최소 추산이다. 실제로는 60% 정도로 추산될 정도로 미국 백인들 중에 독일계의 숫자는 영국계나 아일랜드계의 비율을 압도한다.
  33. 50년 전에는 실제로 록펠러 가문의 힘이 최전성기에 달했을 시절이다. 이 당시에는 음모론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손대는 기업마다 알짜기업으로 성장시키고 미국의 동아시아권 진출의 첨병역할 또한 수행했으며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맨해튼 금융가의 실권자로 군림하는 등 그 힘을 미국 내외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