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어

한국어사투리
북부육진 방언동북 방언서북 방언
중부황해 방언서울 방언경기 방언영동 방언
남부충청 방언동남 방언서남 방언제주 방언
해외중앙아시아 한국어중국 조선어재일 한국어미주 한인어

1 개요

2012년 11월 29일, 습근평총서기는 국가박물관에서 “부흥의 길”전람회를 참관했을때 “중국꿈”에 대해 의미깊게 상세하게 해석했으며 억만 중화아들딸들이 한결같이 뭉쳐 용왕매진하는 방대한 힘을 모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2년 11월 29일, 시진핑 주석은 국가박물관에서 "부흥의 길" 전람회에 참석 중 "중국몽"에 대해 의미깊고 상세하게 설명했으며, 억만에 이르는 중화의 자녀들이 하나로 뭉쳐 용왕매진하는 방대한 역량을 모아야 한다고 전했다.
-중국꿈의 인도하에 활기차게 앞으로 전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 실현 제기 3주년에 즈음하여의 표준어 해석

중국재중동포가 사용하는 말, 혹은 한국계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국어의 방언. 북한문화어와 문법이 비슷한데, 이는 당시 중국대한민국 간 교류가 없어서 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가 중국 조선어의 표준을 문화어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출신지가 다양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사투리가 섞여있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헤이룽장 성에서는 동북 방언이 사용되는데 이는 해당 지역이 함경도와 가깝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랴오닝 성에서는 평안도서북 방언이 많이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마을 단위로 올라온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에 의해 충청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도 사용된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말투가 다른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중국한국이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이 많아지고 또 중국에서 한국으로 진출 혹은 이주하는 재중동포들이 늘어나면서 대한민국 표준어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했다. 일부 재중동포가 사용하는 말이 한국 표준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도 있고, 한국어와 중국 조선어를 2개국어처럼 사용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2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지린 성옌볜 조선족 자치주가 설치되었고, 저우언라이가 "중국의 조선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문화어를 표준어로 한다"는 조치로 북한문화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에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문헌자료들과 문화유산들이 사라졌는데 연변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서 주덕해 연변자치주 주장이 실각되어서[1] 후베이 성으로 끌려갔던 판인지라 당연히 많은 조선어 서적과 사진, 문화자료들도 대거 소실되거나 사라졌다. 당시 조선어로 된 책들 중 마오주의에 관련이 없거나, 한복 사진이 나오거나, 한글로 적은 편지가 나오기만 해도 조선 특무(간첩), 남조선 특무, 지방민족주의자로 몰려서 처벌받거나 조리돌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출처: 연변 문화대혁명, 10년의 약속.)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는 이전에 사라졌던 책들이 다시 발간되는 등 조선어 서적의 발행량이 크게 늘기도 했다. 한편으로 북한의 경제가 막장이 되어 가고,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남한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3 문법

어휘에선 북한문화어에 영향을 받아서 두음법칙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띄어쓰기도 문화어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사뭇 다른 정황이다.중국내 조선족교과서나 출판물은 아직 문화어를 지키고 있으나,한국과의 접촉이 잦아 지면서 일부 조선족사이에서는 두음법칙을 사용하고 한국식 띄어쓰기로 하거나 한다(캐톡얘기 보면 잘 알지).말과 글이 서로 다른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할수 있다.

평소 구두에서는 중국어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전화를 걸다'를 중국어 打电话에서 유래된 '전화를 치다'하는 형태로 쓴다. 또한 조선족 자치주라고 해도 한족의 비율이 높고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어를 모르면 안 되기에 평소 언어 사용에 상당량의 중국어를 섞어 사용한다. 사실 연변에 간 한국인들이 연변 말을 알아듣기 힘든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어를 섞어 사용하는 부분만 아니라면 억양이 다르긴 해도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절대 중국어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중국어와 조선어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말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Anyway, 지난번에 XXX......" "오늘 정말 Nice to meet you입니다" 하는 식으로 외래어가 아닌 아예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사용하는 것처럼 연변 조선어도 "너 오늘 언제 上班(출근) 하니?" 이런 식으로 섞어 사용한다. 특히 전화번호를 말해줄 때에는 절대 138-04XX-XXXX를 일삼팔 공사 XX XXXX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三八 零四 XX XXXX 이런 식으로 말한다. 긴 시간 동안 동화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중국어로 么 중국어로 1은 보통 一로 알려져 있지만 숫자를 셀 때에 么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한다. 사실은 군사용어로 중국인 사이에서도 방언이 너무 심해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들 지경이라 오해가 생기지 않게 12790만은 고쳐 발음한다. 1(yao1), 2(liang3), 7(guai3), 9(gou1), 0(dong4)

일본어도 예외가 아니라서 곳곳에서 일본어의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애당초 이주를 했다고 했지만 얼마 안 지나 일본이 만주를 침공했고 똑같이 일본어만 사용할 것을 명했기 때문.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컵→コップ 또는 カップ→고뿌
접시→皿(さら)→사라
물통, 버킷→バケツ→바게쓰

등등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90년대부터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남한 표준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특히 연변 쪽 조선어 TV와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의 발음과 표현이 상당히 한국화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90년대 이후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어휘 면에서 영향을 많이 받고, 한국에 많이 취업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 표준어를 접하게 되었고, 조선문 책의 발행량도 수익성 문제로 적어지는 바람에 한국서적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반 조선족 사회에서 중국의 대도시나 한국, 일본, 미국 등지로 나가게 되었고 한국 방송을 접하다 보니 점차적으로 한국식 발음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한국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다. 음악은 중국 음악보다 한국 음악을 더 많이 듣고, TV로도 중국 채널이 아니라 위성방송을 통해 한국 채널을 시청하고, 서적도 이젠 거의 한국 서적만 이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근처의 만화책, 소설책을 대여해주는 가게에 가보면 온통 한국만화와 소설들로 꽉 차있다.[2] 중국어로 된 서적은 그냥 무협소설 조금 정도가 전부다.

한국과 잦아진 교류로 조선족들의 의식 변화도 한몫한다. 사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연변에서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이 한국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욕을 많이 해댔다. 왜 조선어를 놔두고 한국어를 쓰냐고.

하지만 이젠 조선족들이 상당수가 중국 대도시와 외국으로 빠져나가 얼마 남아 있지도 않기에 오히려 조선어를 잘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추세이다. 되려 조선어를 사용하면 그래가지고 어떻게 중국 대도시나 한국에 가서 취업하려고 그러냐 하는 식으로 핀잔을 준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어딘가 씁쓸함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4 관련 문서

5 방언 적용 버전

#!wiki style="border:1px solid gray;border-top:5px solid #2E8B57;padding:6px 10px 10px"
{{{#!wiki style="margin-bottom: 8px;"
}}}{{{#!wiki style="margin-top: -4px; margin-right:10px; margin-left:0px;"
이 문단은 {{{#!html <a href="https://namu.wiki/topic/@토론번호@">이 토론</a>}}}에서 @합의사항@(으)로 합의되었습니다.
추가 토론 없이 수정할 경우 문서 훼손으로 간주되어 차단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틀:토론 합의/설명문서}}

이 문단은 나무위키의 불문률에 따라 중국조선어문법으로 작성되였다.
2012년 11월 29일, 습근평총서기는 국가박물관에서 “부흥의 길”전람회를 참관했을때 “중국꿈”에 대해 의미깊게 상세하게 해석했으며 억만 중화아들딸들이 한결같이 뭉쳐 용왕매진하는 방대한 힘을 모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꿈의 인도하에 활기차게 앞으로 전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 실현 제기 3주년에 즈음하여

나무위키, 여러분이 가꾸어 나가는 지식의 나무.

중국조선어는 중국 조선족이 사용하는 우리말이다. 조선문화어와 비슷하게 보일수 있는데 이는 랭전시기 중국한국사이의 교류가 전무했던 배경하에 전 국무원총리였던 주은래가 같은 사회주의국가인만큼 조선의 조선어를 중국조선어의 표준으로 삼은 결과에 있다.

조선반도에서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출생지가 서로 다른 관계로 조선어의 각종 방언이 혼합되여 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흑룡강성 남부에서는 조선 함경도방언이 사용되는데, 이는 조선반도의 일제강점기 당시 함경도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결과다. 비슷한 경위로 료녕성조선족사이들사이에서 쓰이는 말은 조선 평안도에서 쓰이는 방언과 가깝다. 한편 남선쪽(한국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 집단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에 의해 해당 지역의 방언도 사용된다. 때문에 같은 지구내에서도 지역과 지역,동네와 동네로 말씨가 다른 경우가 많다.

중국한국이 국교정상화를 이룩한 뒤,중국으로 진출한 한국인들이 많아지고 또한 중국에서 한국으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늘어나면서 현대한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했다. 일부 조선족이 사용하는 조선어는 한국표준어와 별반 차이나지 않으며, 한국어와 중국조선어를 두개 국어처럼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 위키니트들에 대하여 중국조선어문법에 맞게 수정할 것을 요청한다.
  1. 1930년대부터 공산당원이었고 연변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이 공적들이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다 소용이 없었다. 주덕해 주장은 후베이 성에서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다가 폐암에 걸려서 1972년 우한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2. 심지어 발매일조차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나온 신간 만화책이 약 3~5일 정도면 연변의 만화책방에 다 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