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경

1 북송의 대신 채경蔡京

자는 원장 元長. 복건성 복주 출신이다.

송사의 <간신전>에 기록되어있으며, 일반 간신이 아닌 요마의 취급을 받았다. 사실 망국시대 마지막 권신이니 어떻게 욕을 먹어도 할말이 없다..

소림사를 비롯, 지금까지도 돌에 새긴 그의 글씨가 남아있을 정도로 소식, 미불(米芾), 황정견(黄庭堅)과 함께 북송 사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1] 미술품에 대한 안목이 정확하였다. 그럼 뭐해

그는 관료 초년생부터 임기응변과 지모로 널리 알려졌는데, 양주의 장관으로 있을때, 8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지나가던 고관이 방문하여 손님수가 40명으로 늘어났다. 시간은 다 되었고 요리 수는 모자란데도 불구하고, 채경은 40인분의 요리를 거뜬히 내놓았다. 채경은 이렇듯 '어떻게든 해내는것'으로 유명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종이 붕어하고 법이 180도 바뀌자 개봉부 지사였던 채경 역시 모든 제도를 바꿔놓고 기존의 자신의 입장을 정반대로 취하여 재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송휘종후궁 유씨와의 인연으로 재상감으로는 채경이 적당하다는 말을 흘려넣도록 시키고 역시 간신인 재상 증포가 휘종에게 건의, 채경은 대명부지사->한림학사->부재상->재상 의 위치에 오르면서 증포마저 축출하고 119명의 정적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휘종의 비호아래 돌에 그 이름을 새겨 전국에 세워놓고 탄압을 가하였다.

몇년후, 채경은 모든 이에게 화합을 목적으로 하는 의견을 쓰라고 명하고 그 글을 꼬투리 잡아 200명의 인물을 리스트에 더 추가시켰다. 도합 319명의 명단이 전국 300여 부.주에 배포되었다.

1년이 지난 숭년 5월 정월, 길다란 혜성이 서쪽하늘에 출현하였고 사람들은 319명의 이름이 새겨진 석비 탓이라고 생각했다.

휘종은 환관을 시켜 밤에 석비를 부수고 동시에 전국의 석비를 파괴하라는 명을 내렸다.
채경은 반발했지만 혜성의 출현으로 뒤숭숭한 때라 참을수 밖에 없었다. (현재는 광서성 바위산 속에 두 개의 석비만이 남아있다.)

민심이 동요되자 부재상 유정지와 어사 유규 등이 휘종에게 채경의 정책을 탓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기울은 휘종은 채경을 불러 넌지시 말을 꺼내지만 "지금까지의 정책은 부군인 선종의 유지를 받들은 것이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대연기를 펼쳐 휘종은 과연 그런가하고 생각해버렸다. 어쨌든 채경은 일단 숭녕 5년 2월(1106년) 일단 재상직에서 물러난다. 뒤를 이은 유정지가 역부족임을 알고 었던는 채경은 수도에 남아있다가 다음해 정월 다시 재상직에 오른다.

채경은 왕안석부터 내려온 신법당 소속이었다. 차, 소금 전매증서와 화폐개혁 등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불렸고(당시 발행된 '숭녕통보'에는 채경의 친필 동전이 있다) 학교 제도를 통해 자신의 수족이 될 인간들을 양성하였다.

한번은 그가 물의 고장 소주(쑤저우)를 방문했을때 약방을 경영하여 갑부가 된 주충과 그의 아들 주면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화석강'을 조달하여 백성을 괴롭히게 되는 장본인들이다.

채경은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면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첫 숭녕 5년 말고도 3년 후인 대관 3년(1109), 선화 2년(1120) 등 몇차례 물러났지만 여론이 잠잠해지면 다시 복귀하였다. 세번째로 재상직에 올랐을때는 개봉성 안의 서쪽에 광대한 저택을 지었는데 궁전과도 같은 모습을 하였으며 3일에 한번만 출근하고 , 후엔 5일에 한번만 출근했다.

그러나 채경은 후손들을 잘 얻지 못했다. 아버지의 덕으로 고관이 된 자식들은 서로 집권다툼을 해댔고, 심지어 손자들에게 "쌀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느냐"하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는 손자는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아들 채유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고관이 되었지만 고생을 해본적이 없는지라 잔소리만 하는 아버지를 싫어하여 동관, 왕보와 함께 북방정벌을 휘종에게 부추겼다. 채유와 왕보는 얼굴과 신체에 붉고 푸른 화장을 하고 외설스러운 말과 도교의 비밀유희를 연출하며 휘종을 농락하였다. 특히 채유는 알몸으로 정원의 큰 나무에 올라가 매미흉내를 내다가 황후로부터 지적받기도 했다. 이게 무슨 천하의 개쌍놈들인가

휘종의 사치와 정국혼란이 정점에 달할 무렵, 나이 70을 바라보는 채경은 머리회전이 둔해져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권력구조의 결함을 인정하지 않을수 가 없었다. 정말로 유능한 인재는 다 배척하는 바람에 중대한 일에 쳐했을때 도움이 될 인간이 없었다.

금나라의 군대가 다가오자 요나라천조제는 산서성으로 도망치고 금의 태조 완안아골타는 송으로 눈을 돌렸다. 채경은 이때 이미 손쓸 방도가 없음을 느끼고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금의 침공으로 나라가 쓰러질 정도가 되자 휘종은 아들 송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유생인 진동 등의 6적론(6적:채경,양사성,이방언,왕보,동관,주면)에 따라 6명 모두 수도에서 추방되었다. 강남으로 유배된 채경의 자손 33명 가운데 채유와 채조는 참수되었고 80세를 맞이한 채경만은 한때 해남도에 유배되었다가 호남장사에서 병사하였다.

희대의 서예가인 동시에 불세출의 간신배이기에 서예와 인격수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수호지에서는 4간신 중 한명으로 나온다. 악역의 필두는 아니나, 자신의 아들인 채구지부를 물산이 풍부한 강주지부로 보내 재산을 늘리는 등의 부패한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인물과 마찬가지로 필체에 능숙했다는 설정도 있다. 수호후전에서는 물론 동관, 고구와 함께 양산박 호걸들의 손에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2 일지화(一枝花) 채경(蔡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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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에 등장하는 인물로 북경 감옥의 압옥. 채복의 동생이다. 참수할 처형수들에게 줄 꽃을 항상 머리에 한 송이 꽂고 다녀서 일지화(한가닥의 꽃) 채경이라고 불린다. 형과 함께 노준의를 살려 양산박에 들어갔으며 역시 처형을 담당했다. 지손성을 상징하는 호걸.

여담으로 수호전 천도 108성에선 시나리오1에서의 상기 동명이인의 능력치데이터가 서로 바뀌어 나온다. 그래서 공부하곤 하등 상관없는 망나니가 높은 지력과 학사레벨을 보유하고 있다. 반대로 간신 채경의 경우는 망나니의 능력치를 가져 모든 능력치가 바닥을 기고 건달레벨을 가진 잉여가 되고 말았다. 타 시나리오에선 정상적으로 나온다.

3 호접몽전의 등장인물

위원회의 지살성 멤버. 망탕산에서 여방 부대에 속해 있었는데 조조의 계략으로 당하자 전사했다고 언급으로만 나온다.
  1. 채경 대신 할아버지인 채양(蔡襄)을 꼽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