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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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흠종(欽宗) | |
시호 | 공문순덕인효황제(恭文順德仁孝皇帝) | |
연호 | 정강(靖康, 1126년 ~ 1127년 3월) | |
성 | 조(趙) | |
휘 | 환(桓) | |
생몰기간 | 1100년 5월 23일 ~ 1156년 | |
재위기간 | 1126년 1월 19일 ~ 1127년 1월 9일 |
1 개요
북송의 9대 황제(1100 ~ 1161, 재위기간 1125 ~ 1127) 휘는 환(桓). 시호는 공문순덕인효황제(恭文順德仁孝皇帝).
2 상세
휘종의 적장남[1]으로 사실 본인이 일찍 요절하거나 정변이 일어나서 황제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면 무난히 다음 황제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웬수같으신 아버지께서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사이에서 외교질하다가 금나라 군대가 개봉으로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이 펼쳐지자, 퇴위선언하고 아들에게 양위한 다음 튀어 버렸다.(…)
여튼 아버지가 싸지른 거 뒷정리하기 위해서 이강을 등용하여 금나라 군대를 막게 하고, 그 사이 뒤에서 협상을 통해서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 등의 조건을 제시하여 간신히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덤으로 남쪽으로 튄 아버지를 다시 수도로 모셔왔다.[2] 하지만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개념을 말아먹었는지 주전파 대소신료들이 나서서 "아니되옵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흠종도 그런 의견을 쫓아서 강화조약 자체를 파토내버렸다. 이미 여러 차례 송나라의 배신에 열이 뻗힐대로 뻗힌 금나라는 다급한 송나라의 대응을 무시하고 그대로 공격을 계속하여 1127년 개봉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황제 흠종과 태상황 휘종을 비롯한 황실 일족과 대소신료들을 포로로 잡아 금나라로 압송하였다.(정강의 변) 흠종과 휘종에게는 이것이 송나라 강산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흠종은 죽어서도 영영 송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쨌든 끌려가던 도중 흠종의 황후인 주씨[3]는 외모가 예쁜 편이었는지 금나라 장수가 그녀에게 노래를 부르라 시키고본격 대륙의 노래방 도우미 주씨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지만 금나라 장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오히려 흥겨워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라 재촉했고 그 후에는 아예 술 시중까지 들라고 했지만 주씨는 당연하게 거부. 그리고 금나라 장수 택리는 주씨를 아예 강제로 끌어당기자 주씨는 술 시중을 들기를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분노한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고 흠종은 결국 참다 못하여 분노를 터트렸지만 열받은 택리는 아예 흠종을 죽이려 들었고 이 때 현령이 "폐하는 저 놈 생포해오라 했음. 죽이면 님만 손해임."이라고 택리를 설득하여 흠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주씨는 이 때 당한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결국 몸져 누웠고 흠종은 눈물을 흘리며 치료를 해달라 요청을 했다. 그러나 철저하게 무시당하여 주씨는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 비참한 것은 한 때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은 멍석으로 대충 말아 아무 곳에 묻혀 버렸다.
그리고 금태종은 실컷 맺어놓은 강화조약을 주전파 신료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파토낸 것은 흠종의 정신이 혼미하였기 때문이라면서 중혼후(重昏候)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조롱하였다. 흠종이 휘종과 함께 금나라에서 귀양살이한 곳은 함경북도 회령의 회령청년역근방으로 당시에는 오국성이라고 불린 지역이다. 당연히 오국성과 남송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었기 때문에 탈출하지도 못했다. 이 후 남송의 고종이 나서서 금나라와 협상한 끝에 부모님(송휘종)의 유해와 많은 황실일족, 대소신료들이 살아남은 사람은 송환되고, 죽은 사람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는데, 흠종만큼은 끝까지 언급되지도 않았고 송환절차도 밟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고종은 넌지시 흠종의 송환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금나라 조정에 전달하기까지 했다. 이는 고종은 흠종의 이복동생이자 휘종의 9번째 아들에 불과했고 더구나 서자였다. 반면 흠종은 적자이자 장남이었기 때문에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계승원칙에 따르면 확고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흠종이 돌아오면 고종은 제위를 흠종에게 당연히 양도해야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흠종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문책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고종은 자신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 형을 적국에 방치해둔 것이다. 결국 흠종은 금나라 땅인 오국성에서 30년 가까이 억류당했다가 1161년 숨을 거두고[4]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휘종이 금나라에서 묻혔던 묘는 북한의 고령진역 근처에 있고 흠종의 묘는 두만강 건너에 위치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오국성의 위치를 함경도가 아니라 헤이룽장성 의란현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 얼마 되지 않는 흠종의 자손들은 모두 금의 폭군 해릉왕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의 대는 끊겼다. 매우 안습.
그러나 위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기록들도 있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금희종은 일전에 금태종때 흠종에게 내려진 종혼후라는 모멸적 칭호를 없애고 그 대신에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바꾸어 봉하였으며 흠종에게 녹봉도 주었다고 적혀있다. 죽은 휘종은 혼덕공이라는 칭호를 없애고 천수군왕으로 봉했다.[5] 그리고 희종은 흠종을 너그럽게 대했으며 오국성이 아니라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 회령부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희종의 뒤를 이은 해릉양왕도 수도를 연경[6]으로 옮길때 흠종을 함께 데려갔으며 흠종은 연경으로 이주한지 3년뒤, 연경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인 휘종과 함께 금나라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강의 변 항목 참조.
흠종은 아버지와 달리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치향락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재능이 평범해서 혼란에 처한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사실 아버지가 망쳐놔서 난세의 군주가 되었지, 평화로운 치세에 군주가 되었으면 그럭저럭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다. 금태종의 말마따나 강화조약만 유지했어도 적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일본 만화 슈토헬에서는 금나라 장군 지르구스의 회상 속에서 등장하는데 흔히 알려진것처럼 빈곤하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흠종은 오국성에 감금되어 있지만 진귀한 송나라 황실 물품들을 가지고 생활하는데다가 여진 귀족 소년이었던 지르구스가 말벗을 해주고 있다. 흠종은 이 소년의 스승 역할을 하며 지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억류된 흠종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고 결국 금 조정의 명령을 받은 지르구스에게 살해당한다.
- ↑ 생모는 현공황후(顯恭皇后) 왕씨이다
- ↑ 휘종이 강남으로 튄 이유는 화북이 함락되고 흠종이 죽으면 다시 강남에서 황제를 하려는 속셈도 있었다고 한다. 이걸 눈치챈 흠종이 휘종을 다시 개봉부로 데리고 왔다
- ↑ 시호는 인회황후(仁懷皇后)
- ↑ 야사에 의하면 해릉왕 시대에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고도 한다. 거기서 다 나아가 해릉왕이 요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까지 데려와서 같이 죽였다는데...
죽은지 수십년 지난 천조제를 어떻게 끌고 왔는지는 논외로 치고그러나 병환으로 죽은 게 분명 하다. 금사(金史)에도 흠종이 죽자 금나라측에서 장례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 ↑ 출처 : 송사전 금열전
- ↑ 오늘날의 베이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