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주

譙周
(? ~ 270)

1 개요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는 윤남(允南). 파서군 서충국 출신으로 익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아버지를 자로 부를 경우 초영시의 아들. 참고로 아버지인 초영시의 이름인 '𡸫'은 수많은 한자 중 발음이 알려져 있지 않은 유일한 글자이다.

2 정사

어려서 가난했지만 학문에 힘써서 근처 주군에 그 명성이 높았다 한다. 유비 사후에 중용되어 학문이나 교육과 관련된 직책에 임명되었다. 상당한 영향력과 실적을 지닌 정치가라기 보단 익주 지방의 명사 또는 학자로써, 대체로 저술과 학술 그리고 교육 계열의 일에 종사한 관료라고 할 수 있다. 정사에서 드러나는 조정에서 한 일은 간언과 저술 정도로 그의 저서로는 촉본기가 있다. 그가 법훈과 오경론 그리고 고사고를 비롯한 100편의 저작을 남긴 것을 미루어 보아, 그는 상당한 학자이자 저술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맡은 직무나 학문에만 매달린채, 당대의 시류나 정국을 외면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유선이 점차 향략에 빠지자, 상소를 올려 그를 질타하였고, 비의 이후 강유의 북벌로 인해 피폐해지자, '구국론'이라는 논문을 지어 지속되는 전쟁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제갈량의 공식 후계자였던 비의 생전에는 강유의 병력을 1만 정도로 제한하여 무리한 병력 소모를 막는 등 적절한 제어를 했지만 비의가 죽은 뒤 강유의 북벌은 성과도 있었으나 단곡 전투 등의 큰 패배를 겪어, 이에 촉의 백성들이 전쟁에 염증을 느껴 지쳤고 강유가 입은 피해를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서술한 바와 같이 구국론을 저술한 초주 외에 동궐이나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 등의 정계인물들은 물론 요화, 장익 같은 일선 장군 등, 당시 촉의 지각있던 인재들은 대부분 강유의 북벌을 비판하였다. 초주전 본문에 "계속되는 북벌에 백성들이 (지쳐서) 초췌해졌다" 라는 구절이 존재한다.[1] 이런 비판 때문인지 강유도 단곡전투 이후인 258년부터 4년간은 변변한 북벌이 없었다.

한 가지 특기할 부분이 있다면 화양국지에서 구국론을 '사람들이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다'라고 적은 대목인데 당대의 촉한 내정의 1인자인 진지의 협조를 받아 지은 논문이었는데도 왜 사람들의 호응이 없었는지는 의문이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심각한 패배주의적 성향으로 그려진다.

첫 등장은 214년. 유비의 공세에 절망해 있는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할 의사를 보이자 현명한 판단입니다, 항복이 답입니다 라는 식의 말을 했다가 황권에게 칼빵을 맞을 뻔했다. 이 사람의 이 말 한 마디가 유장이 항복의 결심을 굳히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곤 해도 이 시대에 초주는 없었다. 당시엔 어린애였을 초주를 내세워 이런 말을 하게 한 걸 보니 나관중은 어지간히 초주까였나보다.)

제갈량이 북벌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하려 하니, 천문학을 말하며 북벌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란 말을 한다. 이에 제갈량은 "하늘이고 뭐고 상관없이 이건 선제의 유지"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시대의 성향이 뭐 어느 날 어느 시에 서리가 내렸으니, 이 방향이 길하다 따위의 오늘날의 논리로는 말도 안 되는 판단이 정론이었으니, 이상주의자면서 또한 현실주의자였던 제갈량의 입장에선 이미 스스로 모범답안까지 다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초주가 촉빠들에게 악평을 받게되는 이유는 항복에 대한 문제였다. 당시 촉한의 조정은 남만으로 도주하거나, 손오로 망명하자는 의견들로 갈라지게 되었다. 또한 성도 내는 위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성안의 치안과 질서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때 초주가 위에 대한 항복을 건의한 것.

초주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1. 남중은 옛부터 모반의 땅이므로 제갈량이 평정하고 나서야 고분고분해졌으나, 여전히 역심을 품고 있는데다가, 만일 촉한 정부가 그곳으로 이전한다면, 위군이 거기까지 남진해 남중이 피폐해질 것이니, 남중인들은 이에 들고 일어나 모반하거나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

2. 손오에 의지한들 독립군주는 커녕 손오의 신하로 전락하여, 나라는 되찾을 수 없을 터일뿐더러, 오가 를 이기지 못하는 건 불보듯 당연한 이치다. 그렇게 되면 다시 위의 신하가 될 것이니 의미가 없다.

3. 항복한 자를 잔혹하게 다루면 손오가 결사항전하리라는 것과 검각의 강유가 죽을 때까지 싸워 위도 엄청난 피해를 보리라는 걸 등애는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항복하면 관대하게 받아줄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판단은 현실에 근거한 논리라고 평 할 수 있다. 어차피 수도 성도를 버린 상태에서 순수한 한족의 땅도 아닌 남중이나, 다른 나라 오나라로 건너가 봐야한들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그런데 한국 삼국시대때 백제는 한강 유역 고구려한테 빼앗기고 충청도로 건너갔잖아.

인물됨 자체가 전형적인 문관으로 현실주의(좀 비관적인)내지 안정을 중시한 성향이었던 것 같다. 이런 초주의 의견에 '위국 조정은 멀리 있는데 우리의 항복이 받아지기나 하겠나'라는 반대의견이 있었을 뿐, 항복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상 다들 항복 외엔 별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 연의에서는 강도 높은 영향력있는 유심의 반론이 존재한다지만 사실상 그냥 대책없이 끝까지 싸우다 죽자는 의견으로 현실성 있는 대책이 아니었던지라 반론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초주의 항복관은 단순히 패배주의적이지 않았으며, 그는 협상을 통해 유선의 안위와 몸값을 받아낼 것을 중요하게 보았다. 이로 인해 성도 치안도 안정 되었다. 종회가 항장 강유와 손잡고 난을 일으켜 1년만에 난장판이 되긴 했지만 이것은 적어도 등애의 잘못은 아니다.

한편 제갈량과의 관계에 있어서 초주는 조정에서 딴지를 거는 역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으며, 제갈량이 죽자 그의 빈소로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이 초주였다.(당시 유선은 제갈량이 죽은 곳으로 가지 못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 보건대 현실주의적인 애국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거기에 통념과는 달리 강유의 북벌중단을 주장했던 당시에도 '일단 한고조는 포기해도 주문왕은 될 수 있다, 문왕의 고사를 따르자'고 해서, 촉한의 기본적인 노선인 한실부흥과 천하통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당장 그가 항복을 꺼낸 시점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면죽관이 떨어지고 강유가 검각에 고립된 게 명백한 시점이었다.

그의 손자로는 서진에서 재동내사를 지낸 초등(譙登)이 있다.

그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형적인 문사로 자기가 하고 싶은 학문하면서, 촉한에 충성했다. 실무직에 있어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촉에 해를 끼친적도 없다. 그래서 정사에서의 비중은 비유하자면 공기였는데, 멸망 직전에 올린 간언이 연의 덕분에 굉장히 유명해져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진수는 초주에 대해 동중서의 규범을 지닌 일세의 선비라 평하고 있다. 그러나 진수가 초주의 제자인데, 진수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하여 제갈첨에 대해 악평을 썼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진수가 스승 초주를 치켜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천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니 사람일이 어찌 저찌 또는 저 나무가 부러졌으니, 나랏일이 어찌 저찌 이런 논설을 펴는 걸 보면 학자이며 비평가가 였던 것 같다.

천문과 기타 학문에도 능해 사마소의 죽음을 예견하기도 했다.[2] 외모가 꽤나 웃기게 생겼었는지, 초주가 면접을 볼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웃느라 난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누군가 주의를 주자, 제갈량이 '나도 웃긴데 어찌하겠는가?'라며 반문하였다고 한다.

4.2 부정적 평가

초주의 기록은 적은 편인데 단순히 기록이 적은 것과 한 일이 없는 건 명백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촉나라 인물 중에 오의오반은 제대로 된 열전이 없지만, 그들이 거쳐간 직책과 황실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기록에 간혈적으로 남아있는 전공으로 인하여 그들이 촉나라 군부의 주요 인사들의 한축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정사에서 초주의 열전은 "두주두허맹내윤이초극전"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 기록된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재야학자와 익주 명사 및 호족 등으로 촉한의 조정에서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거나, 또는 논객에 속하는 인사들이다. 더불어 그에게 할애된 지면도 짧다.

수신지 등 당대의 속설을 취합한 소설류에 따르면 초주는 평소부터 되지도 않은 헛소리를 내뱉고 다닌 것으로 묘사된다. 뭐 큰 나무의 작은 가지가 부러졌으니 어쩌고 저쩌고.... 이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작은 나라는 인재가 적으니 어찌 큰 나라를 이기겠느냐 운운... 이와 같은 비유는 고전들에서 취한 비유이다. 더하여 초주는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참위설을 믿으며 부정적인 비판을 하였던 것은 확실하다.

또 <촉서> <상총전>에 주석으로 첨부된 <양양기>에 기록되길, 그는 한때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초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제 유비의 휘(諱)는 비(備)이고 그 뜻은 "준비하다, 갖추다(具)"의 뜻입니다. 후주 유선의 휘는 선(禪)이고, 그 뜻은 주다, 수여하다(授)의 뜻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유씨는 "다 갖춘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지금 중무군(中撫軍) 사마염(司馬炎)의 이름은 염(炎)인데, 그런데 유비의 촉나라는 염흥(炎興: 263-264) 연간에 그 끝을 만났는데, 그 진귀한 옥구슬이 성도에서 나왔으므로, 상국(相國)의 부(府)에서 보관하였는데, 이것은 곧 하늘의 뜻입니다.요약하면 우리 군주 이름 재수없으니 걍 항복 하져 ㅇㅇ"#

거기에 제갈첨이 면죽관에서 무너졌다고 해도 방어할 수 있는 여력이 아직 남아있다고 보는 의견도 상당히 많아졌다. 우선 당장 중장비를 빼고 음평샛길을 넘어온데다가 제갈첨과의 전투에서 한번 패한적까지 있던 등애군이 과연 성도 공성전을 제대로 치룰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3] 거기에 동맹국인 손오의 원군도 오고 있었고 촉군의 정예인 강유군도 황제의 명으로 항복할때 분함을 못 이겨 바위에다가 칼을 내려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아직 전의를 상실한 상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유선이 위에서 쳐들어 왔을때 건녕에서 성도로 가겠다는 곽익의 요청을 성도는 방비가 튼튼하니 보낼 필요 없다고 거절한 순간부터 이건 그냥 싸울 여력 없어서 항복한게 아니라 지레 겁 먹고 항복한게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수 밖에 없다.

초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옛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듯한데, 고려사를 보면 거란소손녕이 침입했을 때, 이에 대한 마땅한 대응방법을 두고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때 서희가 할지론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당시 전민관어사 이지백이 서희의 주장을 거들면서 그 옛날 초주가 유선에게 권해서 나라를 위나라에 바쳐 항복해서 웃음거리가 된 거 모르나며 반박하며 예화를 들었을 정도다. 비록 고려사가 편찬된 것은 삼국지연의가 나온 이후인 조선시대이지만, 삼국지연의가 들어온 것은 선조 대이므로 고려사가 편찬된 것은 그보다 전인데다가 해당 표현이 원 사료에 없는 것을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임의로 첨가한 것이라고 볼 근거도 없다. 삼국지연의보다 먼저 나온 자치통감를 보더라도 초주의 이미지가 당시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고려사에 실린 이지백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전략)옛사람의 시에 ‘어리고 몽매한 놈이 천 리 강산을 경솔히 하니, 한촉(漢蜀)의 문무백관이 초주(焦周)를 원망하였다’라고 일렀는바, 이것은 초주가 촉(蜀)나라 대신으로써, 후주(後主)에게 권고하여 국토를 위(魏)나라에 바치고, 천고의 웃음거리로 후세에 전해지게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古人有詩云, ‘千里山河輕孺子, 兩朝冠劒恨 譙周 .’ 盖謂 譙周 爲蜀大臣, 勸後主納土於魏, 爲千古所笑也(후략) - <고려사열전> 서희 #

조선시대에도 초주는 전형적인 항복론자로 보였던듯하다. 다음은 홍대용의 담헌서 사론 평가.

초주(譙周)는 두 번이나 임금에게 항복하라 권하고 세 임금에게 몸을 더럽혔으니, 족히 논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 그가 오(吳) 나라로 도망쳐서 남쪽에 들어간 계책은 진실로 잘못이다.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것은 천지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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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는 전형적인 정치형 문관으로 나온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5/66/73. 구국론 정치 보정을 +2를 받아 실질적인 정치는 75. 병법은 매도 하나 뿐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4/9/65/72/54에 명사, 천문 특기가 있는걸 빼면 별 거 없다. 천문특기는 천변,풍변을 사용할 수 있지만 통솔이 4인 초주를 전투에 데리고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외 특이사항으론 아이템으로 구국론(지력+1)을 보유하고 있어서 실질적인 지력은 66인 것 정도.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3/3/66/71/50에 특기는 없다. 풍수 특기가 적절할 것도 같지만... 활용도는 평범한 문관.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천문학에 능통하다는 평가에 따라 천문 도구가 옆에 놓여있고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변덕규로 나온다. 최훈 작가가 바라본 삼국시대 후기는 대의를 쫒던 영웅들은 사라지고, 자기자신의 편의만을 생각하면 이들이 이끌어간 시대인데 촉한 지배층에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 유선, 진지, 초주다.
  1. 허나 장익이나 요화가 촉한 멸망 때까지 강유와 끝까지 함께하고 그의 명령을 좋던 싫던 따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촉한 군부엔 강유만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말 그만한 인물이 한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당시 촉의 인재들 사이에서 황호보다 조금 나은 평가를 받을 만큼 지지자가 없었던 강유는 진작에 탄핵을 당해 관직에서 쫓겨났을 테니 말이다.
  2. 그래서인지 삼10의 계략특기 천문을 가지고 있다.
  3. 장담할 수는 없다. 애초에 제갈첨조차도 이런 부대를 상대로 상식적으로 패할 리가 없었을 텐데 결국엔 패배했다. 이런 촉의 군대가 성도 공성전에서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