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1 徐熙

666277_263497_3049.jpg

20080617000933_0.jpg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서희 동상)

생몰년도 942~998

고려의 문신. 외교관. 어릴 때 이름은 염윤(廉允)[1], 시호는 장위(章威).
이천 서씨 사람들이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선조.[2]

조선에 이예[3]가 있다면, 고려에는 서희가 있다.

1.1 성장과 거란전쟁 초기

포스 넘치는 철혈 군주 광종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했던 강직한 재상 서필의 아들이다.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전전하였고, 982년에 나라로 가서 단절된 국교[4]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 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 병부상서'라는 정3품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동아시아 전근대 국가에서 남의 나라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경우가 다 그렇듯 이 역시 명예직이지만, 이러한 처우는 그만큼 그를 예우했다는 뜻이다).

993년에 요나라(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중군사 자격으로 북방에 참전했다(1차 여요전쟁). 이 때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자기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며 빨리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윽박질렀는데, 이에 조정은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요에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다.

문제는 이 80만 대군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이 당시 소손녕의 군대는 많아봤자 6만을 넘기 힘들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추측이다. 최소 13배 이상은 뻥튀기한 셈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거란의 원정은 도통 이상이 지휘하는 원정과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한데, 도통이 지휘하는 원정군은 15만 명 이상인 경우가 많았으나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은 최대 6만 명 정도였다. 소손녕의 당시 직책은 동경 유수로 도통이 아니었다. 이 경우 그의 직위에서 그가 지휘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최대 6만이므로 병졸들의 수가 많아봤자 6만이라는 것이지 사실 그가 지휘했던 병졸의 수가 6만보다 적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최전방 봉산성에서 윤서안의 선봉대가 이 병력에게 크게 패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6만보다 많았지만, 병력을 동원하고자 집결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데, 윤서안이 그 시간을 버는 임무를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전투 이후 고려가 파견한 사신 이몽전에게 소손녕이 다짜고짜 무조건 항복이나 하라고 큰소리를 쳐댄 통에 고려 정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오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그러다가 서경 이북을 할양하는 안(할지론)으로 논의가 굳어져 서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리고 있었다. 이 때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곡식을 내다버리는 짓을 멈추게 했다. 사실 군신들이 사태를 조금만 더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소손녕의 군대가 80만일 수 없다는 것 쯤은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80만이나 되는 병력은 당장 병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장기전에 돌입하면 소손녕의 군사들은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이렇듯 그는 오랫동안 군을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전쟁을 속전속결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수양제가 113만명을 동원하였던 고구려 원정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손녕이 고려로 넘어와서 벌인 전투는 몇 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면 80만 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의심을 해야 옳았다.

이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유방과 대도수가 거란군을 막아내자, 조정은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또한 안융진 전투 이후 더 이상의 공세적 군사행동이 어렵게 된 소손녕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서희가 홀로 일어나서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자원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성종은 강가까지 나가서 서희의 손을 잡으며 그를 전송했다.

1.2 역사에 남은 외교 담판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 라고 하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고 하지만 서희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하는 예는 없다! 라고 되받아 쳤다. 소손녕은 서희의 인품에 감탄했고 결국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는다.
사실 협상은 현대국가에서도 협상 전의 기싸움이 적어도 결과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기싸움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당시 거란의 주적은 고려가 아닌 연운 16주를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이던 이었고, 고려 침공은 송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된 사전작업이었다. 어? 실로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조선에는 서희가 없었고, 한 차례 더 지난 뒤 그 끝은...

IE000939925_STD.jpg
회담 내용은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으며(역사적 연고권), 왜 고려가 가까운 요나라가 아니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느냐(외교 문제)는 이야기가 주된 화두가 되었다.

소손녕 :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우리 영역 안에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옛 영토는 우리 땅이다. 그러니까 그 영토를 내놓아라!
서희 : 그건 말이 안된다!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려라고 이름을 지었고, 수도가 평양인 것[5]도 고구려를 이으려는 것이다. 따지고 본다면 거란의 동경[6]도 우리의 땅인데 누가 누구한테 침략을 한다는 것이냐?
소손녕 : 그건 그쯤으로 해두지. 그리고 왜 우리 요나라랑 더 가까운 위치이면서 송나라 하고만 교류를 하는 것은 무슨 논리냐?
서희 : 요나라와 교류를 하지 못한것은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여진을 몰아내고 그 땅을 우리한테 준다면 그 때는 요나라와 고려랑 막힘없이 교류할 수 있을것이다. 내 말이 틀렸나?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도 일대인 강동 6주[7]를 얻게 되었다. 위의 대화는 꽤나 간략하지만 서희가 거란 진영에 머무른 시간은 7일이었다.

사실 소손녕의 목적은 고려의 항복 내지는 협조였다. 당시 요는 송과 전쟁중이었으므로 배후의 고려가 송을 돕는답시고 뒤에서 치고 들어오면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고려를 확실하게 눌러두거나 최소한 송과의 관계를 끊어두고 우호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서희가 읽은 것은 이 부분이고 이 부분에서만큼은 고려가 갑질을 해도 괜찮으리라는 점을 파악한 것이다. 실제로 요가 이 정도로 입장을 양보한 것도 꽤나 이례적이다. 일부 도서에서 서희의 명분론의 승리라고 칭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그쪽이 아니라 그 뒤의 '왜 우리랑 통교하지 않고 송이랑만 노느냐'와 '사이에 여진족이 끼어서 그랬다' 하는 것이다. 이후로 진짜 고려는 잠시동안 송과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쓰면서 거란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1.3 담판의 의의

국내 위인전이나 교양 역사서에선 소손녕이 멍청해서 서희한테 말빨로 발렸다거나, 혹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에 무턱대고 일리가 있다며 물러났다는 내용을 싣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 몇 마디에 자기 나라 영토를 떼어주고 좋아서 간다는 건 말이 안된다. 당연하지 정말 그랬다면 거란 성종부터 소손녕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소손녕은 당시 거란의 의도를 충실히 대변했을 뿐이다. 서희는 그런 거란의 전략을 잘 파악하고 맞대응한 것이다. 거란은 주적인 송을 치기 전 고려와 협상을 맺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일 뿐 고려에서 국력을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80만으로 병력을 과장한 것도 그런 계획의 일환이었고 소규모 전투만 반복하다 안융진 전투 이후론 지속적으로 협상을 요구했다.

즉, 당시 우왕좌왕하며 영토할양 및 화친론을 내세운 신하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생각하여 유리한 위치를 이끈 서희의 정세파악과 협상능력을 중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500px

그리고 강동 6주는 애시당초 거란의 영토도 아니었다. 본래 이 곳은 발해의 영토였으나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거란의 중앙 세력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이곳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발해의 지배층 대부분이 거란에 끌려가거나 고려에 투항한 후 그곳은 미개발 상태로 서 여진 세력이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없이 살고 있었다. 서희는 거란과 고려가 힘을 합쳐 여진족을 몰아내고 통상로를 만들면 자연히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할 것이라 말했는데, 거란 영토를 할양받은 것이 아니고 고려가 압록강 이남의 서 여진 세력을 밀어내고 강동 6주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고 이를 거란 황제가 하사하는 식으로 형식만 갖추겠다는 뜻이다. 앞뒤로 적을 만들 순 없었던 당시 거란 입장에선 이 정도면 충분했다. 중간에 끼인 여진만 죽어난다

그리고 송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전연의 맹을 맺게되자 당연히 고려와의 관계도 재설정할 필요성을 느꼈고[8]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하겠다고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례에 걸쳐 침략을 감행했다.

강동 6주를 얻음으로서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이 지역은 북방방어의 중심지로서 고려-거란 전쟁 때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윤관의 9성 정벌 이후 보주를 얻게 되면서 압록강 이남이 완전히 고려의 영토에 편입된다. 이 회담 이후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주변 일대를 요새화한 인물도 바로 서희였다.

1.4 강직한 재상

서희는 유명한 외교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버지 서필처럼 바른 말 잘하는 올곧고 강직한 인물이었다.

한 번은 성종과 함께 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 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끝내 성종에게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흠좀무.

그리고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일곱 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이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좀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을 가지고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 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고려사열전> 서희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 어사로 등용했고 정신을 차리게 해 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1.5 그 후의 이야기

  • 어쨌든 회담 이후 이 지역을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라는 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57세로 사망. 아들인 서눌도 재상 자리에 올라서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빵빵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왕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1.6 평가

보통 거란의 1차 침입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실상 대(對)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공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서희다. 이후의 거란 전쟁 동안 양규강감찬 같은 명장들의 활약이 컸지만 서희가 이 지역을 요새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고, 거란 전쟁 동안 개경이 몇 번이고 함락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외교관의 대명사로 손꼽힐 만큼 협상과 언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전략과 대국을 보는 시각이 탁월한 인물이었단 이야기. 사실 이는 외교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세상은 한갓 에 구준과 부필[9]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고려에 서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시 서희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절령 이북의 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 <여사제강>[10] 권3 성종기 계사 성종 12년

조선시대 선비들이 심심해서 그때까지의 역사 인물 모두를 인재풀로 하는 드림팀 내각 설정놀이를 할 때, 항상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 자리에는 서희를 넣었다고 한다.[11] 서울 서초구 서초2동 외교안보연구원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대한민국 외교관의 롤 모델인 셈.

1.7 그 외

  •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협상'에 관하여 단골로 나오는 인물이다.
  • 서희는 장군이 아니다. 중군사로 제직을 했었을 뿐, 휘하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2003년 4월, 이라크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공병부대인 '서희부대'는 그의 이름을 땄다.

2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 항목 참조.

3 발레리나 및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 무용수

1986년생. 발레리나. 선화예중 당시 도미, 워싱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 재학 중 스위스 로잔 콩쿠르 입상, 이후 독일 슈투트가르트 존 크랑코 발레 아카데미를 거쳐 미국 뉴욕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입단. 주연급 솔리스트를 거쳐, 현재는 동양인 최초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
  1. 서희의 '자'라고 적은 서적도 있는데, 고려사 서희전의 원문을 보면 '소자(小字)'라고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뜻하는 한자어다.
  2. 야구선수 서건창도 본관이 이천이다. 즉, 서희의 후손이라는 것!
  3. 중인 출신이었으나 왜구의 침입 때 군수를 끝까지 따라가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중인 신분에 벗어났다. 세종시대에 대일외교의 전선에 큰 활약을 했으며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참고로 이 사람도 서희와 함께 국립외교원에 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다.
  4. 10년 전에 송이 건국되자 송나라는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했는데, 송나라 사신이 항로로 고려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어서 실패했다(…).
  5. 물론 왕실과 조정이 상시 위치하는 실질적인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 맞다. 하지만 아직 북벌정책이 추진중이던 고려 초까지 서경은 개경과 사실상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분사제도(分司制度)라 하여 개경의 관청을 서경에도 동등하게 설치했다. 서희는 이 점을 들어서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서경을 수도라고 주장할 수 있던 것이다.
  6. 물론 당연히 도쿄가 아니라 거란의 '5경' 중 하나인 동경 요양부를 말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요녕성)의 지급시인 랴오양 시(요양시)로 남아 있다. 원래 고구려가 요동을 편입하고 요동성을 설치했던 곳이 바로 이 요양시. 현재는 농업 지력이 많이 쇠퇴하고 산업발전도 정체된 지역이다. 공업화가 일본 제국만주국 시절에 이루어졌던 동네라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부 해안 지역 경제개발동안 쇠퇴해버린 것.
  7.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이다. 여기의 귀주는 귀주대첩의 그 귀주.
  8. 이건 후일의 몽고나 청이 처음에는 형제관계에 만족하다 중원의 한족 왕조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한 후 군신관계를 요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9. 북송의 재상들로 거란의 침입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구준은 송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맞자 겁을 먹은 진종을 설득해서 진종을 친정하게 만든 재상이고, 부필 역시 거란과의 외교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0. 조선 현종 때 학자인 유계가 지은 고려시대 역사서.
  11. 그리고 병조판서 자리에는 항상 이순신이 들어갔다고... 1999년 말기에도 사람들을 상대로 비슷한 설문조사 설정놀이가 있었는데, 외교장관에는 서희, 대통령에는 세종대왕, 해군참모총장에는 이순신이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