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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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No.73
최기문(崔基文 / Ki-mun Choi)
생년월일1973년 6월 10일
출신지서울특별시 강서구[1]
학력화곡초 - 충암중 - 충암고 - 원광대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양타
프로입단1996년 OB 베어스 1차 지명
소속팀OB 베어스(1996 ~ 1998)
롯데 자이언츠(1999 ~ 2010)
지도자 경력롯데 자이언츠 1군 배터리코치(2011 ~ 2013)
NC 다이노스 2군 배터리코치(2014)
NC 다이노스 1군 배터리코치(2015 ~ 현재)
2003년 한국프로야구 페어플레이상
김한수(삼성 라이온즈)최기문(롯데 자이언츠)김기태(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7번
최기문(롯데 자이언츠)김명성(2011~2012)

1 소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야구선수. 現 NC 다이노스의 배터리코치. 등번호는 24번(OB, 1997) - 22번(OB, 1998) - 27번(롯데 1999~2010)

2 프로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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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입단 시절 장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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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둥지를 튼 롯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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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리즈 시절꽤 미남이었다.

1996년 OB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이후 1998년 롯데 투수 차명주를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어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몸담았다. 특이하게도 스위치 히터이며[2]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선수생활 말기까지도 양타석에 들어섰다. 또한 포지션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급의 준족을 가지고 있어서 대주자로서 기용되기도 한다. 상당한 미남이며 3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피부가 매우 좋다. 사실 장가들기 전에는 최기문도 많이 놀았다고 한다.

1999년 부터 출장횟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김민재와 철벽 센터 라인을 이루어서 비교적 전력이 후달리는 롯데가 한국시리즈까지 잘 버틸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2000년 시즌초부터 약 6시즌 동안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임수혁을 대신해서 롯데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가 주전으로 활약한 첫시즌인 2000년에는 매직리그 2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삼성 라이온즈에 패해 광탈했고, 2001년부터는 저주의 매직넘버 8888577을 찍기 시작한 첫 해였다. 롯데의 암흑기에 안방을 지켜온 진정한 안방마님이였고 사실 팀에서 타격도 3년 연속 타율 2할 8푼 이상을 찍는 등 무척 괜찮았다[3]. 2001년에는 한 경기에서 좌, 우 연타석 홈런이라는 기록울 세웠고, 1경기 5안타라는 진기록을 새우기도 했다. 커리어 하이인 2001시즌에는 타율 0.304, 7홈런, 47타점, OPS 0.786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당시에 팀이 워낙 막장 상태였기 때문에 웬만큼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가 한 활약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야구를 보는 사람들도 그의 투수리드를 까기 바빴다. 심지어 하루는 안경을 쓰고 왔는데 인텔리 해 보이려 한다고 욕만 되려 먹었다. 그러나 실제론 그 기나긴 암흑기에서 막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던 투수진을 꽤나 잘 이끌었다.

2003년 롯데가 이승엽에게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허용 하던 날에는 루를 돌아오던 이승엽과 하이파이브를 했다고 욕을 먹기도 했다(…).

2004년 프로야구 병풍 사건에 연루되어 서른 넘어 군대가나 싶더니 이듬해 재검 결과 간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밝혀져 면제 처리되어 복귀했다. 그러나 병풍 후유증 때문인지 간 건강 탓인지 이 때부터 성적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2006년 들어서 부상 탓으로 시즌을 통째로 쉬면서 순식간에 강민호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최기문과, 강민호 사이에 메워주는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강민호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래서 포수로서의 역량이 그다지 좋지는 못했다. 그래도 강민호의 타격은 포수치고는 좋았고, 죽이되건 밥이 되건 롯데 입장에서는 새로운 포수를 키워야 해서 2006 시즌 부터 쭈욱 강민호에게 주전자리를 빼앗기고 백업포수로서 활약했다. 최기문의 어깨가 나빠진 것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발전하기는 커녕 상태가 안 좋아지는 강민호를 보면서 수많은 팬들은 뒷 골을 잡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존재 여부조차 논란의 대상이 되는 투수 리드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포구조차 못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연출하자 상당수의 팬들이 최기문을 찾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기문이 가끔씩 출장하는 날은 롤러코스터 장원준[4]조차도 완봉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1군 무대 경험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조정훈도 완봉시켰다. 5~6이닝도 꾸역꾸역 겨우 먹었던 매클레리가 완투승을 거두고 인터뷰에서 최기문의 리드를 극찬하기도 했다.

2.1 2009 시즌

특히 2009 시즌이 시작되고서 이미 수많은 팬들이 시즌에 대한 기대를 접은 시점에서 강민호 대신에 그가 출장했고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1회에 홈런을 두방이나 맞으며 롤러코스터 짓을 하는 장원준을 꾸역꾸역 끌고 가면서 SK를 상대로한 13연패의 고리를 끊으며 그날의 MVP 선수가 되었다.

이미 강민호 안티 갤러리로 돌아선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거의 신 대접을 받는 중. 타팀 팬들도 포수를 바꾼 것 만으로 팀 분위기가 변했다며 놀라워했다. 무엇보다 안정감 있는 수비는 강민호의 알까기에 질린 팬들을 열광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강민호에 밀려서 여전히 백업포수로 활약하며, 혹자는 최기문의 입이 작아서 로이스터가 기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백업이라고 구단차원에서 정한 듯 하며, 본인은 백업이나 하면서 오래오래 야구 하고 싶다고 해서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사실 적지 않은 나이에 부상 경력까지 있어 실력 여부를 떠나 풀타임을 소화할 체력과 내구력은 없다. 문제는 로이스터는 강민호가 아예 박살날때까지 최기문에게 전혀 기회를 안줬다는 거지만...

그의 또 다른 장점은 항상 후배들을 옆에 두고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하준호 등 어린 후배 투수들이나 포수가 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덕아웃에서 옆에 두고 계속 조언을 해주는 최기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다할 롤모델이 없는 롯데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 특히 젊은 강민호, 장성우에게는 없는 심적으로 흔들리는 투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다. 실제로 장원준이나 송승준처럼 기복이 심한 투수들은 민호보다 최기문 선배님이 받아주시는 게 더 편안하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2009 시즌 강민호의 부상으로 최기문은 백업에서 주전포수로, 2군에 있던 장성우가 백업포수로 올라왔는데 둘 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 줬다. 강민호가 복귀이후 무리한 출전을 강행하다가 사실상 2010 시즌 아웃 상태가 되었기에 장성우를 비롯한 여타 다른 포수들과 함께 1군에서 쭈욱 출전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30대 초반의 중견급 포수가 없는 롯데에서는 1~2년 정도는 더 현역에서 뛰어 후배 강민호장성우를 지도할 것으로 기대한다. 플레잉 코치가 되는것도 유력하다.

2009년 11월 3일 FA를 선언하였다. 요 근래에 최기문같은 베테랑 포수를 찾기 힘들고 같이 FA신청을 한 김상훈은 이미 KIA 타이거즈와 연봉 협상 단계까지 간 마당이라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당시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느라 FA에 대한 생각은 뒷전인 듯했다.
결국 부친상을 당하면서 FA 우선 협상을 정상적으로 못 했다고 한다. 롯데 구단측에서는 향후 코치 자리까지 준비하면서 잡겠다는 입장이지만 최기문 본인은 주전으로 뛰고 싶어했다는 점과 전 구단에 포수 부족 현상 등이 변수로 작용했다. 다행히 본인의 희망대로 롯데와 연봉 1억 원의 조건으로 FA계약을 체결했다#.

2009 시즌은 타율 0.217, 2홈런, 10타점, OPS 0.645를 기록했다.

2.2 2010 시즌

개막 이후 한번도 1군에서 출장하지 못하다가 2군에서 4월 13일 한 경기 출전 후 1군과 동행했다.

기사에 의하면 부상이 있는 듯했다.#
8월 11일자 기사에 수술은 성공적이며 재활에 3개월이 걸린다고 나왔다.* 결국은 시즌 아웃이 확정됐다.

그리고 2010 시즌이 종료된 후인 10월 26일 은퇴와 함께 2011 시즌부터 배터리 코치로 뛴다는 기사가 나왔다.#해당기사

2012년 4월 14일 두산전에서 박현승 코치와 함께 늦은 선수 은퇴식을 가졌다.

3 지도자 시절

선수 시절에도 그랬듯이 늘 티나지 않고 묵묵하게 선수들을 잘 챙겨 왔다. 원래 강민호가 있었고 용덕한이 영입된 것도 컸지만 최기문 코치가 있는 기간에 롯데 자이언츠는 KBO에서 두산 베어스와 함께 포수 걱정이 거의 없는 팀이었다. 특히 2013시즌 초반 볼질로 헤메던 크리스 옥스프링의 쿠세를 고쳐 팀의 에이스로 성장시켰고, 강민호의 송구동작을 개선시켜 유일한 칭찬거리인 도루저지율 1위에 오를 수 있게 지도한 점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거 아니었음 강민호는 이 시즌 FA의 F소리도 못했을 듯

허나 2013 시즌 후 롯데의 코치진이 개편되면서 재계약 요청을 받지 못했다. 이 소식에 롯빠들은 뒤집어져서 '감독이란 작자가 오자마자 썩 잘하고 있던 투수코치 2군으로 내쫓더니 이제는 큰형님같이 선수들 다독거리던 배터리코치를 아예 팀에서 내보내냐.' 며 뒤집어졌다. 한 유저는 아예 구단에 전화해서 항의까지 했다고. 그 무렵 권영호 수석코치가 2군 감독으로 간 지 단 1주일도 안 되어 경질당했다.

다만 아예 이유가 없는건 아니었는데, 김준태가 끝내기 안타를 쳤던 그 경기에서 정민태가 김준태를 심하게 나무랐고, 최기문이 이것을 보고 '포수는 내 권한' 이라며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도 정민태에게 대놓고 일갈했다. 아마 이 때문에 김시진 라인과 사이가 멀어지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분명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준 헌신적인 성향의 코치기 때문에 다른 구단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다. 하긴 포수들 뜯어고칠 구단은 크보에 널리고 널렸지

그리고 2013년 10월 24일, 옆 동네 NC 다이노스의 2군 배터리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리고 롯데 팬들은 프런트를 대차게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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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의 국가대표팀 배터리코치로 임명하여 활약한 바 있다. 강민호와 재회했으니 그 동안 잃었던 기량을 다시 되찾은셈이다. 역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링크1 링크2 그보다 저 얼굴이 어딜봐서 마흔을 넘긴 얼굴이란 말인가 은근 귀엽다

그 동안 존재감조차 없었던 2군 코치 생활에 어둠을 깨고, 강인권두산 베어스로 옮기자 2015년부터 NC의 1군 배터리코치로 승격되었다. 2군 배터리코치는 이도형이 새로 영입됐다.

1군 배터리코치에 앉힌 이후에 한때 코치시절 한솥밥을 먹은 제자이자 KT로 이적한 이후로 2군에서 전전하던 용덕한을 다시 불러들였다.

4 기타

  • 롯데 자이언츠 선수시절 별명이 기문신 or 기느님이었다. 손민한이대호도 까이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조성환과 함께 안 까였다. 다만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가 탄생하기 한참전인 2001년~2003년 동안 소녀어께라고 욕기도 했다.
  • 2014년 7월 24일, 마구마구2014에 신규 레전드 중의 하나로 최기문 레전드(가명 최진성.)가 업데이트 되었는데. 컨택트/스로잉형으로 출시되어서 10 강민호 플래티넘을 대체할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1. 출생 당시 강서구로 분구하기 이전 시기였던 영등포구였다.
  2. 스위치 히터로 전향한 것은 롯데로 이적한 이후 김무관 타격코치의 권유였다. 그 이전까지는 전형적인 우타자. 스위치 히터로 전향한 이유는 비밀번호를 찍던 꼴데시절에 마땅한 좌타자가 없었던 이유였기도 했지만, 최기문 자신도 생활에서 왼손을 쓰는데 불편함이 없었다고 한다.
  3. 더군다나 가장 롯데 역사상 가장 X같은 02롯데에서 규정타석 채운선수중 다율 1위가 최기문이다. 다만 2할8푼5리여서 존재감은 덜했다. 2위는 2할8푼4리의 김응국이며 이 둘밑은 모두 2할7푼 아래이다.
  4. 슬라이더 활용능력이 국내에서도 탑이라 슬라이더가 주무기인 장원준과 궁합이 좋다. 노련하고 상대의 작전에도 심적으로 흔들리는 일이 없다는 점도 플러스 요소.
  5. 로저스가 수염을 싹 밀면 정말 똑같아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