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崔萬理
1398년 ~ 1445년

1 소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2 훌륭한 신하

해주 최씨의 2대손인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12대 후손이다. 1419년(세종 원년)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집현전으로 보임되었고, 계속 집현전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1439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상급 직책인 영전사, 대제학, 직제학 등이 겸직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셈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세자의 시강학사를 맡기도 했다.

최만리는 조선 전기의 뛰어난 유학 실무자 중 하나이다.[1]

불교에 심취해 있던 세종에게 불교를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바른 말을 서슴치 않고, 청백리로 꼽히는 등 청렴하고 올곧은 관료였다.

조선왕조가 유지된 519년 동안, 조선왕조가 인정한 공식 청백리는 218명이다. 그리고 왕과의 사이가 안 좋게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곧은 신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딱 한 가지 행동 때문에 만고에 걸쳐 천하의 개쌍놈(...)으로 까이게 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바로 그 유명한 훈민정음 반대 상소 때문.

3 영구까임권을 획득하다

1444년 2월 최만리는 정창손, 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2]
2. 훈민정음에 열중하게 되면 나중엔 중국의 글을 모르게 될 수 있다.[3]
3. 이미 이두가 있으니 그것을 익히면 되는데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
4. 훈민정음을 반포하면 형사(刑事)에 있어서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나, 이는 훈민정음과 관계없는 문제이다.
5.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것 또한 국가의 큰 일인데 너무 성급하게 행하고 있다.
6. 동궁(세자)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훈민정음 창제에 너무 관여하고 있다.

반항적인 간언에도 보통은 관대하게 대처하던 세종이었으나, 이번만은 예외였다. 뭐, 처음에는 "이 글에는 모두 큰 나라의 법도를 널리 알리자는 뜻도 있는데 경들은 어찌 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좀더 넒게 볼 수는 없겠는가?"라며 달랬으나, 최만리의 반대는 그칠 줄을 몰랐고, 급기야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4]라는 말까지 나오자 뚜껑이 열린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한 상소의 작성자들을 모조리 소환하고는 독설을 쏟아내었다.

"설총이나 나나 백성을 편하게 하자는 것인데, 너는 감히 설총은 옳고 임금은 그르다고 하느냐. 그리고 너희들이 운서(韻書: rhyme table)를 알기나 하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 개더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그리고 새 문자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세종대왕의 분노는 격렬했고 결국 최만리 등 상소의 작성자들은 모조리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다음날 석방되긴 했으나 삼강행실도의 훈민정음 번역에 반대한 정창손은 괘씸죄가 추가되어 파직되었다. 그리고 최만리는 공교롭게도 훈민정음 반대상소를 올린 지 1년 뒤에 48세를 일기로 사망[5]하면서, 실록에서도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최만리에 대한 기록은 1444년 이후로 끝나있다. 사망 이후 졸기도 안써줬다. 훌륭한 대신들은 보통 졸기를 써주는데 최만리는 안써줬다. 사관들도 최만리를 좋게 봐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세종의 대노를 사서 죽을까봐 덜덜 떨다가 오래 못가 죽었다고 세종대왕 위인전에서도 소극적인 찌질이로 나온 적이 있다.

이후 세종대왕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이에 대한 찬양이 거듭되면서 반대 급부로 최만리는 사대주의자, 수구꼴통 유학자로 까이게 되었다. 물론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대왕의 높은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최만리에 대한 비난은 지나친 감이 있다. 실지로 훈민정음에 얽힌 일을 제외하고는 세종이 상당히 아끼던 학자중에 하나였으며 집현전에서 이룬 업적도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에 대한 평가가 바뀔 가능성이 없는 만큼, 최만리에 대한 평가가 바뀔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 뒤로 어떻게든 살아서 능력을 펼쳤다면 어떻게 명예회복을 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1년 뒤에 죽어버렸으니...[6]

최만리에 대한 비난은 굳이 90년대에 나온것도 아니고 개화기 이래로 유구한 전통이다. 사실 이전에는 그냥 듣보잡으로 취급되었는지 별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이 때부터 유교양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졌으며, 민족주의가 강조되면서 한글은 민족 유산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고, 조선 시대의 왕들이 전반적으로 폄하되는 가운데도 세종대왕 만은 한글 창제라는 업적으로 인하여 여전히 높은 평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이 정립되면서 최만리는 '유교적 관념 때문에 새로운 문물과 개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조선을 퇴보시킨 구시대 양반 세력', '민족 문화를 저버리고 외국 문화를 추종한 민족반역자'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80년대 나온 한글 관련 역사책, 세종대왕 관련 위인전, 조선시대 역사책에 버젓이 인간말종 급으로 기술될 정도[7]였고 2010년대 요즘에 약간 재해석이 나오긴 하지만 별로 없거니와 잘 알려지지 못하거나 비중도 없다. 그리고 여전히 관련 서적들에선 부정적인 게 허다하다.

한편 최만리의 이러한 행동은, 훈민정음집현전이 아닌 세종대왕이 직접 비밀리에 창제했다는 설의 증거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최만리는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고 그 기간도 짧지 않아 집현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아는 인물이었다. 만약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수행했다면, 아무리 비밀리에 작업했다고 해도 최만리가 이러한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창제 이후에야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4 최만리에 대한 변호?

1990년대 이후 현대에는 최만리의 주장을 재해석, 일부이나마 옹호하는 주장들도 있다. 보통은 최만리가 훈민정음의 장점을 미처 알지 못하고, 새로운 문자를 사용할 경우 이전까지 한문을 기반으로 한 정치 및 학문 체계 등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 우려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최만리의 상소 중 창제 작업의 성급함과 세자의 참여 문제는 (훈민정음의 중요성을 배제해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지적이다.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세종 본인과 세자 문종, 그리고 극소수 최측근 인사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해석에 따라서는 세종 혼자서 작업을 수행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당시 세종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상당히 나빴고[8], 이 때문에 중요 국정은 문종에게 거의 10여년간 대리청정을 맡긴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자 창제 작업에 크게 열중한 것은, 최만리에게는 자칫 더 중요한 국정 운영에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최만리의 주장을 쉽게 표현하면 "문자 만드느라 나라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정작 만들어도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보수주의적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만리 주장의 핵심은 새로운 문자로 인한 혼란도 아니고, 세종의 건강도, 세자의 학문도 아니다. 최만리가 반대하는 핵심이유는 상소문의 가장 위에서부터 밝힌 맹목적인 중화 숭배, 그리고 언문만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들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한자를 배운 사람으로서 기득권 입장에서의 반발이다. 그 밖의 이유는 그저 첨언이자 구색맞추기에 불과할 뿐이니 결국 위와 같은 주장은 비판의 맥을 잘못 짚고 있다 할 수 있다. 특히 새로운 문자와 백성의 송사가 관계 없다는 부분은 그야말로 화룡점정. 뭐 상소문 사건 직전에 정창손 같은 경우는 위에 나온 삼강행실도 번역 반대 당시 아예 언문으로 책을 찍어낸다고 충신, 열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헛소리를 당당히 늘어놓았을 정도니[9] 당대 기득권층 전체는 아니라 해도 그 상당수가 피지배층을 보는 시선이란 것이 어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도덕 윤리 폐지할 기세. 야 신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 고생을 거쳐 결국 훈민정음을 만들어 낸 세종대왕이 그저 위대해보일 뿐.너희들 반대파 따위 세종대왕을 위한 희생양일 뿐

이래저래 상소문의 논리가 궁색함을 깨닫고는 최만리가 집현전 젊은 관리들이 주동한 상소문에 원로로서 얼굴마담 역할을 요구받았다는 정도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세종실록에서는 만리 등이 세종의 면전에서까지 바락바락 대들었다고 쓰고 있다.[10] 이 때 세종이 처벌을 명한 내역을 보면 최만리, 신석조, 하위지, 송처검, 조근은 1일간 의금부 투옥으로 끝났지만 죄상이 중한 정창손은 파직[11], 김문은 국문[12]까지 명했다. 세종이 처벌을 내리기 직전에 "나 원래 니들 상소에서 한두가지 물어만 보려고 불렀는데 니들 입 놀리는 거 보니 씹노답이네?"라고 했을 정도니 당시 저들의 발언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중용했을 정도의 현실주의자인 세종의 성향을 봤을 때, 만일 정말로 최만리가 그저 얼굴마담으로 이름을 올린 수준에 불과했고 면전에서 대드는 데도 크게 가담하지 않았다면, 최만리를 제외한 신석조,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에게도 1일 투옥 이상의 어떠한 차등 처벌이 있었어야지 최만리에게 다른 가담자과 동일한 처벌을 내리거나 졸기조차 써주지 않았을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정말로 최만리가 얼굴마담으로 참가했을 뿐이라 해도, 적어도 문제의 상소 내용과 논리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므로 역시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만리는 명색이 집현전 상근직의 최고직급인 부제학이었고, 가담자들은 정창손, 김문을 제외하면 10살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조카뻘의 후배들이었다. 이 정도면 최만리는 20~30대 어린 후배들이 말도 안되는 상소를 들고 나타났을 때 적어도 이들을 꾸짖든가 달래든가 해서 일을 수습했어야 하는 위치다. 그것도 이미 도덕교육의 근간을 부정해버린 정창손이나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김문 같은 찌질이가 버젓이 가담해있는데 말이다. 이런 사람을 두고 새파랗게 어린 친구들과 찌질이들의 강권에 얼굴마담으로 이름을 올렸다고 변호해봐야 사람만 우스워질 뿐이다. 차라리 비뚤어졌을 망정 자기 소신은 확실한 사람으로 남겨두는 게 낫지.

하필이면 혐한 일본 우익들에게 제대로 건수를 잡혀 주제를 알고 중국에 굽신거리는 조선인답다고 높게 평가(...)되는 통에 이런 것을 알고 역시 최만리 그놈이 이런 까일거리를 만들었다며 혐오감을 혐일과 같이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일본 극우혐한 쓰레기 가세 히데아키가 박태혁이라는 엉터리 한국 이름으로 써서 한국을 있는 일 없는 일로 욕하던 불쏘시개 <추한 한국인>에서도 최만리를 주제를 아는 한국인의 표본이라고 디스 높이 평가하는 개소리를 했던 걸 봐도 이 책자를 보거나(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왔는데 출판사나 번역자는 당연히 서문에서 얼마나 엉터리인지 보라고 낸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아예 일본에서도 헐값으로 판권비를 받고 내주더라라고 했다) 책에 대해 알고 매국노 최만리가 일본에서는 높이 평가된다고 아는 경우도 있었다. 최만리 본인에게는 억울할 일이겠지만.

5 대중매체에서의 최만리

  •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초반에서는 더없이 든든한 세종의 지지자지만 자존심과 고집이 센 면이 있다. 그렇기에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정인지와도 가끔 의견이 충돌하고는 하지만 결국엔 츤츤납득하는 편. 후반부 들어 훈민정음의 문제로 세종과 충돌하는데, 이전까지 세종의 가장 큰 정적이던 조말생(물론 어디까지나 극중 한정)까지도 씹어먹을 정도의 최종 보스로 그려진다. 하지만 마지막엔 세종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뜻을 굽히고 물러나게 된다. 배우는 이성민[13]
  • 뿌리깊은 나무(드라마)에서는 재해석이 가해져서 비록 세종의 의도에는 반대하지만, 세종의 능력과 문자의 위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올곧은 신념을 가진 채 이를 비판하는 깨끗한 선비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원작에서는 올곧은 보수주의자로 등장하며 드라마 보다는 재해석의 정도가 덜하다. 그리고 엄청난 반전이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 배우는 권태원. 영화 타짜에서 호구 아저씨 역으로 유명하다.
  • 장영실에서는 후반부에서야 나오는데, 뮤지컬 배우 안신우가 이를 맡았다.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를 보고 경악하며, 장영실에게 치를 떤다. 여기서는 견물 연구를 폄하하는 모습을 보인다.

6 기타

서울의 중구 만리동이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동네. 지명에 이름이 붙을 정도로 결코 평범한 인물이나 단순한 소인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반 만리동 유래를 설명한 글귀에서도 장점이라고 부를만한 게 알려지지 않고, 훈민정음 반대로 부정적 이미지가 커서인지 크게 자랑하지 않듯이 썼다. (그래도 원균을 임진왜란 3대 명장(?)이라고 그야말로 왜곡의 진수를 보여주는 평택보다야 낫다.)

안 그래도 조선시대 들어서 내세울만한 위인도 없는 해주 최씨 입장에서는 우울함을 한층 배가시켜주는 원망스러운 조상이다.[14] 때문에 이래저래 변호를 시도해보기도 하지만 결과는 위에 나왔듯....

훈민정음을 보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문자라고 언급한 기록이 있어 일본 위키백과를 비롯한 일본의 한국까(...)들과 환빠들에게 빅엿을 선사할 사료를 제공해주었다.

7 관련 항목

  1. 세종대왕, 황희, 맹사성 등이 연분구등법 등의 조세 제도 등을 수립하는데, 그 이후 400년 동안 조선왕조는 세종대왕이 만든 제도를 거의 뜯어고치지 못했다. 딱 하나, 쌀로 수취를 일원화하는 대동법 하나 시행했다. 개화기 때, 지식인들마저 제도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시대에 국가 최고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의 30~40대 실무책임자가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이었을지 생각해보시라.
  2.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 이제 따로이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진다면 이것은 가치 있는 것을 버리고 쓸모없는 것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3.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한자와 관리가 갈리어 둘이 될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다. 일본의 언어학자인 노마 히데키는 저서인 <한글의 탄생>에서 최만리의 이 주장에 대해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의 잠재력을 매우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예지력 돋네
  4.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최만리의 상소에 실제로 나와 있는 표현이다...
  5. 따라서 실제로 관운이 막혔을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뭐 어떻게 근거가 될 만한 것도 남기지 못해서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6. 실제로 하위지는 이후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해 사육신에 들면서 훈민정음 창제 반대 건에 대해서는 그저 원래 외곬수인 양반 정도로 넘어가고 있다.
  7. 1981년에 나온 삼성당 출판사의 만화 세종대왕에선 최만리나 반대하던 대신들이 명나라에게 이를 고하여 출세할 기회를 노리는 매국노 소인배로까지 나온다. 그러나, 단지 글 때문에 그런다고 해봐야 어려울 뿐이고 주상에게 거슬리다가 목이 날아간다고 하는 의견에 다들 데꿀멍하여 깨갱, 나서지도 못하는 소인배에 찌질이, 아주 제대로 인간말종으로 그려졌다. 결국 파직당한 뒤 최만리는 두려움 속에 밥도 못 먹으며 살다가 죽었다고 기술된다.
  8. 당뇨로 인한 체중 감소 및 실명이 진행 중이었다
  9.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 세종실록 103권 26년 2월 20일 경자 1번째 기사.
  10.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參決)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위의 반대상소 기사와 같다.
  11. 위에 말했듯 언문으로 책을 찍어봐야 충신 열녀 효자는 나오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당당히 늘어놓았다. 실제로 정창손은 이후 정인지, 신숙주 등과 함께 단종 폐위에도 큰 몫을 담당했으니 그야말로 싹수가 노랬다. 자기혐오였나 이런 점때문인지 대왕 세종에서는 명나라 동창의 해수와 거래하며 궁극적으로 명의 한림원유학을 꿈꾸는 꼴통사대주의자로 나온다.
  12. 일전에 세종 앞에서는 언문 출판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가 상소에 동참했다. 그야말로 철면피. 그래서 정창손과 마찬가지로 대왕 세종에서 중후반부들어 보수꼴통이 되는듯.
  13. 당시 이성민이 아직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 본인은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라고 한다.
  14. 본관 통틀어서 조선시대 내내 영의정이 딱 한 명 나왔다. 경종 대의 영의정 최규서가 해주 최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