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시기에 대해서는 개화기(꽃)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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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구한말, 고종
목차
1 개요
開化期
조선의 근대화 시기.
1876년의 강화도 조약 후, 한국에서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세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개혁되어 가던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개화기의 끝을 어디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 1905년의 을사조약이나 일제강점기 초 등등 학설이 다양하지만, 보통 1910년 경술국치를 개화기의 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일본에는 비슷한 시대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다이쇼 시대가 있다. 자국 문물이 난무하던 시기에 서양 문물이 물들어가는 때라서 그런지 일본에는 《바람의 검심》 등 그때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으며 한국에서도 이 시대를 다룬 작품은 상당히 많기는 하나, 그와 별개로 개화기 자체가 외세의 침탈로 나라가 먹혀갔을 시기인데다가 내부적으로도 동학농민운동, 단발령등으로 흉흉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흑역사로 치는 시각이 많다.
소위 구한말과도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1] 해당 문서도 참조할 것.
2 개화기에 일어난 변화
개화기라는 이름답게 다양한 분야들에서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덕분에 역사 시간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 외우느라 중고등학생의 뇌는 나가버렸다. 이 때문에 근현대사를 싫어하게 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개화기 중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때를 '개혁'이라고 해서 따로 지정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개혁들이 개화기 때 일어났다.
- 갑오개혁 - 갑오개혁은 최근 교과서에서 1차와 2차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 을미개혁 - 갑오개혁과 싸잡아서 갑오개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갑오 3차 개혁이라고도 부른다.
- 광무개혁 -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직접 주도한 개혁이다.
2.1 정치제도적 변화
- 민주화의 시도
-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발표되었던 개혁 정강 14개조에서 급진 개화파 세력은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라는 문장을 실어 입헌군주제를 시도하려 했다. 1894년, 갑오개혁을 진행할 때에는 정부 사무와 왕실 사무를 각각 의정부와 궁내부로 분리하여 입헌군주제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독립협회의 활동 기간 중에는 실제로 입헌군주제의 실현이 성공할 뻔했다. 1896년에 설립된 독립협회는 꾸준히 자유민권운동을 진행해오며 연좌제 폐지 운동, 피고의 인권 존중 운동 등을 진행해왔다. 실제로 "칙임관은 정부에 뜻을 물어 과반수가 동의하면 임명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헌의 6조가 황제의 재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1898년 10월, 드디어 중추원 관제가 선포됨으로써 자그마치 조선 최초의 의회가 설립되었다! 는가 싶더니... 보수파 세력이 고종에게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추종한다고 모함하여 고종이 황국협회를 동원,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켜버렸다. 그렇게 조선은 민주화에 실패하였다.[2][3]
정신 차려! 어차피 모든 건 대한제국 선포 때부터 끝났어![4]
- 정치기구의 신설
-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정치기구를 신설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880년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 이 기구 산하에 12사를 편성하여 초기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 군제개혁
- 유럽의 군대를 모방하여 서구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중구난방으로 하다가 결국 실패.
2.2 사회문화적 변화
- 교육계의 근대화
- 서구 문명과 접촉하는 일이 잦아진 조선 정부는 전문 통역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동문학. 1883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묄렌도르프의 주도로 세워지게 된다. 하지만 이를 최초의 관립학교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통역관 양성소 느낌이 진하여 보통 최초의 관립학교라고 하면 육영공원을 떠올린다. 1886년, 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의 건의로 세워진 육영공원은 말 그대로 "육영", 영재를 육성하는 진짜 관립학교였다. 대상은 주로 상류층 자제였다. 참고로 이 학교의 선생님이 그 유명한 헐버트.
- 또한, 근대적 교육을 받기 위한 민간의 노력 역시 존재하였으므로 개화기 시대때는 수많은 사립학교가 세워지게 된다. 최초의 사립학교는 원산학사. 1883년, 덕원부사 정현석과 원산 주민이 합세하여 세운 이 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학교라고 평가받는다. 특징은 문예반과 무예반을 따로 편성하여 교육했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가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창 들어올 시기이다 보니 선교사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역시 빈번하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등이 전부 이 시기에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학교. 그 외에도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대성학교, 오산학교, 휘문, 양정, 숙명, 진명, 보성 전문 학교 등이 있다.
- 서구 예술의 유입
- 기존의 고전시가와 고전소설의 형식을 탈피한 신체시,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1906년)을 필두로 하여 이해조의 《자유종》(1908년),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10년) 등의 신소설이 꾸준히 등장하였다. 최초의 신체시는 잡지 《소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년)이다. 개화기에 등장한 문학 작품들은 대부분이 순 한글로 되어있으며 언문일치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상당수의 작품이 신식 교육, 여권 신장, 신분 의식 타파, 자유 연애, 문명개화 등을 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작가들은 문명 개화에 집중한 나머지 의병 활동을 비난하거나 일본의 정치 선전에 동원되어 친일적 색채를 띠는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2.3 경제적 변화
개화기가 되면서 쇠퇴하는 것이다. 쇠퇴하게 된 다른 하나는 바로 왕조 그 자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으로 흥선대원군을 까지만, 일본이 개화할 때 일본이 예외적으로 개항을 잘한 데다가 하필 그 시기에 열강들이 각자 사정이 바빠 일본에 신경을 쓰지 못해 성공한 것이지, 대부분의 경우 개항과 통상이 경제 성장이나 기술 개발보다는 선진국에 의한 수탈로 이어졌다. 대외의존도가 높지 않아도 그럭저럭 사는 나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인도.[5] 그 말인즉슨, 무조건 '폐쇄=악, 개방=선'이 아니라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쩌다 보니 개항 늦게 한 게 악재로 작용했을 뿐이더라는 것이다.
- 수공업의 쇠퇴
- 일본, 청나라에서의 신문물 수입으로 인해 조선의 수공업이 망한다. 영국제 면포인 옥양목이 들어왔는데, 무명에 비해 가격에 거의 차이가 없고 성능은 훨씬 좋은 등 대량 생산된 외제 물품이 국산품의 성능을 앞질러 수공업이 거의 망하고 만다.
- 상업의 쇠퇴
- 농촌의 몰락
- 일본 상인들이 쌀 가지고 장난질해서 농민들은 빚더미에 나앉았다. 그 장난질이 바로 그 악명 높은 입도선매이다. 말 그대로 쌀이 서기도 전에 쌀을 사간다는 것으로, 쌀을 수확하기도 전에 미리 돈을 받고 쌀을 수확하면 그대로 쌀을 넘기는 방식이다. 이 입도선매로 인해 당장 돈이 급한 농민이 쌀을 미리 헐값에 팔아넘겨 많은 농민들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이로 인해 몰락한 농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매도하였고 그 결과 지주 및 상인이 토지를 집중 소유하는 불건전한 경제 구도가 자리 잡았다.
-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1883년에 맺어진 조일통상장정 제37관을 근거로 들어 방곡령을 선포했고, 방곡령 선포가 황해도와 경상도 등지로 확산되었지만 일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1개월 전에 미리 대사관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금 11만 원을 뜯어내는 역관광을 시전하는 등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
2.4 생활환경적 변화
모두 알다시피 개화기는 서구 문물이 조선으로 쏟아 들어오는 시기였다. 다음은 개화기에 유입된 서구 문명을 정리한 것이다.
- 전차: 한국에서는 1898년 처음으로 청량리∼서대문 간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부산 및 평양에도 그 후 개설되었다.
- 철도
- 전구: 1887년, 경복궁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 가로등: 1900년, 한성 전기 회사가 종로에 가로등 3개를 단 것이 그 시초.
- 성냥
- 전보
- 전신
- 전화
- 수도
- 우편
- 사진
- 근대식 신문
- 민중들을 계몽하기 위해 여러 신문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의 신문들은 순 한문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게 국문으로도 출판되었으며, 몇몇 신문들은 영문판으로도 출판되었다. 이러한 신문들은 국민들을 계몽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특히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활동에 도움을 주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항일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에 이완용 내각이 신문지법을 공포해 언론사를 탄압하면서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폐간되고 만다. 서구식 신문은 국민들을 크게 계몽시켰으나 의병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한계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개화기 때 발행된 신문들은 다음과 같다.
- 《한성순보》: 1883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박문국에서 10일마다 출판. 순 한문으로만 쓰였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
- 《한성주보》: 7일마다 출판된 국한문혼용 신문.
- 《독립신문》: 최초의 민간에서 출판한 신문이자 일간지. 해당 문서 참조.
- 《황성신문》: 해당 문서 참조.
- 《제국신문》: 부녀자들을 타깃으로 한 신문으로 순수하게 한글로만 적혀져 있었다.
- 대한매일신보 - 해당 문서 참조.
- 스포츠의 전파
- 테니스: 거문도 사건 때 영국군이 테니스장을 지으면서 전파되었다.
- 야구: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을 세우고 야구를 전파하였다.
- 축구: 1882년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의 승무원이 처음으로 축구를 선보였으며 1896년 황성 축구 구락부라는 최초의 선수단이 생겼다.
- 농구: 1907년 질레트가 소개했다.
3 개화기 사건
개화기에 일어난 사건들 목록이다.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변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의 한국사와는 비교도 안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것의 2배 정도 되는 단체들이 조직되고 그 단체 수의 2배 정도 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기록이 비교적 잘 보존되면서 망했어요. 거기에 연도까지 더하면 그랜드슬램 달성.
- 조일수호조규(1876.02.27): 강화도 조약을 유식하게 말한 것이다. 아는 척하고 싶을 때 한번 써 보자.
- 조미수호통상조약(1882.05.22)
- 조청수륙무역장정
- 임오군란(1882.06.09)
- 갑신정변(1884.12.04)
- 제물포조약(1882.08.30)
- 한성조약(1885.01.09)
- 동학농민운동(1894.02.10)
- 갑오개혁(1894.07.27)
- 을미사변(1895.10.08)
- 을미개혁(1895.10.08)
- 아관파천(1896.02.11)
- 을미의병(1895.11.26)
- 대한제국 선포(1897.10.12)
- 을사늑약(1905.11.17)
- 을사의병(1905)
- 정미의병(1907)
- 국채보상운동
4 개화기 인물
- 개화기 때에 활동한 인물들.
- 고종
- 김구[6]
- 김봉학[7]
- 김옥균
- 김홍집
- 명성황후 민씨
- 민영기[8]
- 민영익
- 민영환
- 민종식[9]
- 박영효
- 박정수[10]
- 서광범[11]
- 서상돈[12]
- 서재필
- 손병희
- 순종
- 신돌석
- 신채호
- 안병찬[13]
- 안중근[14]
- 안창호
- 어니스트 베델
- 어윤중
- 이동휘
- 이완용을 포함한 을사오적, 정미칠적
- 이하영[15]
- 유길준
- 유인석
- 윤치호
- 원용석[16]
- 이상설
- 이상재
- 이상철
- 이승만[17]
- 이위종
- 이준
- 이한응[18]
- 장지연
- 전봉준
- 정환직
- 조병갑을 포함한 구한말의 탐관오리들
- 조병세
- 조병식[19]
- 주시경
- 지석영
- 최시형
- 최익현
- 한규설
- 헨리 아펜젤러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호머 헐버트
- 홍계훈
- 홍만식
- 홍범도
- 홍영식
- 홍종우
- 황현
- 흥선대원군
5 개화기에 대한 평가
5.1 긍정적 평가
한반도 최초의 신분 제도에 대한 법적 철폐가 이 때 이루어졌다.
5.2 부정적 평가
주체적으로 개화하려는 모습이 부족했고 일본에 의존한 갑신정변이나 일본의 압박에 의해 시작된 갑오개혁 등에서 일본등의 외세에 휘둘리는 모습이 보인다.
6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
-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 《노다지》[20], 《이화》,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먼동》, 《김구》[21]《찬란한 여명》
- 닥터 진
- 명성황후(드라마)
- 명성황후(뮤지컬)
- 제중원
- YMCA 야구단
- 대한제국일본침략사
- 조선총잡이
- 제중원
- 불꽃처럼 나비처럼
- 그림자 살인
- ↑ 시기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
- ↑ 사실 가능성이 있었다는 게 황제의 동의가 있었다는 건데, 아무리 잘 봐줘도 황제가 변심한 것이므로(황국협회는 어용단체다) 가능성은 원래 없었다.
- ↑ 이런 성공에 고무된 나머지 박영효추천등 민중이나 황제나 모두 염증을 느낄만한 무리수를 많이 둔것도 실패의 원인중 하나다
-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한국 국제 선포 이후이다.
- ↑ 오히려 인도는 경제를 닫으면서 더 나아진 측면도 있다. 오죽하면 간디가 물레를 돌렸을까.
- ↑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 참여.
- ↑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의병에 참여하였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의 살해를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음독자결하였다.
- ↑ 대한제국의 탁지부 대신으로 을사늑약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변절하였다.
- ↑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충청남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의병으로 활동했다.
- ↑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다.
- ↑ 국채보상운동 주도.
- ↑ 을사늑약 체결시 법부의 주사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 ↑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농민군을 진압하신 적이 있다. 이때가 바로 그분의 흑역사(...).
- ↑ 을사늑약에 반대한 대신이였지만, 나중에 변절하였다.
- ↑ 을사의병
- ↑ 독립협회 참여
- ↑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강탈당하자, 자결하였다.
- ↑ 방곡령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수탈할 미곡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후 조병식은 충청 감사가 되어서 동학도들의 애절한 호소를 그냥 다 씹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이후 이리저리 좌천당했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탐관오리 일직선. 나름 지조있는 탐관오리 인생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직 고종의 전제왕권유지와 독립협회를 때려부수는것만 목적이었던 정치깡패 집단인 황국협회의 간부가 되어 직접 독립협회를 때려부수고 민권운동을 탄압했다. 그야말로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닌 구한말 최악의 천하의 개쌍놈이다.
- ↑ 정확하게는 초반부 부분
- ↑ 역시 초반부 부분 애초에 1875년에 태어났다 보니 자연히 개화기를 다루는 부분이 없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