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

事大主義 / Flunkyism / Toad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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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사에서, 큰 나라(, 즉 중국)을 섬기는 것()를 중심으로 하는 외교정책. 또는 발전한 타국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일본의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 대학교 교수는 이 단어가 일본 학자들이 한국을 경멸하기 위해 만들어온 말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관련기사

2 내용과 비판

최영: 고려 사람이 왜 남의 나라를 지성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오이까?!

정몽주: 그것은 약육강식의 천하에서 소국이 살아남는, 생존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정도전 24화에서 나온 최영과 정몽주의 대화 중 일부이면서 사대주의에 대한 찬반론자의 의견을 간단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서구의 식민주의 프레임에 동아시아 외교관계를 꿰어 맞추면서 "한 국가가 자율성을 포기하고 강한 국가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사상 또는 외교방침"을 개념화하기 위하여 창안되었다.

본래 국제 관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건 청동기 시대에 고대 국가가 등장한 이래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동서양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적용된다.

중국진시황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인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거대권력이었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뒤쳐지게 된 근대를 제외하면 기나긴 역사 동안 중국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월등히 한반도 국가를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이득이었지, 쓸데없이 적대정책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중국이 한반도를 침공할 군사력을 가진 시대는 한나라와 당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기는 하지만, 중국의 한족 통일 왕조와의 교류는 전통적으로 사대의 형식으로만 가능했으며, 신하를 자처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동등한 관계에서의 외교란 불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대"는 외교의 한 형식일 뿐이었고, 한족과 맞짱떴던 무수한 이민족 국가들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정복했다가도 대부분 동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1], 한반도 국가들은 맞짱떠서 중국을 정복한 적도 없고, "사대"의 형식으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문화,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의 최첨단 중심지였기 때문에 저 큰 형님이 실제로 학식도 높고, 귀한 물건도 많고, 저렇게 적당히 비위 맞춰주면 그럭저럭 너그럽게 배풀기도 하는 편이라 보면 된다. 현실적인 입장에서 친하게 지내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중국은 동아시아의 질서에서 현재의 미국에 못 미치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자주성을 지상으로 삼아 중국과 적대를 계속 해왔다면, 고구려처럼 문화가 사그라들어[2] 결국은 만주처럼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대가 형식적인 치레였을 뿐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은 나당전쟁의 예로 알 수 있다.

게다가 지정학적으로도 일본처럼 고립된 섬나라라면 상관없겠지만, 한반도의 경우 몽골고원 등지에서 꼬리를 물고 발흥해온 세계 최강의 전투 민족[3] 들과 심심치 않게 맞닥뜨려야 했으며, 어쨌건 조선시대부터 패권 국가가 자리잡아온 중국을 국경에 맞대고 있는 국가다. 이런 독보적인 강대국 중국이나, 혹은 이런 강대국 중국조차도 떡실신시키던 몽골족이나 만주족과같은 전투민족들이 한반도로 침공해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가 종말하는 공포스러운 사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사대는 필수적인 전략의 옵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세계사를 보면 어떤 지역의 강대국을 박살낸 유목민족은 주변 지역들도 죄다 초토화를 시켜버리는 경우가 많았다.[4]

더구나 전력으로 보면 기병은 당시 전차, 장갑차, 험비나 마찬가지라 그런 걸 수만 대 혹은 수십만 대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유목민족들과 그런 유목민족들을 매수하여 이간질, 분열시키거나[5] 고전시킬 수 있는 농경 대제국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역사에서 로마제국의 사례만 봐도 로마 같은 우수한 문물, 거대한 규모를 가진 농경 제국조차 정상적으로 어느 정도 돌아가는 농경 제국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6] 세계사적으로도 주변의 제국들에게 사대 비슷한 것들을 하는 민족들이나 나라는 널렸었다. 상식적으로 세계사만 봐도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같은 제국들은 주변국들과 교류를 할 때, 자국 입장을 주로 강요하는 편이었다, 로마 제국과 유대 왕국, 속주들 혹은 페르시아와 이집트, 그리스[7] 같은 관계를 봐도 답이 나온다.

오히려 한반도의 입장에선 차라리 어느 정도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농경 문화권인 중국과 연대하는 것이 여진이나 몽골 같은 유목 민족들의 약탈과 전쟁에 대처하는 데 있어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세 후반 이후로 갑툭튀하여 동아시아 전 해안을 휩쓸었던 왜구에 대한 대처도 그렇고. 다만 현실적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침략에서 송나라가 고려를 도와준 일은 없었긴 하지만, 명나라같은 경우 이만주 항목에서 보듯 여진족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한 경우도 있었고 조선이 왜구를 토벌했다는 명목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명나라에서 이를 치하해 하사한 경우도 있었다. [8]

바다 위에서 대륙과 떨어져 있다는 지형적 조건 덕택에 강대국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 일본은 이러한 역사를 냉소적으로 비틀어 사대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어 역사를 폄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식민학자들은 주로 중국-조선사이의 불균형한 역학관계와 조선 중후반기의 찌질한 모습들을 끄집어와 한국사 전반의 특징으로 결부짓고, 이를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조선통치의 지침서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근대 한국민속학에 상당한 학술적 성과를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일제 식민사학자인 다카하시 도루는 3.1 운동마저도 중국 사대주의에서 미국 사대주의로 전환한 것이라는 망발을 서슴치 않았는데[9], 그들이 조선멸시의 전제로 삼은 일본의 자주 독립이 실제로는 지정학적 여건의 우위와 현실적 국력 차이에 의한 것임을 고려하지 않는 망발이다.

명청교체기 이후에는 청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이 곧 명나라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정신승리법적인 소중화사상이 대두되었다. 사대주의는 큰 나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명나라가 오랑캐(청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조선이 섬겨야 할 '큰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소중화사상의 정서는 명청교체 이후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10]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사대주의와 소중화사상을 "소중화사상과 사대주의에 빠져서…"하는 식으로 세트로 묶어서 조선을 까는 데 사용하면서도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모순이라기보다는 동어반복에 가깝다. 조선의 소중화라는 개념은 왕조는 멸망은 했지만 중화 문화가 여전히 중국 땅에 존재하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보다 대국이니 중화를 여전히 섬기는우리가 바로 사실상의 작은 중화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소인배 나라, 오랑캐 나라, 정신적으로 작은 나라인 청이 정신적으로 위대한 대인배의 나라 소중화 조선에 사대하는 것이 유교원리에 따르면 옳은 것이지만 청나라 오랑캐들은 무식하면서 힘만 센 야만인들이므로 일단 겉으로만 청을 섬기는 척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당시의 사상으로 보면, 청나라는 겉보기에 크기만 클 뿐 결코 대국이 아니었고 수많은 오랑캐 잡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연히 현실적으로는 조선의 20배가 넘는 인구를 갖고 있고 압도적으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더라도,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관념 상에서는 '작은 나라'인 청이 사대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청 건국 이후에도 조선은 '사대주의의 논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사대를 하는 나라에서 받는 나라로 규정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 사대라는 것을 받아본 적은 없고 오히려 거짓으로라도 오랑캐 나라에 사대하는 우스운 지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고려 말, 조선 초에 류큐 왕국의 사대를 받은 사례가 있으므로, 소중화론은 조선 후기보다 조선 초기의 현실에 더 적절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경우 역사적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화하면서 청나라와의 교역, 교류를 방해하였다.

오히려 조선의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질된 것이 조선의 멸망을 가속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송나라나 원나라를 통해 어느 정도는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던 이전에 비해 후기에 들어서는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고, 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사상(북학파)은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뒤떨어진 조선을 발전시킬 방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은 죽은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 뿐이었고, 이것은 1937년(연도의 착오가 아니다!) [11]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단, 여기서 말하는 명나라 황제는 만력제로, 사대주의에 입각해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게 유린당하던 조선을 위해 명나라의 손해를 감수하고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12]

하지만 이것은 만력제를 위해 제사하는 것을 변명이 가능하더라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까지 포함시킨 만동묘나 대보단은 결코 쉴드칠 수 없는 논리다. 이것은 조선이 저혼자 잘났다는 소중화주의로도 해석할 수 없는 단순한 중화에 대한 정신적 종속의 결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사대주의를 가치중립적으로 재정의한 개념으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해서 특별히 단어를 새로 만들 필요도 없는 개념이다. 문제는 사상적 차원을 끌어다 오히려 자국의 입장까지 훼손해가면서 중국을 위해 굳이 사대주의를 변명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면 본 항목에서는 현실주의적 외교사상의 측면에서 사대주의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사대'라는 개념은 일단 유교의 기본 관념 중 하나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식은 부모를 섬기고, 제자는 스승을 섬기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시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충과 효라는 것도 작은 것(신하, 자식)이 큰 것(왕, 부모)을 섬긴다는 사대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사대를 하지 않는 것'은 불효, 불충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상적 이유를 포함하게 되면 현실주의적 외교 논리를 벗어나 조선의 사대주의가 충분히 욕먹을 만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헛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대주의에서 가치경도적인 수사를 제외하고 추려 보면, 패권국가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선진국의 문화를 수입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대주의는 세계 각국의 국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고, 초강대국이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국제 현실에서 모든 국가가 생존 및 발전을 위해서라면 따라야 할 전략이 된 셈이다. 현재의 한국도 21세기 들어 중국의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지는 와중에도 미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외국 군대인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이를 전략적인 지렛대로 활용하기도 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기 위해 국내의 법과 제도를 고치고 선진국의 사례를 본받으려고 노력한다.[13] 실제로 10여 년 전까지도 국내 학계의 대응은 "우리도 자주적 OO가 있었다," 였지만, 근래의 대응은 오히려 "사대주의 그게 무슨 문제임? 당연한 국가전략 아님?"하고 받아치는 추세이다.

3 결론

별 것 아니다. 알고보면 당연한 국가전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했던 실질적 이유는 위 항목에서 논하였듯이 현실주의적 외교 논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위와 같은 사상적 이유 역시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4 관련 항목

  1. 물론 북방 민족이 중국에 미친 문화문물적 영향은 대단히 크다. 바지부터 '호복'에서 기원한 것인데 흔적도 없다고 표현해야 할 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2. 애시당초 고구려도 중국에 대하는 자세 역시 기본적으로 사대였다. 장수왕같이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도 중국에게 신하를 자처하며 조공을 바쳤다. 물론 기본적인 의도는 조선의 그것과 비슷했다. 명분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대신 실리를 챙기는 그것. 다만 중국에서 다시 한족 왕조인 통일 왕조가 들어서자 이전의 사대는 무시하고 한사군의 옛 땅임을 명분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뿐이지만. 하지만 결국 발해의 등장으로 그 의도는 실패했고, 신해혁명 이후에나 고구려의 옛 땅이 한족의 영토가 된다 한때 수당이 영가의 난이나 오호십육국 시대 따위 유목민족에게 지배당하던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예방 차원에서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 것은 중국 본토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고구려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침공한답시고 중국인들이 내세우는 명분으로써 앞뒤도 안 맞고 형편없이 모자란 소리다. 당장 수양제만 해도 예방적 동기에서 강적을 제거하려고 113만 대군을 굳이 동원해야 할 상대는 바로 중국을 수도 없이 침략했던 북방 유목민족이지 한족의 땅에 발도 붙인 적이 없는 고구려가 아니다.
  3.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은 모두 당대 최강의 무력집단들이었다. 중국 정도 되니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몽골이나 만주(여진)족에게는 본토가 털렸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한반도가 중국보다 더 잘 버텨냈다. 한반도가 흉노족에게 침공의 대상이 된 일은 없었고 선비족에게는 고구려의 도성이 털렸을 뿐, 한반도까지 침공당한 일은 없다. 거란, 여진에 대해서도 전연의 맹으로 거액의 조공을 상납해야 했고, 정강의 변으로 아예 수도와 영토의 절반을 잃고 천도한 송나라보다는 잘 버틴 편이다.
  4. 당장 중국을 깨부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한 청나라나 원나라만 봐도 리즈 시절 때에 군사적으로 약하지는 않았다. 특히 중국을 정복하기 전 아직 전투민족의 습성을 보존하던 시절 원나라와 청나라 두 나라가 한번씩 조선을 패배시킨 전적이 있으며, 동남아와 일본 정도가 무사했을 뿐 그 밖의 주변 지역들도 물론 대부분 영혼까지 털렸다.
  5. 물론 돈지랄이기는 하지만 재력과 외교술을 동원하는 것도 엄연한 국가의 능력이다.
  6. 유목 제국이든 농경 제국이든 리즈 시절 때를 보면 굳이 그런 막강한 상대와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그런 넓은 영토를 아무 이유없이 갖게 된 것도 아니라 화약 무기가 퍼지기 전까지는 "훨씬 우수한 문물로 대제국을 지배하는 이웃 민족을 쓰러뜨린다." 이런 것들은 이웃이 자멸 혹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적응 실패 등에 의한 것들로 인하여 무너지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농경민족의 경우에는 유목민족보다 군사적 효율(유목민족은 남자는 곧 전사인 경우가 많아 따로 직업적 전문 군인 양성 비용이 들지도 않으며 그 전문 군인이 기병 역할까지 할 수 있다.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심지어 내전이나 대패로 인하여 인구가 많이 줄어도 전력만큼은 빠르게 잘 모은다.)이 좋지 않았다.
  7.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를 나중에 정복하기는 했지만 마케도니아도 세가 강하지 않았던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때 바로 항복한 적이 있다.
  8. 명사 조선전 정통 9년,10년 및 가정 35년 등 항목 참조.
  9. 3.1 운동이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 발언에 영향받은 것을 이런 식으로 비틀어놓았다.
  10.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
  11. [1]
  12. 만력제는 중국에서 최악의 황제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의 경제 사정이 넉넉한 편이기는 하지만, 명나라의 안보와 별로 관계가 없는 조선에게 불필요하게 막대한 군사비를 들여가면서 지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이익과 무관한 만력제의 개인적인 의지에 따라 수행한 전쟁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만력제의 별명이 고려천자, 또는 조선의 황제다.
  13. "한국 발전은 사대주의(事大主義), 즉 글로벌 스탠더드 따른 덕분", 오코노키 마사오,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