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야마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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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무츠오 사진

1 소개

津山事件

1938년,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일어난 연속살인 사건. 쓰야마 사건, 혹은 쓰야마 30인 연속살해사건(津山三十人殺し) 등으로 불린다. 일본판 우순경 사건 사건의 자세한 경과에 대해서는 참조.

통칭 쓰야마 사건이라고 하지만, 사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정확하게는 당시에는 쓰야마시 외곽의 니시카모 마을이었다. 오늘날에는 쓰야마시에 편입되어 있기는 하다.

2 결핵과 여자에 대한 증오

범인인 도이 무츠오(이하 도이)는 그 마을에서 상당히 잘나가던 남자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성적도 괜찮았고,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쓴 동화같은 걸 읽어주어서 인기가 있었다. 또 근방의 여자들 하고도 이런저런 관계를 가질 만큼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1937년 그는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검사결과는 결핵으로 인한 불합격. 그런데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불합격으로 도이가 마을에서 손가락질 당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작성자가 그 당시 일본 민중의 인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작성한 것인 듯하다. 도이가 마을에서 소외당하고 여자들이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 이유는 징병 불합격이 원인이 아니라 바로 결핵 때문이다.[1] 그 당시 결핵에 걸리면 변변한 치료약이 없어서, 부모형제들까지 전염을 우려해 외면할 정도였는데, 하물며 이성관계의 파탄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난치성 질환에 가깝다 보니, 병세가 심해지면 결핵 환자만 수용하는 요양원에 죽을 때까지 수용해두는 게 보통이었다.[2] [3]

사건 70주년이 된 2008년에 일본의 한 시사프로의 취재에 의하면, 도이는 본래 마을의 한 여성과 약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었지만, 도이의 폐결핵 때문에 그 여성은 다른 마을의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고, 이것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4]

어쨋든 여성이 자신을 피하는 상황이 되자, 도이는 여자들에 대한 증오가 싹텄고, 그 증오는 점점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옮겨가서 ,수렵 면허를 취득한 뒤 수렵용 총기를 사들여 총기 연습을 하여 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그런 가운데 그의 할머니는 도이가 할머니의 치료를 위해서 된장국에 약을 타는 모습을 보고, "손자가 나를 독살하려 한다"라고 경찰에 호소하는 바람에(...) 경찰의 가택수색에서 일본도와 총 등의 무기들이 압수되었고, 수렵면허도 취소되었다.

하지만 도이는 지인을 통해 다시 엽총과 탄환을 구입하고, 도검류 수집가에게 일본도를 몰래 사들이는 등 다시 무기를 모으고 범행을 저지를 날을 기다렸다.

3 범행

결국 1938년 5월 21일, 도이는 일본도와 비수, 개조한 9연발 브라우닝 엽총을 들고 범행에 나섰다. 가장 먼저 그의 할머니를 도끼로 살해한 뒤, 이웃집들을 차례대로 쳐들어가서 보이는 대로 칼을 휘두르거나 총을 발사했다. 마을의 11채의 집에 쳐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는데, 대부분의 피해자가 16세 미만의 어린이나 미성년들이었고, 일부 주민들은 그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재빨리 피해서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날 새벽에 무려 30명(현장에서 즉사 28명, 이후 사망 2명)이 살해되었다.

1시간 30여분에 걸친 범행 뒤, 도이는 뭔가 생각난 게 있었는지 인근 마을의 집에 무작정 들어가서 연필종이를 달라고 요구했다. 피투성이인데다가 일본도와 총을 멘 그의 모습에 집주인은 얼어버려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다행이 집주인의 아이가 도이로부터 동화를 들은 적이 있어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던 탓에, 아이가 얼른 연필과 종이를 주었다고 한다. 이때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무언가를 종이에 쓰고 떠났는데, 그는 떠나면서 아이에게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는 말을 남겼다고(...)

이후 도이는 3.5km 떨어진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 유서를 썼다. 유서에는 애당초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가 그와 교제하다가 다른 마을로 시집간 여자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걸 보고 범행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실제로 그는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한 것 같지만, 그 여자는 도망치고 대신 그 여자의 가족이 살해되었다. 또한 자신을 괴롭힌 마을 사람을 죽이려 했지만, 이사를 가거나 출타한 탓에 엉뚱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자책하는 내용도 담겨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선, "살인자의 할머니로 살아가게 할 수 없어서"라고 적었다.

유서를 다 쓰고 난 후 그는 엽총을 심장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4 후일담

  • 사건을 조사한 결과, 도이는 치밀하게 범죄를 계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마을에서 일이 일어날 경우, 자전거로 이웃마을 카모쵸에 있는 주재소(駐在所)[5]까지 얼마나 걸리는가를 조사해둘 정도였고, 사건 전날에는 몰래 마을을 정전시켜서 범행을 더 용이하게 만들려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 워낙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일본에서는 중일전쟁중이었음에도 큰 이슈가 되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경찰이 너무 안이하게 위험한 인물을 내버려둔 게 아닌가, 라고 비판하기도 했고, 혹은 이 사건이 1913년에 독일에서 일어난 바그너 사건과 흡사해서, 도이를 의학적으로 연구했어야 했지 않나, 라는 아쉬움 비슷한 의견도 있었다.
  • 마을 주민들에겐 악몽의 날이었고, 일가족이 몰살당하기도 해서, 농업을 기반으로 하던 마을 주민들의 형편은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더욱이 도이의 친척들은 계획을 미리 알고 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 마을에서 거의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 도이가 자살해버린 탓에 사건에 대해서는 생존자들의 증언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생존자들이 대부분 사망자들의 친척이거나 지인들이었던 탓에, 객관적 증언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기는 하다. 특히 도이와 관계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은 극구 그런 사실들을 부인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징병검사에서 불합격한 도이를 마을 주민들이 괴롭히거나 놀린 것이 사건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6]
  • 70년 후인 2008년, 주간 아사히에 90대가 된 익명의 생존자의 증언이 소개되었다. 그에 의하면 마을이 정전된 뒤, 도이는 청년들과 함께 자기 집 뒤편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다만 그는 도이와 여자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정했지만, 그의 부인도 도이와 사귄 듯해보여서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증언인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달렸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워낙 임팩트 있는 사건이다 보니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팔묘촌을 집필하기도 했고, 이 사건 자체를 영화화 한 "한밤중의 마을"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시마다 소지의 소설 용와정 살인사건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로, 적당한 상상을 가미해서 당시의 상황을 매우 공들여서 재구성해 놓았다. 사이렌에서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듯한 "xx마을 33인 살인사건"이 등장한다. 그밖에 이 사건에서 파생된 걸로 보이는 도시전설 스기자와 마을 이야기도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사건을 다뤘는데, 여기서도 결핵으로 인해 외면을 당해 이러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의견으로 방송을 했었다.

6 트리비아

일본 내 혐한들은 쓰야마 사건이 기네스 기록에 올라서 무척 자존심 상해하다가, 한국에서 우범곤의 사건이 일어나며 그 기록을 경신하자 쾌재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답이 없는 혐한들.[7]
  1. 의외로 농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징병기피가 잦았다. 징병대상자가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 경찰이나 헌병이 마을로 직접 잡으러 왔는데, 그때마다 주민들이 대상자들을 산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2. 요양원에서는 매년 결핵이 완치된 사람을 추리는 퇴원 심사를 하지만 낫는 사람이 드물었고 이 심사에 떨어지면 절망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3. 요즘의 에이즈에볼라처럼 생각해 보면 될 듯.
  4. 도이는 이 여자를 죽이려고 쫓아다녔고, 이 여성이 구원을 청하려고 마을 이집 저집을 다녔던 것이 결과적으로 수십 명이 희생되는 참극으로 연결되었다고. 그러나 도이는 차마 이 여성은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5. 경찰, 당시 용어로 순사가 머무르며 업무를 보던 곳. 지구대나 파출소와 비슷한 개념
  6. 당시 군국주의가 만연한 일본의 현실에서, 징병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자격이 없는 걸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일본이 1930년대 태평양 전쟁을 터뜨린 이후에는 군에 가지 못한 남자를 비하하는 말로, 비국민非國民, 즉 황국신민의 자격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비국민을 보는 시각이 부락민과 비슷할 정도. 다만 이건 도시나 그 인접한 지역의 이야기이고, 도시와 먼 지역으로 갈수록 군국주의의 프로파간다가 약해지는데, 메이지 정부 성립 이후 벌어진 각종 강압적인 개혁정책으로, 농촌지역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는데다가, 농부들 입장에서는 마을 전체가 굶지 않기 위해, 농사를 지을 젊은 일손 1명이 절실했지, 징병의 명분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7. 우범곤 사건은 희생자가 제일 많은 연속 살인사건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후 모방범죄를 우려한 기네스북 측에서 범죄 관련해서는 기록하지 않기로 하면서 기록 자체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