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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這い
목차
1 소개
사전적 이야기는 "밤중에 성교를 목적으로 모르는 사람의 침실에 침입하는 일본의 옛 풍습"을 말한다.
요바이라는 어원은 애초에 '부르다'는 뜻의 동사 요부(呼ぶ)에서 비롯되었으며, 구혼을 위해 남자가 여자의 침소에 들어가는 행위를 의미했다. 일본의 옛 혼인풍습은 결혼후에도 남자가 여자 집에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이 때문에 이러한 행위도 요바이라고 불렀다. 동정을 떼는 관습은 후데오로시(ふでおろし:筆下ろし)라고 일컬어졌다.
고대 일본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측되며, 100년 전에 메이지 정부가 없애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50년이 지나서야 없어졌는데, 요바이가 부모나 상대의 허락없이 이성의 침실에 몰래 침입하는 불순한 행위를 가리키게 되어 배덕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풍습이 완전히 사라진건 겨우 60년 밖에 되지 않는다.
2 요바이의 과정
2.1 결혼의 수단
혼기가 찬 여성의 경우, 지역유지인 촌장의 공인 아래 요바이가 성립되었다. 해가 질 무렵 즈음, 남성이 여성의 집에 방문하고 여성이 딱히 반대하지 않거나,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제지하지 않으면 성립된다. 보통 3~4일 정도 요바이가 이루어진 뒤 촌장의 공인 아래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
만약, 한명의 여성에게 여러명의 남성이 구혼을 하게 되는 경우, 촌장의 주관 아래 밤에 숨어들기를 할 사람들의 순서가 정해지고, 특정 남성이 요바이를 해야 하는 날, 주변에 도움을 요구해 보초를 세워 그 남성이 숨어 드는 것을 적발해내면 그 남성은 물러나야 했다. 바꾸어 말하면 보초를 세워 요바이를 막으려 해도 다 뚫고 들어오면 팔자이려니 하고 수용해야 했다.실시간으로 히트맨을 플레이했다 이말인가[1]
중요한건 할거 다하고, 해가 뜰 무렵에 들키기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때까지가 요바이다. 빠져나오다가 걸리면 실패한 것으로 친다.
위와 같이 결혼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요바이는 메이지 유신이후 가속된 선진문물의 보급으로 인한 의식변화와 전구의 보급 후 성공률이 거의 제로로 떨어지면서, 도시에서는 모습을 감추었고, 1970년대에 지역유지간의 정략결혼의 이유로 보도된 몇건을 끝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선 나오지 않고 있다.
2.2 혼음의 수단
전쟁이나 화재, 지진등의 천재지변으로 촌락의 과부수가 일정 이상이 되면 촌장이 허가한 경우에 한해 요바이가 진행된다. 대상은 혼기가 찬 여성을 포함해 젊은 여성과 과부, 신분이 낮은 여성과 전문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유모 등에 국한되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규칙이 적용되었다.
- 가족 외의 남성과 동거하지 않는 여성일 것
- 사는 집 주변의 여성이 아닐 것
- 아이가 생기면 아버지의 지명은 여성이 할 것
- 여성의 거부권은 존재함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혼음을 허가하는 요바이의 경우, 위의 규칙이 대개 엄격히 적용되었다. 이유인 즉슨 가족 외의 동거남이 있는 경우 동거남이 여성과 알아서 해결할 문제였기 때문이고, 사는 집 주변에서 금지한 것은 남녀의 질투라거나 처신 문제로 치정문제가 생길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길 경우 아이 아빠를 지명할 권리를 여성에게 주어 육아문제 등에 대한 부담을 남성 쪽에 넘기는 제도적 안전장치도 존재했고 무작정 밤일하러 다니는 사람을 거부할 지명권도 보장이 되었다. 의외로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성의 지명권은 요시와라에서 활동한 전문 직업여성인 유녀(오이란花魁)들도 가지고 있었던것으로, 이치케타야를 거쳐 이루어진 초회에서 손님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물론,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엄격히 적용되었다는 것이니 무조건 적용 된 것은 아니다. 요바이를 관장하는 촌장이나 지역유지에 의해 부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거나 예외사례등이 그때그때 다르게 진행되었다. 결혼 한지 수년째 임신소식이 없는 경우 요바이의 대상으로 지명된다거나, 축제행사의 일환으로 하룻밤 동안 알아서 하라고 선언되는 등, 그때그때 나온 케이스가 다르다.
혼음의 수단으로 요바이를 진행하는 여성은 남자를 기다리며, 집의 문을 열어두고 찬밥과 먹거리등을 준비해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가는 남성에게 제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고 한다.
3 이유있는 요바이
전세계를 찾아도 요바이만큼 자유에 기반하는 성문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 부족사회의 문화에 기인하는 요바이는 오래 유지된 전란으로 인해 남성의 수가 줄고 미망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성풍습은 지구촌의 어느 부족사회에서도 종종 있었던 풍습이었다.[2]
그렇다고 옛 일본의 성풍속을 단순히 문란하다고만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립된 섬에서 끊임없는 전란으로 인해 남자가 줄고 미망인이 속출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뿐이다. 고대 일본은 이러한 자유로운 성풍속을 통해 인구의 증가, 근친상간의 방지, 미망인에 대한 구제 등을 계획했던 것.
즉, 요바이(夜這い)는 옛 일본의 공동체 사회를 위한 성풍습이었다. 인구의 증가와 미망인에 대한 구제, 지역사회의 유지인 촌장의 권위확대 등의 목적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저 만들어 진 요바이는 노동력의 확보와 부양가족의 재구성, 병사의 충원등을 위해 권장된 만큼 여성쪽이 중심이 되는 거부권이 존재해 지역사회의 붕괴를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존재했다. 사회유지를 위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풍습인 만큼 여성쪽의 선택권이 강화되었으며 보통, 일본을 무대로 한 창작물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하루 머물고 가라고 권할 때 주변에서 크게 놀라는 것은 단순한 성풍기 문제가 아니라, 요바이를 허가해주겠다는 의사표현으로 해석되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일본의 부부관계는 부인이 결혼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였으며, 남녀는 각자 따로 살고 부인의 집에 남편이 들어갔다 나오는 형태였다. 또 요바이는 일반적으로 서민의 풍습이었으나, 무사계급에서 행해지기도 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처소에 드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예전의 일본의 농촌에서는 "마을의 젊은 아가씨와 과부는 젊은이들 차지"라는 말이 있었다. 근대 이전의 농촌에서는 마을의 젊은 남성들이 마을 내에 특정한 룰을 정해 요바이를 했었다. 룰을 무시하고 다른 마을의 남자가 요바이를 하러 오면 이들이 격퇴하기도 했는데, 이 때 심한 경우에는 침입자가 반죽음 상태가 되기도 했다.
4 요바이의 쇠락
일본사회에서 요바이가 사라진 것은 불과 50~60여년전에 불과하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진행한 메이지 정부는 요바이 풍습을 없애려 했으나 실패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인 195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소멸하기 시작했다. 일각에선 일본특유의 삐뚤어진 성문화가 출범한 시기와 요바이가 쇠락하게 된 시기가 동일해, 요바이의 쇠락 = 일본성문화의 막장화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4.1 요바이가 쇠락한 이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선진문물이 들어오며 성관념과 성의식 전반에 대한 변경이 진행되었고, 전구가 보급되며 요바이의 성공률이 크게 내려가 점차 쇠락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바이의 중요 조건 중 하나가, 경비를 세워놓았는데도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와 할거 다하고 빠져나간거면 포기하자인데 전구가 보급되어 들키지 않고 숨어 드는 것이 불가능해져 성공률이 크게 내려간 것도 포인트다.
또 오락 수단의 다양화도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된다. 과거 시골에서는 일종의 '오락수단'으로서 요바이가 행해졌다는 것이다.
5 에도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일화
에도 시대 중기, 전국적으로 축제를 빌미로 한 야외의 혼음이 허용되었는데, 이 시기를 잘 노려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진후 회임에 성공할 경우 상술한 대로 아버지를 제일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지명해 신분상승과 노후 보장이 이루어지는 신데렐라급의 로또가 터질 수 있었다. 이는 아이를 한 사람의 개체보단 노동력 = 공동재산으로 여기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며, 결혼 후에도 요바이를 이유로 다른 남성과 관계를 가질수 있었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
사실, 요바이는 시골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비슷하게 행해졌다. 에도 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축제를 빌미로 야외에서 많은 남녀들이 혼음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는데 어떠한 불륜이나 방탕함도 비난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높은 신분의 남성과 사귀기를 기대했다. 때문에 도시에서의 요바이는 신데렐라의 꿈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6 민속학 연구
요바이는 시대적 지리적에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낮선 손님이 마을에 찾아오면 그 손님에게 여자를 내어주기도 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밤에 빌려주는 곳도 있었다. 손님이 아내를 거부하면 그 여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말도 들려온다. 또 아이를 공동재산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임신을 하면 여성이 지목하는 사람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으며, 결혼 후에도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므로, 일본의 여성들은 결혼에 대해 큰 부담이 없었다고 한다.
요바이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강간인가, 상대방도 어느 정도 동의한 후에 이루어진 행위였는가, 또는 상대는 불특정 다수였는가, 아니면 서로 사전에 파트너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는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이 모든 상황이 그 당시에 혼재되어 있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赤松啓介)가 쓴 '요바이의 민속학'(夜這いの民俗学)(1994년, ISBN 4480088644)에 따르면 과거 전통 성인식 겸 성교육의 일환으로 남자아이는 褌祝(훈도시이와이), 여자아이는 요바이(夜這い)를 치뤘는데 자식의 온전한 첫 경험 상대가 없는 경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신해 자식의 상대를 맡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소년끼리 서로의 어머니의 "맛"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딸이 어머니의 밤의 상대를 끌어들이는 사례 등이 요바이의 민속학 pp. 3-4에 보고되어 있다.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는 음풍누습(淫風陋習)[3]이라고 비판했다. 비교 문학자 고야노 아츠시(小谷野敦)는 저서인 '에도 환상 비판'(江戸幻想批判, 신요사, 1999년 12월.ISBN 4-7885-0698-X)에서 요바이는 남성에 의한 일방적인 성문화가 내재되어 있으며 강간이나 데이트 강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며 결코 '남녀 평등의 프리 섹스'가 아니었음을 말했다.
민속학자들의 경우 옹호론과 비판론이 갈리는데 비판론에서는 작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성의 성착취로 바라보며. 핏케언 제도 집단 성폭행 사건 같은 닫힌 사회의 인습으로 취급한다.
7 사례
- 일본인들은 지금도 이 요바이 문화에 대한 환상 비슷한 게 있는지, 헬스 등등 많은 유흥업소에서는 요바이 상황을 연출하는 상황극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요구하면 역(逆) 요바이도 가능한 모양(...)
- 창작물에서도 자주 구현되어, 현대에 들어선 야구 동영상, 에로 동인지나 상업지의 훌륭한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걸 자주 접하는 신사들이라면 '여자가 잠자는 방에 슬쩍 들어가 응응하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밤중에 연인과 관계를 맺으러 몰래 찾아오는 시추에이션도 그냥 요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츠야마 살인사건의 범인 도이 무츠오는 이 풍습으로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징병신체검사에서 탈락하면서 폐병(폐결핵)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져 거부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좌절감이 범행의 동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 ↑ 가상의 이야기지만, 해황기에서 판 감마 비젠이 지고 사나리아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 요바이와 같은 룰의 도전을 해쳐나가야했다
- ↑ 이는 옛 몽골인이나 이누이트 인들도 가지고 있던 풍습이었다.(다만 이누이트의 경우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1960년에 나온 안소니 퀸 주연의 '야생의 순수'라는 영화에서 이누이트를 방문한 선교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집 부인과 잠자리를 주선한 사건 때문에 투닥거리다가 선교사가 과실치사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 유럽 일부 지역에서도 일본의 요바이와 비슷한 관습이 행해졌다고 한다. 다만 완전히 비슷하지는 않으며, 이 역시 2차대전을 전후해서 사라졌다.
- ↑ 음란하고 나쁜 관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