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 전쟁

1 개요

congo_war_8.jpg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2차례의 전쟁. 1차 콩고 전쟁(1996~1998)과 2차 콩고 전쟁(1998~2003)으로 나뉘어 있다. 특히 2차 콩고 전쟁은 아프리카의 8개 국가와 25개 무장 단체가 연관되어 베트남 전쟁 이후로 최대의 사상자를 낸 전쟁으로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상자가 공식적인 통계는 500만명 안팎인데 이 중에 전쟁 사망자는 별로 없고 자연 사망자, 기아 및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뒤섞여 있어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렵다.

2 1차 콩고 전쟁

2.1 발단

1996년까지 콩고 민주 공화국은 1965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개명 전 이름은 조제프 모부투(Joseph Mobutu)였는데 개명)의 독재 정권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국명은 자이르(Zaire)였는데 자신의 이름을 바꾸면서 국명도 바꿨다. 이 시절 모부투가 한 짓은 식민지 독립 국가의 독재자의 전형적인 행태를 잘 보여준다. 천연 자원과 국고를 착복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지만 서방 세계에게는 오히려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 온갖 지원을 받았다.

2.2 진행

그러나 냉전이 끝나면서 서방 세계의 시선이 급속히 나빠지고 60년에 비해 90년대 중반까지 GDP가 65%나 감소하는 등의 막장 상황 속에 국내에서도 불만이 쌓이자 모부투는 한 발짝 물러서 과도 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94년 콩고 바로 동쪽의 르완다에서 르완다 내전이 일어나자 수많은 후투족 난민들이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피난을 왔다. 원래 르완다에서 소수파인 투치족이 다수파인 후투족보다 상류 계층에 있었다가 1960년대에 나라가 뒤집혀져서 왕정이 붕괴되고 후투족 정권이 들어선 상태였으나 90년대 초반부터 투치족 반군이 내전을 일으켰다가 권력분점 합의를 하면서 좀 잠잠해진 상태였는데 르완다 대통령이 부룬디 대통령과 같이 비행기 사고로 죽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내전이 다시 일어나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시 투치족이 반격해서 승리하면서 수많은 후투족들이 피난길에 올라 뿔뿔이 흩어졌다. 다만 이 투치족과 후투족의 갈등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고의적으로 조장된 것이고 애초에는 투치족과 후투족이라는 구분조차 명확히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르완다 내전 참고.

이 르완다 내전에 콩고도 말려들게 된다. 이 후투족 난민들 중 르완다에서 인종 청소를 저지르고 도망친 무장집단인 인테라함웨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이 (현 콩고인) 당시 자이르를 거점으로 반군을 조직해서 르완다와의 국경을 넘어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르완다군은 자이르 내의 후투족 반군을 공격하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위협이 될 수 있는 자이르의 동부 지역을 불안정화하여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이르 내의 투치족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자이르는 이런 행위를 비난했지만 막을 힘이 없었다.

결국 자이르는 112만명에 달하는 후투족 난민들이 수용된 캠프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압박을 가한다. 게다가 자이르 내의 투치족 무장세력이 난민들을 공격해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자 또다시 후투족 난민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이르를 탈출하게 된다. 그와중에 자이르군은 후투족 난민들 중 구 정부군 및 민병대 출신들과 연합하여 자이르 내 투치족인 바냐물렝게족(Banyamulenge)을 탄압하고 탄압당한 바냐물렝게족은 반군을 조직하고 한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로랑 데지레 카빌라(Laurent Kabila)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반군의 이름은 콩고-자이르 민주 해방 연합군(ADFL). 이제 남은 건 뭐?

카빌라는 르완다 애국 전선(Rwandan Patriotic Army, RPA)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아 자이르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서방 세계의 지원이 없는 정부군은 힘없이 무너지고 카빌라는 수도 킨샤샤를 점령하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했다.

2.3 난민 학살

Rwandan_refugee_camp_in_east_Zaire.jpg

자이르의 후투족 난민 캠프.

당시 난민 학살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규모로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자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유는 콩고-자이르 민주 해방 연합군(ADFL)과 르완다 애국 전선(RPA)이 학살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장소를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최소 6만명에서 20만명까지의 후투족 난민이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내전이 발발하자 자이르 내의 후투족 난민 100만명실종됐으며 그 중 특히 르완다로 복귀하던 20만명의 후투족 난민이 실종된 사건은 카빌라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극히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콩고와 르완다의 집권자가 공교롭게도 각각 로랑 카빌라의 아들과 폴 카가메이기 때문에 자세한 진상은 이 둘이 쫓겨난 뒤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2.4 결과

모부투는 수도가 점령되기 전에 스위스로 탈출했다가 모로코로 망명해 1997년 암으로 사망했다. 32년간 독재를 하면서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나라를 지옥으로 만든 자의 최후 치고는 너무 행복하게 죽은 셈이다.

모부투를 몰아낸 카빌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모부투가 멋대로 자이레로 바꾼 국명을 다시 본래의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전통에 충실하게 독재자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카빌라 역시 독재자로 군림하고 반대파를 탄압하였다. 이는 불과 1년 후 2차 콩고 전쟁의 씨앗이 된다.

3 2차 콩고 전쟁

3.1 발단

로랑 데지레 카빌라는 정권을 잡은 후 르완다와 우간다군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르완다와 우간다는 각각의 사정으로 인해 철수할 생각이 없었다. 르완다는 카빌라가 콩고 민주 공화국 내의 후투족 반군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데다가 콩고 동부 지역의 지배권을 유지함으로써 자원을 확보하고 콩고를 약화시켜 자국의 안전을 확보할 필요성을 갖고 있었고 이에 따라 직접 투치족 반군인 콩고 민주 연합(Rally for Congolese Democracy, RCD)을 지원하면서 동부 지방의 통제권을 유지하였고 우간다는 콩고 민주 공화국 내의 우간다 반군을 진압하고 또한 콩고를 약화시킴으로써 남부 지역의 위협을 해소, LRA와의 싸움에 전념하기 위해 위해 북서부의 콩고 해방 운동(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Congo, MLC)을 지원하였다.

당연히 콩고 내에서는 반르완다, 반우간다 감정이 퍼져 나갔고 그들의 지원을 받은 카빌라 역시 불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르완다와 우간다의 요구 사항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카빌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카빌라는 르완다, 우간다와의 기존의 협력관계를 전면 철회하기로 결정했고 폴 카가메요웨리 무세베니가 자동으로 콩고를 침공함으로써 결국 다시 전쟁이 터졌다.

3.2 아프리카의 세계 대전

2차 콩고 전쟁 참여국을 표시한 지도. 검정색이 전쟁의 중심지였던 콩고 민주 공화국, 진한 파랑색이 정부군편, 녹색이 반정부군편, 연한 하늘색이 정부군과 동맹이지만 전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은 국가들이다. 지도 위쪽부터 리비아, 차드, 수단,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이상 3국이 녹색), 앙골라, 짐바브웨, 나미비아.

1996년 당시 모부투가 이끌던 콩고 정부군은 거의 붕괴된 상태였으므로 카빌라의 휘하에 남은 건 소수의 잔존병력과 기존 지지세력들밖에 없었다. 이들은 실전에 익숙한 르완다/우간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으며, 이는 초기 전황이 일방적으로 카빌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원인이 되었다.

1998년. 르완다와 우간다는 각각 수만의 정규군을 투입하여 콩고를 침공했으며,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콩고 정부군을 간단히 격파[1]하고 킨샤샤 인근 수력 발전소까지 위협하였다. 그러자 카빌라는 급하게 외국의 도움을 요청하고 상호 방위 조약으로 묶여있던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의 가입국 중 나미비아, 앙골라, 짐바브웨가 정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리비아차드도 정부군을 지원하였고 수단은 반군을 지원하여 국제전으로 확산되었다. 물론 이들 국가의 지원은 뒤편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자원 채굴권을 열심히 팔아먹은 덕분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을 번 카빌라는 몇 개월 뒤 반격에 착수했고, 이를 통해 영토의 절반 가량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얼마 후 르완다와 우간다가 자기들끼리도 싸우기 시작하면서 반격할 기회를 한 번 더 얻었고, 이번에도 성공하여 양키부주를 뺀 나머지 지역을 모두 되찾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두 나라가 다시 연합하여 공세에 착수하고 부룬디까지 끼어들면서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3.3 평화 협정, 그리고 계속되는 전쟁

전쟁이 국제전으로 확산되자 국제 사회에서 압박이 들어왔지만 해당 지역이 아프리카라 별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내부 분열. 그리고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가 콩고민주공화국을 점령할 생각까지는 없었고 폴 카가메는 내부 통제가 우선이었다는 점이 전쟁을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종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1999년부터 본격화된 내부 분쟁의 시작은 RCD의 내부 갈등이었다. RCD의 내부 분열로 일부가 우간다 진영으로 넘어가 새로운 무장단체를 조직한 데 이어 우간다가 르완다와 반군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카빌라의 정부군과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우간다와 르완다는 서로 협력하던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서서히 틀어졌다. 결국 르완다와 우간다는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고 그와중에 카빌라는 따로 반군과 맺은 정전협정을 깨고 새로 군대를 모아 반군과 전투를 재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쟁은 동부 지역에서 소규모 공방전의 형태로 계속 이어지게 된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은 우간다와 르완다의 입장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인데, 우간다는 우선 북부 지역의 LRA(주님의 저항군)라는 메뚜기떼를 연상케 하는 도적집단 때문에 콩고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어려웠고, 자국의 인구와 국력이 상당했기에 콩고가 내부적으로 통합되거나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그렇게 치명적인 위협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콩고가 타격을 받아 외부 공세역량을 상실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어 물러선 것. 그러나 르완다의 의지가 굳건했기에 전쟁 자체는 계속되었다.

또한 전쟁 기간 내내 이들 정규군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병대들 또한 활동하였다. 카빌라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할 겸 르완다/우간다군의 후방을 교란할 겸 모집한 용병이나 소수 부족들로 구성된 마이마이(Mai-mai)라고 불리던 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지만 상당수는 전쟁 상황을 이용해 약탈과 같은 행동을 하려는 기회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남아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3.4 전쟁의 끝

원래 카빌라는 전쟁을 중간에 끝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다. 어차피 우간다/르완다가 서로 분열된 상황에서 승산은 콩고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내전으로 전쟁에 지친 콩고인들의 입장은 그와 정반대였고, 군대도 전쟁에 반대하는 민심을 외면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카빌라와 군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게다가 아들이지만 온건파로 분류되던 조제프 카빌라까지도 등을 돌리면서 고립된다. 이들은 카빌라에게 전쟁을 끝낼 것을 요구했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2001년, 카빌라는 의문의 총격을 받고 암살됐고[2], 그의 아들 조제프 카빌라(Joseph Kabila)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전쟁 참가세력들의 의견이 급속히 전쟁종식 쪽으로 기울어지자 2002년 남아공의 선 시티에서 평화 협정을 채결하였다. 이에 따라 각국은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남은 반군 세력들 또한 정부군과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는 데 합의했다.

전쟁을 끝내는 데에는 조제프 카빌라콩고 민주 공화국을 민주선거와 다당제를 가지는 민주국가로의 변경을 이행하겠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반군 세력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군사적으로 대항할 필요 없이 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당을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대항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반군과 정부군을 지원하던 국가들 역시 명분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르완다를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국가들이 대부분이며 이들이 오랜 전쟁에 지친 점 역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폴 카가메는 이 협정에 불만이 많았지만 내부 사정도 좋지 않은 데다 결국 협정이 결렬되면 남는 건 재건된 콩고군과의 정면승부를 통한 국가의 멸망 뿐. 결국 비공식적인 개입으로 선회하게 된다.

3.5 결과

추정 사망자만 약 540만 명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추정 사망자라고 하는 건 실제 전쟁 사망자는 많아야 수만 정도로 얼마 안 되고 나머지는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인데 아프리카는 평상시에도 이런 형태의 사망자가 워낙 많아서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1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1천만명 가까이 된다. 독재 정권과 반군의 내전에 인종 간 갈등, 거기에 주변국들의 자원에 대한 이해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전쟁 범죄들이 저질러졌다. 강간(9살짜리 어린이부터 60살 할머니까지!), 약탈, 살인 등 온갖 범죄들의 종합판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9살 난 딸 앞에서 어머니를 강간하고 딸까지 강간한 후 살해하거나, 어머니 앞에서 어린 두 아들을 살해하거나 한 마을을 통째로 갈아엎고 주민들을 남김없이 살해하거나(대부분은 총이 아니라마체테와 같은 칼로 살해했다). 물론 이것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2006년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는 40년만에 민주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당선자는 조제프 카빌라. 그러나 그 역시 최근에는 부정선거 이야기가 나오는 등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경제 상황이 수 년째 아프리카 최빈국에 머물 만큼 막장인데 동부 지역은 아예 무법천지화 되고 있는데도 제대로 손을 못 쓰고 있어서 통치능력 역시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물론 이 지역은 정말 제대로 된 정예군으로 밀어버리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한 곳이긴 하지만 문제는 대도시를 손도 못 쓰고 내줬다가 UN의 권위를 내세워 겨우 반군을 시내에서만 물러나게 할 정도로 막장이라는 데 있다.

201036mam962.gif

(콩고 동쪽의 주황색 작은 나라가 르완다)

가장 큰 문제는 르완다가 콩고 지역 동부의 불안정 없이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점. 본질적으로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소국인 데다 민족 문제로 콩고와 대립관계인 르완다는 콩고가 정말 제대로 안정을 찾고 뭔가를 시도할 경우 막을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콩고와 비교하면 영토는 1/100, 인구도 1/7이고, 형제국가라고 할 수 있는 부룬디와 합친다 가정해도 2/100, 1/4 정도의 수준. 게다가 국제사회도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의 변방에 속하는 중남부 아프리카 지도가 어떻게 바뀌건, 사람이 수백만이 죽건 수천만이 죽건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 당장 1차 콩고 전쟁이나 르완다 내전 당시 국제사회는 별 관심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 백인들의 전쟁인 보스니아 내전이나 체첸 사태에는 유럽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큰 관심을 보인 것과 대조적이다. 영화 로드 오브 워에서도 이 상황을 꼬집는 대사가 있다. 또 영화 호텔 르완다에선 시작 부분에 보스니아 사태에 대한 UN의 개입 상황을 보여주면서 영화 내에선 이들이 르완다 학살엔 별 관심 없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따라서 폴 카가메를 중심으로 한 르완다 정부는 콩고 지역의 불안정을 선호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은 언젠가는 재개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만 조제프 카빌라의 정치적 입지가 대규모 전쟁을 재개할 만큼 좋지 않고, 폴 카가메는 내부 재건에 힘쓰고 있어 언제 시작할지는 미지수.

1차 콩고 전쟁의 불씨를 제공했던 르완다 후투족 반군들은 아직도 동부의 키부 지역에서 활동중이다. 이들 때문에 2007년에만 26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바 있다. 또한 위에서 설명했던 마이마이 역시 계속해서 활동중이다. 북동부 이투리 지역에서는 토착종족인 헤마족과 렌두족 간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해 2007년까지 약 6만여 명이 사망하였다(전쟁 도중의 사망자를 포함한 수치). 지금도 키부 지역과 서북부 동고 지역에서는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2007년 수도 킨샤사에서 카빌라 대통령과 벰바 부통령의 무력 충돌이 있었던 등 정치적인 상황 역시 아직 불안정하다.

아직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4 3차 콩고내전

2012년 M23이라는 반군 세력이 들고 일어나 콩고 동부 지역을 장악했고 콩고 정부군은 연전연패했다. 그나마 있던 정부군이 1997년에 붕괴되면서 말 그대로 잡병들만 긁어모아 아프리카에서도 오합지졸 취급받던 콩고 정부군과 르완다의 지원을 받으며 각종 신형 무기까지 갖춘 강병의 대결 결과는 애시당초 뻔하다. 결국 콩고 정부군은 협상을 통해 고마 등 일부 대도시에서의 반군 철수만을 이끌어낸 채 사실상 통치를 포기한 상황. 그나마 2013년 UN의 지원을 받아 M23은 제압했지만 나머지 반군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고 2014년 1월 7일 우발적인 전투를 계기로 그나마 협상에 응해오던 반군지도자들까지 정부에 대한 공세로 전환했다.

물론 콩고 정부군의 병력이 이들과 맞서기에 그다지 부족한 편은 아니다. 상비군 병력만 8만에 달하고 마음 먹으면 여기저기서 보충해서 수십만의 대군을 조직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 내전에서 보듯이 그런 병력은 수십만, 수백만이 있어 봐야 쓸모가 전혀 없다. 나라가 망할 판이 아니라면 차라리 징집하지 않는 것이 나은 것이다. 게다가 1인당 GDP가 세계 최하위권인 상황에서 국방비를 증가시켜 봐야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문제.[3]

게다가 조제프 카빌라 본인도 아프리카의 전통에 충실하게 독재자의 길을 걷고 있어 머지않아 내전이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UN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요구하기까지 했다.[4]

5 기타

KBS 도전 지구탐험대에서 2001년 신년 특집으로 방영된 아프리카 적도 횡단 탐험 편을 보면 전쟁 당시의 상황을 얼핏 엿볼 수 있다. 당시 제작진들은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카메라를 가방 깊숙히 숨기고 전투지역을 이동하면서 도촬하듯 촬영해야 했다. 만일 카메라를 숨겨두고 있는 게 발각되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사살될 수도 있었다. 결국은 반군들에게 억류당했다가 간신히 탈출해 구사일생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제노사이드에서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이렇게 참혹한 전쟁이 알려지지 않은 현실과 서구 국가들의 무관심과 위선에 대해서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피그미족들의 처참한 현실은 작중에서 인간의 잔인성을 드러내는 소재로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국내에서는 관련 서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외국 서적을 참조해야 한다. 밀덕들이 관심을 보일 만한 재미의 요소는 없는 전쟁이지만 제3세계 국제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1. 카빌라는 이때 부족한 정부군 병력을 대신하여 동부 지역의 여러 부족을 무장시켰는데 이들 덕택에 르완다/우간다군의 공세를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중에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따로놀기에 나서면서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된다.
  2. 카필드 육군참모총장의 쿠데타로 알려져 있다.
  3. 일각에서는 북한을 예로 들기도 하지만 북한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고, 여기에 더해서 공산권에서 엄청나게 퍼줬기에 구형 무기나마 잔뜩 갖춘 것이다. 그리고 냉전 이후 그 대량의 중장비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현 상황에서 과연 북한군이 대규모 전쟁에 노출됐을 때 콩고군보다 얼마나 나을지는 의문이라고 하겠다. 한국군이 북한군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물량 때문이 아니라, DMZ 바로 남쪽이 수도권이기 때문이다.
  4. 물론 평화유지군이 철수해야 독재를 쉽게 할 수 있어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반군과 르완다가 부담이긴 하지만 카빌라가 마음 먹고 국가 전체를 사유화한 뒤 군대를 증강하면 북한처럼 터무니없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이상에야 그 정도 문제 해결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