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살로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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Θεσσαλονκη
라틴어: Thessalonica
영어: Thessaloniki
터키어: Selanik
불가리아어: Солун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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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와 그 주변

그리스 제2의 도시이며 항구이다. 사실상 그리스 북부의 중심지라고 보면 된다. 살로니카(Σαλονίκη)로 불리는 경우도 있으며 별칭은 Συμπρωτεύουσα(공동 수도).

수도인 아테네처럼 광역 행정구역인 테살로니키 도시권(Thessaloniki Urban Area)과 시급 행정구역인 테살로니키 시(Municipality of Thessaloniki)가 있다. 2011년 기준으로 테살로니키 시의 면적과 인구는 19㎢, 32만 명이고 테살로니키 도시권의 면적과 인구는 112㎢, 79만 명이다. 보통 테살로니키 시라고 하면 테살로니키 도시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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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가 있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위치

테살로니키 자체만 본다면 국경선에 가까운 데다가 그리스 북동부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어서 중심지가 된 것이 신기할 수 있지만, 지정학적으로 발칸 반도 남부에 위치한 국가들이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중해로 선박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라서 그리스의 항구지만 타 국가의 화물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래서 국제항구의 성격을 가진다.

2 역사

기원전 315년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드로스가 건설한 이 도시는 그의 부인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의 이름을 따서 테살로니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공동 황제 수도'(συμβασιλεύουσα)라 일컫기도 했던 제국 제2의 도시였다. 14세기에는 인구가 10~15만 명으로 런던보다 컸었다. 그래봤자 마을 취급[1]

그러나 제국의 쇠퇴에 따라서 반독립상태로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던 시기도 있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포위공격을 오랜시간 받자 함락을 피하기 위해 1423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양도되었으나, 1430년 3월에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점령되었다.

16세기에는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유입되면서, 1519년에는 유대인 인구비중이 절반을 넘을 정도였다. 19세기말에 들어오면서 철도, 전등, 전차가 도입되는 등 근대화되었으며, 20세기 초반까지도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있었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이 여기서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셀라니크라 불리며 역시 제국의 제2의 도시로서 성장과 번영을 누렸다[2].

그러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터지면서 그리스불가리아는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그리스 수상 베니젤로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1912년 11월 8일 결국 그리스군이 입성하여 오스만 투르크군의 항복을 받았고[3], 이듬해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완전히 그리스 영토가 되었다. 같은 해 국왕 요르요스 1세(Γεώργιος Αʹ)가 이 곳을 방문했다가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아타튀르크의 고향도 테살로니키이며, 케말 파샤는 국제적이고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인 대서방 교역창으로서 근대 문물로 가득했던 이 도시를 깊게 사랑했다. 훗날 젊은 장교 시절 테살로니키가 그리스로 넘어가자 동료 장교들을 다그칠 때 우리의 고향 셀라니크가 적에게 넘어 갔는데 아직도 술탄의 녹을 먹고 있는 자네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책망하곤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합군불가리아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가 돼서 50만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모인 적도 있었다. 비록 진격 자체는 전쟁 끝에 가서야 제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1917년에는 대화재로 도시 중심부가 홀랑 타버리기도 했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교환 때는 16만이 넘는 피난민을 받아들였다.[4]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나치 독일그리스 침공을 맞은 그리스가 이 도시와 주변 지역을 포기할 수 없어서 이 도시와 동부 영토를 보호하는 메탁사스 방어선에 상당한 병력을 투입했고, 결국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방어선을 지키려다가 독일군이 방어선의 빈틈을 노리고 파쇄공격을 하는 통에 순식간에 함락(1941년 4월 8일)된 역사도 있다. 이 당시만 해도 테살로니키는 유대인이 많은 도시였지만 나치 독일군이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수용소로 끌고 갔다.

3 문화유산

역사가 오랜 도시인만큼 유적도 많다. 고대 로마 유적으로는 포룸(Forum=아고라), 갈레리우스 개선문 등이 있다.

특히 테살로니키의 초기 기독교 및 동로마 양식 건축물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들인데, 아야 소피아, 아요스 디미트리우스, 아야 에카테리니, 예언자 엘리야 등의 교회들과 테살로니키 성벽, 동로마 시대 목욕장 등이 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시절의 건물로는 도시의 상징인 백탑(Λευκός Πύργος)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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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살로니키 항구를 위한 요새인 백탑. 12세기부터 요새가 있던 곳에 오스만 제국 때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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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리우스 개선문. 갈레리우스 황제가 사산 제국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마찬가지로 테살로니키 내에 있는 로톤다(Ροτόντα)와 더불어 세웠다. 로톤다는 원래 갈레리우스의 무덤으로 쓰려고 지어졌으나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교회로 개조되었다가, 오스만 제국 시기 모스크로 쓰였고 미나렛이 덧붙여졌다. 그 후 1912년 테살로니키 수복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개조되었지만 미나렛은 철거하지 않은 채 오늘날로 이어지고 있다. 내부에는 비잔틴 시절의 모자이크가 일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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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와 이름이 같은 하기아(아야) 소피아. 원래 교회가 있던 자리에 8세기에 지어진 복제품이다. 4차 십자군에 의해서는 가톨릭 성당으로,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던 역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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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자 터키 독립전쟁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의 생가. 1881년에 아타튀르크가 이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아타튀르크의 가족들은 1912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하다가 테살로니키 함락 이후 추방되어 한동안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되다가 터키와 그리스가 우호협정을 맺은 1933년, 테살로니키 시에서 이 집앞에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붙인 것을 계기로 테살로니키 시가 이 집을 구입해 1937년에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다. 아타튀르크는 다른 오스만인에 비해 어려서 부터 서구 근대 문물과 접촉하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준 고향 셀라니크의 국제적인 분위기를 깊게 사랑했고, 여기가 그리스에게 넘어간 걸 큰 한으로 삼으며 졸지에 실향민이 된 성인으로서도 평생 다시 방문하고파 했다. 정작 아타튀르크는 오랜만에 고향방문도 하고 이 집에 정말로 가보고 싶어했지만 1938년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53년에 터키 정부가 아타튀르크의 여동생인 막불레(Makbule Atadan, 1885-1956) - 그녀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 의 자문을 받아 아타튀르크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해 박물관으로 열었다. 현재 이 집은 터키국회 소유로 터키 정부가 관할하고 있으며, 내부 직원들도 그리스인과 터키인으로 되어있어 터키어도 아주 잘 통한다. 테살로니키를 찾는 터키인 관광객들은 거의 무조건 들른다.

4 기타

  •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타튀르크 생가는 터키 영사관 바로 옆에 있으며 1937년 테살로니키 시가 터키 정부에 기증했다.
  • 터키에서는 자국 국부가 태어난 이곳을 셀라닉이라고 부른다. 이스탄불과는 정 반대의 상황(...).
  • 불가리아도 여기를 테살로니카가 아닌 솔룬(Солун)이라 부른다. 사실 솔룬이나 셀라니크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어 Σαλονίκη에서 유래되었으므로 그리스에서는 별로 신경 안쓸지도 모른다(...).
  • 유고슬라비아는 국가가 성립할 때부터 해체될 때까지 테살로니키를 지중해로 나가는 무역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 2010년부터 부산광역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 신약성서 "데살로니가전(前)서" "후(後)서"에서 나오는 "데살로니가" 라는 지역이 현재의 테살로니키이다.
  • 이 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 구단으로 PAOK FC가 있다.
  •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축구종목에서 한국올림픽축구대표팀이 그리스와 조별예선 첫 경기를 이곳에서 벌였다. 결과는 2:2 무승부.
  •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가 유명하다.
  • 테살로니키 지하철이 2006년 착공하여 2018년 완공예정(18개 역)이다. 장기적으로는 35개 역을 운용할 예정.인데 재정문제 때문에 티스푼 공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1.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그냥 도시(The city - Η πολή(i poli))라고 불렀고(이 용법은 현재도 통용된다), 그 이외의 도시는 모조리 마을(town - η χώρα(i hora))이었다. 테살로니키도 예외는 아니어서, 안나 콤네나의 저서인 《알렉시아스》를 읽어보면 그 명칭이 어떤고하니 테살리아(θεσσάλια)의 마을(χώρα).
  2. 제국 초기에는 에디르네와 부르사가 양대 수도로서 가장 큰 도시들이었지만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동로마 제국의 입지적 조건을 그대로 물려 받은 오스만 제국인지라 역시 테살로니키를 크게 중요시했다
  3. 불가리아군은 하루 늦게 도착했다(...).
  4. 반면 터키로 떠난 무슬림은 2만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