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신씨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예종
빈궁 한씨
연산군
빈궁 신씨
인종
빈궁 박씨
조선의 역대 왕비
성종
정현왕후 
연산군
거창군부인
중종
단경왕후

1 소개

1476년 ~ 1537년. 조선 10대 왕 연산군의 정비.

폐비 며느리 폐비 폐비 고모 폐비[1]

2 생애

연산군의 정실로 영의정 신승선의 딸이며 좌의정 신수근의 누이이다.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2]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폐비가 되어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된다. 신씨는 연산군과는 달리 덕이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도 그녀가 '궐내 야당'으로 직언을 해도 화를 내지 않았고, 그녀의 덕을 황금에 써서 영원히 남기라고 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이런 공치사를 하는 것보다 그냥 말을 듣는 게 낫다 게다가 황금이라니 신씨가 간언하던 내용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갑자사화가 있던 그날 연산군이 성종의 후궁들을 때려 죽이고 장검을 뽑아든 채 대비전으로 쳐들어가자 울면서 그의 팔을 잡고 간하였는데, 그녀가 그날 연산군을 저지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연산군의 성격상 그 즉시 베어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연산군은 말 없이 칼을 꽂고 인수대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산군은 그녀를 볼때마다 하던 만행을 멈췄으므로 어떻게 보면 연산군의 아주 작은 양심을 상징하는 사람일수도

연산군이 쫓겨난 뒤에 신씨 역시 폐비가 된다. 하지만 연산군은 욕을 처먹고 있었지만 신씨는 덕이 있는 왕비로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서인이 된 것 이외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연산군이 죽자 연산군의 신주를 직접 모신 것 같다. 그녀는 중종의 배려로 1521년(중종 16) 11월에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는다.

3 자녀

1536년(중종 32) 4월에 죽으니 소생으로는 5남 2녀가 있다. 1494년(성종 25)에 낳자마자 곧 졸한 원손(元孫)과 이영수(李榮壽), 이총수(李聰壽), 폐세자 이황(李𩔇) 및 창녕대군(昌寧大君) 이인(李仁), 휘신공주(徽愼公主)이다. 총명했던 폐세자 황과 창녕대군 이인은 중종에게 피살[3]되었기에 결국 휘신공주만 남았다. 휘신공주는 능성 구씨 능양위 구문경(具文璟)[4]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는데, 혼인 후에 연산군이 폐위됨에 따라 그녀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폐서인되어 공주 직첩을 회수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시아버지 구수영의 청으로 이혼까지 당하는 등 왕실 여인이 당할 수 있는 온갖 비참한 꼴을 다 당하게 된다. 다행히 중종 3년에 중종의 배려로 구문경과 재결합하고 집도 하사받았으나, 공주 신분은 되찾지 못했는지 계속 구문경의 처로 불렸다. 그 아들인 구엄이 연산군, 신씨, 의경궁주 조씨[5], 휘신공주, 구문경이 나란히 있는 도봉구의 묘를 지켰다.

중종반정으로 유배된 연산군은 신씨가 보고 싶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사망했다.

4 기타

덤으로 중종의 첫 정실인 단경왕후 신씨신수근의 딸이며 이 폐비 신씨의 조카다. 단경왕후 신씨도 중종반정 직후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어 폐비가 되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고모와 조카가 나란히 폐비가 된 셈이다(...) 폐위된 다음에는 연산군을 모시게 해달라고 울면서 애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끝내 사저로 보내졌다. 그런데 나중에 폐위된 광해군의 경우에는 중전 유씨와 함께 유배되었다. 유씨가 아들과 며느리의 참혹한 죽음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죽는 바람에 얼마 되지 않아 홀아비가 되어서 그렇지.

단경왕후 신씨는 한참 뒤인 영조 대에야 겨우 복권이 되었기 때문에, 당대 기록에는 둘 다 "폐비 신씨"로 되어있다. 이래서 실록을 읽다보면 연산군 부인에 대한 건지 중종 부인에 대한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인물평

중종반정으로 폐비가 되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신씨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로는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폐비가 된 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라고 되어있다.

이런 아내를 두고 장녹수와 첩을 두었으니 참으로....... 반대로 신씨는 남편을 잘못 만나 인생이 제대로 꼬였다. 지못미

6 폐비 신씨를 연기한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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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에서 폐비 신씨를 연기한 배우 박하선)

연산군을 무대로 한 사극에 등장한다.[7] 보통은 막장 남편인 연산군을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하는 어질고 선량한 캐릭터로 나온다. 실제 인물도 그러했고.
  1. 중종의 첫 왕비인 조카딸 폐비 신씨는 훗날 영조단경왕후로 추존된다.
  2. 계산해보면 연산군 쪽이 칠촌 조카가 되는 관계. 시할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외당숙이기도 했다... 다만 나이는 거꾸로 되어서 연산군이 생일이 20일 정도 빠른 동갑이다. 칠촌 관계이면 현재 민법으로는 혼인할 수 없는 관계지만, 조선 시대에는 동성동본 혼인만 기피했을 뿐이지 근친혼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관대했기에 성씨와 본관만 다르면 육촌, 칠촌 사이의 혼인은 매우 흔하게 이루어졌다.
  3. 전 버전에서 사사로 표기했는데 그건 절차상 성인에게 합법적으로 사형을 선고, 집행했을 때다. 이 건은 조선시대의 법으로도 세조의 사례처럼 하도 무시하는 일이 많아서 그렇지, 엄연한 불법이었다.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그 나이가 16세가 되지 않았거나 16세 이상이라도 여성이라면 법적으로 사형은 불가했기 때문이다. 노비로 전락시키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당장 매국노 황사영의 일가는 몰살했지만 자손은 사형을 면했으며, 김자점의 자손도 마찬가지.
  4.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외손자이다.
  5. 태종이 늙어서 세종에 의해 들여진 후궁이지만 태종의 이른 죽음으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원래 이 땅은 임영대군의 땅이자 조씨가 묻힌 무덤이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차녀인 정의공주 묘이기도 하다.
  6. 이쪽은 당차고 탐욕스러운 모습도 어느 정도 있는 모습으로 나왔다. 그 탐욕스러운 모습에 연산군이 경계를 할 정도. 사실 연산군은 폐비 신씨에게 개인적인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눈치 없이 연산군의 열등감을 부채질하는 발언과 행동을 자주해서 눈 밖에 난다. 그리고 연산군을 은근히 무시하고 깔보는데, 심지어 자기 어머니랑 단 둘이 있을 때는 연산군을 "큰어머니를 범한 패륜아" 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이는 당대에도 소문으로 취급받던 이야기에 불과하며, 이 드라마의 폐비 신씨의 캐릭터에 대한 설정들도 정하연의 사극들이 다 그렇듯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 무관한 이야기들이다.
  7. 왕의 남자와 같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