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月主
1 개요
화랑의 전신격인 단체.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화랑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호칭으로 나온다. 그러나 화랑의 우두머리는 풍월주라고 불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국선(國仙)이라 나오며, 삼국사기에도 풍월주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풍월주가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인 15세기 이후다. 15세기 이후에나 기록에 등장한 풍월주를 정작 당대 기록(이라고 주장한) 화랑세기에서 화랑의 우두머리라 서술했다는 점은 화랑세기가 위서라고 결론짓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
2 상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조선 초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등 15세기 이후의 기록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동사강목:진흥왕 원년 10월 ○ 신라가 남녀(男女) 아이를 뽑아 풍월주(風月主)라 불렀다. 신라의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하므로, 무리를 모아 떼지어 놀게 하여 그 의(義)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본 연후에 등용하려고, 소년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고 부르고 착한 선비를 구하여 도중(徒衆)을 삼아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권장하였다.(이후 원화 제도와 원화 제도가 폐지된 이유를 기록) |
동사강목:진흥왕 37년 봄 신라가 화랑(花郞)을 두었다. 때에 신라에 풍월주(風月主), 원화(源花)의 법이 폐하여진 지 이미 여러 해였다. 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영(令)을 내려 귀인(貴人)과 양가(良家)의 자제 중에서 얼굴이 아름답고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해서 분장을 시켜 화랑(花郞) 또는 국선(國仙)이라 이름하였다. |
동국통감/삼국사절요 등에 의하면 풍월주는 진흥왕 초기에 원화(源花)제도와 함께 만들어졌으니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되었고, 진흥왕 37년에 풍월주를 복원하여 화랑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즉, 풍월주는 화랑의 전신이 된다.
이와는 달리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풍월주는 없어졌다가 화랑이 된 것이 아니고, 화랑의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역대 풍월주의 계보를 서술하고 있다.
화랑세기 지지론에서는 동사강목의 서술을 김흠돌의 난 이후 화랑도가 폐지되면서 풍월주 제도도 폐지되었고, 후에 화랑도가 부활했지만 풍월주 제도는 부활하지 않았던 것을 진흥왕 때 풍월주를 폐하고 화랑이 된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차원을 거슬러 로스트사가에 용병으로 참가했다고 카더라.
사실 신라의 일류 호스트라 카더라
3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른 역대 풍월주
1세 위화랑
2세 미진부공
3세 모랑
4세 이화랑
5세 사다함
6세 세종
7세 설화랑
8세 문노
9세 비보랑
10세 미생랑
11세 하종
12세 보리공
13세 용춘공
14세 호림공
15세 유신공
16세 보종공
17세 염장공
18세 춘추공[1]
19세 흠순공
20세 예원공
21세 선품공
22세 양도공
23세 군관공
24세 천광공
25세 춘장공
26세 진공
27세 흠돌
28세 오기공
29세 원선공
30세 천관
31세 흠언
- ↑ 풍월주 출신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