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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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金龍樹)/김용춘(金龍春)
579년 이전 ~ 646년 이후

1 개요

신라에서 진평왕~선덕여왕 시기의 왕족. 일반에는 김용춘으로 더 알려져 있다.[1]

진지왕의 아들이자 진평왕의 사위이며 무열왕의 아버지. 비록 사촌에게 밀려 왕위 계승이 물건너가면서 그냥 귀족으로 격하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TOP OF 진골인데다가 생전에는 당대의 요직을 역임하고 사후에는 아들이 왕까지 해먹었으니 최종적으로 인생의 승리자라 할 만하다. 왕위에서 밀려난 왕족이 숙청당하지 않고 이렇게나 대우받았던 것은 자못 기이한 일이지만, 그 자세한 이유는 아래에서. 아들이 왕이 되어 추증해준 시호는 문흥대왕(文興大王)이다.

알려진 가장 유명한 업적은 경주의 랜드마크인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감독한 일(645~646)이지만, 낭비성에서 있었던 김유신의 데뷔 무대(629)도 바로 이 사람이 감독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라 최고의 행보관 이로써 김용수와 김서현, 그 다음 세대인 김춘추와 김유신, 나아가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으니... 그야말로 신라 역사의 빼놓을 수 없는 고리. 비형의 실존 모티프로 추정되기도 한다.

2 이름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용수'를 '용춘'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빈도상으로 본다면 삼국사기에서는 용수가 2건에 용춘이 3건이고,[2] 삼국유사에서는 용수가 1건에 용춘이 2건[3]으로 둘 모두 근소하게 용춘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김용춘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1964년 도굴되었다가 2년 뒤에 되찾은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에 따르면 오히려 김용수 쪽이 정식 이름으로 보인다. 이 기록은 후대의 삼국유사와도 완벽히 교차검증된다.

이에 감독관인 이간 용수(龍樹)와 백제에서 온 대장(大匠) 아비(阿非) 등에게 명하여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이 탑을 만들게 했다. 선덕왕 14년 세차 을사(643)에 처음 건조하여 4월 ▨▨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 모두 마치니 철반(鐵盤) 이상이 높이 7보에 이하가 높이 30보 3척이었다.

─ 요극, 황룡사 찰주본기, 872년 음 11월 25일.

이에 보물과 비단으로 백제에 요청하니 이름이 아비지(阿非知)인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다루었고, 이간 용춘(龍春)이 일을 맡아서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렸다. …… 마침내 그 탑을 완성하였다. 찰주기에는 "철반 이상의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다.

─ 일연,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구층탑, 1281년경.

용수 쪽이 정식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이외에도 더 있는데, 바로 이 시기 신라 왕실의 작명 풍조 때문이다. 당시 신라 왕실의 이름들을 정리해보면 왕이 곧 부처라는 생각으로 싯다르타의 가족 이름을 그대로 본뜨고 있었다. 진평왕 백정(白淨)은 싯다르타의 아버지, 그 아내인 마야(摩耶)는 싯다르타의 어머니, 그 동생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은 모두 싯다르타의 숙부들의 이름이었다. 이외에도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銅輪)과 숙부인 사륜(舍輪)은 전륜성왕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즉 당시 신라의 왕가에서는 철저히 불교의 전승에 의거해 이름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4]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용수라는 이름에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3세기 초에 살았던 대승 불교의 대조사 나가르주나(Nagarjuna)의 이름이 바로 한자로 용수(龍樹)이기 때문이다.[5] 따라서 용수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따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용춘이라는 이름은 이와 같은 불교적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다른 측면에서의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특수한 의도 없이 지은 이름이라기에는 그가 단순한 왕족도 아닌 엄연한 예비 왕위계승자였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곧 북행하여 종신토록 지낼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침 왕자 흔(昕)이 은퇴하여 산중의 재상이 되었으니 우연히 바라는 바가 합치되어 이르길 "스님과 나는 모두 조상이 용수(龍樹) 을찬(乙粲)이니 스님은 안팎으로 모두 용수의 자손이십니다"라 하였다.

─ 최치원, 성주사 낭혜화상비, 9세기 말

또한 한자 문화권에서의 피휘 관습을 고려한다면 이 사람의 이름이 '용춘(龍春)'일 경우 아들인 '춘추(春秋)'가 그 이름을 범하게 된다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점.[6] 다만 신라 중대에 피휘라는 관습이 얼마나 어떻게 존재하였는지 애매하고, 피휘에 대한 인식이 고려 전기를 기점으로 강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오히려 아버지의 이름 일부를 물려받는 통자(通字) 관습이 있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부분. 당장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당시 삼국에서는 용수와 용춘만이 아니라 흠순과 흠춘, 관장과 관창, 성충과 정충, 비사벌과 비자벌, 미조와 미추, 주몽과 추모처럼 무성 치경 마찰음(s), 유성 치경 마찰음(z), 무성 치경 파찰음(ts), 유성 치경 파찰음(dz)이 분리되지 않고 혼용되는 사례가 일반적으로 나타난다.[7] 결론적으로 이 인물의 이름은 '용수'라고 하는 것이 올바르며, '용춘'이라는 기록은 용수의 음차에 따른 이표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2.1 필사본 화랑세기

그런데 현전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김용수와 김용춘을 형제관계인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나누어 설정하면서 이 문제를 깔끔하게 깔끔하긴 뭐가 깔끔해 그냥 무작스러운거지 해결했다. 문제는 위에서 본 것처럼 1972년에 황룡사 찰주본기가 새롭게 판독되면서 황룡사 구층목탑을 감독한 김용춘이 김용수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어 화랑세기의 '용수·용춘 형제설'은 폭망했다. 지금은 이게 오히려 필사본 화랑세기가 박창화의 위작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

이에 진서론 진영에서 나온 반론은 찰주본기의 용수 표기가 잘못이라는 주장[8]과 화랑세기의 요절 기록이 잘못이라는 주장[9]으로 대별되는데, 둘 모두 가설을 위한 가설이라는 것이 함정이다. 전자는 전수내력조차 명확하지 않은 근대적 용어가 가필된 필사본이 신라 당대에 왕명을 받아 국가 공인으로 작성한 금석문보다 더 정확하다는 말이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이미 애를 셋 넘게 두었을 만큼 다 자라 독립한 아들[10]을 동생에게 입적시켰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무슨 지거리야 어느 쪽이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논변이다.

2.2 비형과의 관계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적 인물인 비형과 동일인물로 보는 해석도 있다. 둘 모두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점도 그렇고, 비형이 하룻밤 사이 귀교(鬼橋)를 놓고 그 부하 길달도 길달문을 세웠다는 건립 전설처럼, 용수도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운 행적이 있어 공통적으로 토목사업에서 전승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나타나는 도깨비 관련 설화들의 기이한 기술력과도 상통한다.

또한 무열왕의 차남으로 용수에게는 손자인 김인문의 묘지석에는 "조부 문흥대왕께서는 기회를 포착함에 귀신같음이 많았다(知機其神)"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기회를 포착함이 귀신같다는 말은 주역의 계사 하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는 신라 중대왕권의 조상인 용수를 선양하는 구절이지만, 선양하는 데 있어 '신기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에서도 귀신들을 부렸다는 비형랑 설화와 어느 정도 일치점을 찾을 수 있어 흥미로운 대목이다.[11]

3 일대기

3.1 왕위에서 밀려난 왕자

태어난 연대는 대체로 57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일단 아버지 진지왕이 죽은 579년 이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진지왕이 555년 즈음 태어났기에[12] 그렇다면 진지왕이 15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569년 즈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김기흥 등 비형과 용수를 강하게 동일시하는 쪽에서는 용수가 진지왕의 유복자로서 대략 579~58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보기도 한다.[13]

어머니는 지도부인 박씨인데, 기오공(起烏公)의 딸로서 박씨 성에 상당하는 진골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때문에 진지왕이 진골과 결혼한 때문에 성골로서의 자격을 잃고 왕위에서 쫓겨났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월명부인 박씨에게서 태어난 진덕여왕이 성골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신라 중고기의 왕비들이 대부분 박씨라는 점에서 이 주장은 근래 부정되고 있다.[14] 오히려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밀려난 결과 진지왕계(사륜계)가 진골로 족강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 진지왕이 죽고 사촌형 진평왕에게 왕위가 돌아가면서 용수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15] 이에 따라 용수는 성장 과정에서 진평왕계(동륜계) 왕실로부터 얼마간 경원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형과 용수를 강하게 동일시하는 쪽에서는 비형이 밤마다 월성 밖으로 나가서 귀신들과 놀았다는 설화의 내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 각색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비형랑 설화에는 진평왕이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와 기르고,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로 임명했다고 하는 등 비형이 일방적으로 경원시되었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내용도 함께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비형과 함께 놀았다는 귀신들을 진지왕의 지지세력으로 보고, 진평왕이 비형(용수)을 통해 이러한 진지왕의 지지세력을 포섭하려 한 것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대왕의 꿈에 등장하는 비형의 의적 집단인 '귀문단'은 이러한 해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것.

3.2 결혼, 그리고 부상하다

이 가운데 후자의 해석에 더욱 설득력을 실어주는 근거가 김용수와 천명공주 사이의 결혼이다. 당시 신라에서 혼인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16]를 생각해보면 이는 사실상 용수가 진평왕의 후계자 반열에 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용수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자'라는 존재 자체로 군주의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임에도 이처럼 파격적으로 후대받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진평왕 자신이 아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의 이름 항목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평왕과 그 가족은 싯다르타의 가족을 Ctrl CV한 모델이었다. 진평왕의 이름은 싯다르타의 아버지, 아내는 싯다르타의 어머니를 베낀 것으로 이제 아들만 하나 낳으면 '이 아이가 싯다르타다!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이 될 운명이었다! 따라서 이 아이가 전륜성왕이다!'라는 왕권을 신성화하는 삼단논법(...)이 완성되는데 어째 줄줄이 딸만 태어났으니... 후새드. 불교신앙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그래도 진평왕이 노력을 안한 것은 아닌게, 용수는 그가 24~34세 즈음에 해당하는 603년에 천명공주에게서 김춘추를 낳았는데 이 즈음에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보면 용수는 최소 20대 초중반의 당시 기준 노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진평왕은 40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후계구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였다.[17] 이후로도 새로 승만부인을 들여보지만 여전히 아들 그런거 안생겨요. 즉 진평왕도 나름대로 씁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고 결혼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용수는 그 덕분에 본격적으로 팔자가 피기 시작했다. 용수는 다시 김춘추가 태어나고 20년이 지난 622년에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신라 정치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이 시점에 용수의 관등을 이찬(2급)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629년에는 용수가 그보다 낮은 파진찬(4급)으로 등장하기에 이 관등은 훗날 이찬으로 올라간 것을 가지고 소급 기재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월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았다. 일찍이 왕 7년에 대궁(大宮) · 양궁(梁宮) · 사량궁(沙粱宮)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내성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44년

3.3 정치적 입지의 강화

그래서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용수가 임명된 '내성사신'이란 어떤 관직인가? 삼국사기를 기반으로 추론하면 내성사신은 궁궐을 구성하는 건물 · 임야의 관리, 궁궐에서 소요되는 물품의 조달 · 제작 · 보관, 궁궐에 부속된 농장 · 공장의 관리, 궁궐에서 이루어지는 제사 · 음악 · 요리 · 빨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관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조직이었다. 단적으로 삼국사기의 직관지 3권 가운데 한 권이 통째로 내성사신의 관할이다(...).[18]

더욱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629년에는 이찬 임말리(任末里)의 총괄 아래 전선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 용수와 함께한 사람이 공교롭게도 김서현과 그의 아들 김유신이었다. 전투의 전개 과정에는 김유신에 대한 노골적인 미화가 상당히 섞여 있지만, 이러한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들과 함께 전투에서 활동했던 것은 이후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두 가문은 전투의 승리를 통해 군부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때가 김유신의 나이 35세, 김춘추의 나이 27세였다.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 파진찬 용춘 · 백룡, 소판 대인 · 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신은 그때 중당당주(中幢幢主)였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패했습니다. 제가 평생 충성하고 효도하기로 스스로 약속했으니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략 듣기로 '옷깃을 바루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지게 된다'고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곧 말에 올라 검을 뽑고 구덩이를 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을 베어 그 머리를 들고 왔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보고는 승기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해 5천여 급을 참살하고 1천 인을 사로잡으니, 성 안에서는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건복 46년

이후 선덕여왕 4년(635)에는 왕명으로 지방을 돌아다니며 감찰하고, 나중에는 백제엔지니어인 아비지(阿非知)를 포함한 신라장인 200여명과 함께 서라벌[19]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한다.

3.4 사후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에 건립되었고, 황룡사 9층 목탑 찰주기에 따르면 건립 책임자로 기록되어 있음을 찾을 수 있기에 최소한 645년에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아들인 김춘추가 즉위한 후 '추봉'된 것으로 보아 김춘추가 즉위하는 654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몰년은 알 수 없다.
무덤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지만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이므로 무열왕릉 뒤편에 줄지어 있는, 무열왕릉보다 훨씬 더 큰 무덤이 바로 김용춘의 무덤(문흥대왕릉)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4 각종 매체에서의 김용춘

4.1 드라마 선덕여왕

화랑세기 필사본의 설정을 채택했기 때문에 김용수와 김용춘이 별개의 인물로 나온다.

4.1.1 선덕여왕에서의 김용수

배우 박정철이 연기했다.

아래 김용춘의 형으로, 천명공주와 결혼했으나 전장에서 젊은 나이에 치명상을 입어 요절하며 리타이어.

4.1.2 선덕여왕에서의 김용춘

김용춘(선덕여왕) 문서로.

4.2 드라마 대왕의 꿈

담당 배우는 정동환. 여기서는 김춘추의 아버지로 정상적으로(?) 나온다. 이복동생비형랑이 폐위된 진지왕 대신 김용춘이나 김춘추를 왕위로 세위려고 하는걸 알고 있지만, 일단은 반대하며 왕위에 관심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김서현과는 친구 사이인듯 하며 그의 아들인 김유신을 자신에 집에 머물게 하며 화랑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

사실 왕위에 관심 없는 듯한 모습은 살아남기 위한 훼이크로, 살아남아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 중. 막나가는 아들 때문에 국반 갈문왕에게 채찍질까지 당하는 등 수모를 겪으면서도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이 시대의 고개 숙인 아버지상.

이후 36회에서 대야성 전투 중 의자왕에 의해 전사하고 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드라마상의 설정일 뿐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등 각종 기록을 봐도 김용춘이 대야성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의자왕의 손에 죽기 전에 실제로는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김춘추에게 처절한 복수를 당하는 검일을 죽인다. 역사왜곡 쩌네요 사실은 김용춘이 진덕여왕 대까지 나오려고 했으나 배우 정동환의 스케쥴 문제로 이른 퇴장을 한 것이라고 한다. 검일도 배우 이병욱이 카메오 출연이라 잠깐 나오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던 것. 다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지는 의문.
  1. 구글 검색결과는 김용수가 김용춘보다 훨씬 많지만, 동명이인 야구인밖에 안 나온다.
  2. 전자는 진평왕 44년 용수, 선덕왕 4년 용수(용춘), 후자는 진평왕 51년 용춘, 태종무열왕 1년 용춘(용수), 김유신열전 용춘.
  3. 전자는 기이편 용수(용춘), 후자는 왕력편 용춘(용수), 탑상편 용춘(용수).
  4. 조경철, 「동아시아 불교식 왕호 비교: 4~8세기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제43호, 한국고대사학회, 2006, 26~29쪽.
  5. 용(龍)=나가(naga), 수(樹)=아르주나(agarjuna).
  6. 비록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제현은 편년통록의 고려 시조 신화를 살펴보면서 신화상의 작제건─용건─왕건 삼대가 아버지의 휘를 범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까내린 바 있다.
  7. 김동소, 「고대 한국어의 종합적 연구」, 『한글』 제227집, 1995, 31~32쪽. 상기한 용례를 베른하르트 칼그렌(Bernard Karlgren)의 재구에 따라 중고한어 발음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樹(ʑi̯u)/春(tɕʰi̯uĕn), 純(ʑi̯uĕn)/春(tɕʰi̯uĕn), 狀(dʐʱi̯aŋ)/昌(tɕʰi̯aŋ), 成(ʑi̯ɛŋ)/淨(dzʱi̯ɛŋ), 斯(sie̯)/自(dzʱi), 照(tɕi̯ɛu)/鄒(tʂi̯ə̯u), 朱(tɕi̯u)/ 芻(tʂʰi̯u). 칼그렌의 중고한어 발음 재구는 다음 사이트를 참조.
  8. 김태식, 「'세기의 발견', 화랑세기」, 『한국고대사탐구』 제6권, 2010.
  9. 이종욱, 『춘추: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2009, 82쪽.
  10. 김법민(626~681), 김인문(629~694), 고타소(?~642).
  11. 비형과 용수를 동일시하는 관점은 김두진, 「신라 진평왕대 초기의 정치개혁」, 『진단학보』 69집, 1990; 이호영, 「대려·제상쟁과 태종무열왕권의 성립」, 『신라삼국통합과 여·제패망원인연구』, 서경문화사, 1997;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
  12. 진흥왕이 540년에 7세로 국왕이 되었으므로 534년생이고, 그 장남 동륜은 566년에 태자가 되었는데 이때를 12~15세로 본다면 552~555년생이다.
  13. 다만 삼국유사의 비형랑 설화 자체는 진지왕 사망 2년 뒤 도화녀의 남편이 사망, 그로부터 10여 일 뒤 도화녀와 진지왕의 혼령이 교접, 다시 10달을 채워서 비형을 낳았다고 한다. 즉 비형이 태어난 것은 진지왕이 죽고 적어도 2년 10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14. 22대 지증왕비 영제부인도 박씨, 23대 법흥왕비 보도부인도 박씨, 24대 진흥왕비 사도부인도 박씨, 25대 진지왕비 지도부인도 박씨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26대 진평왕비 마야부인 김씨가 특이한 케이스가 된다.
  15. 삼국유사를 근거로 진지왕 자체가 폐위된 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이 그냥 자연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견의 여지가 있다.
  16. 신라 초기에 박씨 왕계가 석씨 왕계로, 석씨 왕계가 김씨 왕계로 바뀌면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라에서 사위에 대한 일종의 '서양자 상속'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서양자 상속의 전통은 신라 말기에 경문왕신덕왕으로도 부활한다. 사위가 아닌 외손이지만 여계 상속이라는 측면에서는 선덕왕도 마찬가지.
  17. 김용만이 추산한 고구려왕의 평균수명은 약 53.14세인데, 그야말로 초인적인 수명을 가지고 있어 사실성이 의심받고 있는 태조대왕과 차대왕을 빼면 49세로 떨어진다. 물론 정작 진평왕은 68세까지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래도 아들은 못 봤지만.
  18. 물론 그 안에는 신라 하대에 왕권이 비대화되면서 신설된 관부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놀라운 규모.
  19.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