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신년음악회에서 한국환상곡. 연주는 KBS 교향악단(임헌정[1] 지휘), 연합합창단[2]의 합창. 합창은 8분 10초부터, 애국가는 9분 37초 부터 시작. 12분 40초에 태극기 등장.
1 개요
안익태의 작품.
일반적으로는 193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작곡되었고, 1938년 안익태 자신의 지휘로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방송 교향악단이 초연했다고 한다.
작품의 스타일은 대체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교향시 스타일을 따르고 있고 안익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의 멜로디와 민요 도라지의 선율등을 발전시켜 이용하고 있다.
대체로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한국의 전통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으로, 서두에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전 관현악의 울림으로 장엄한 고조선의 개국을 알리고, 이어서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묘사하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고
거기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여러가지 악기소리로 나타나 평화를 사랑하는 순박한 한민족의 심성을 묘사한다. 때때로 타령조의 멜로디가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두 번째 부분은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으로, 이토록 평화롭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이 강산을 침노한 일제에게 짓밟혀, 곡상은 무겁고 침통하게 흐르고 만다. 평화롭던 민족의 가락은 끊어지고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은 계속되나 수많은 애국 지사들의 죽음으로 진혼의 슬픔이 계속된다.
세 번째 부분은 드디어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부분으로, 이 부분에서 안악태선생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합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애국가가 조를 달리하며 소리 높이 울려 퍼질 때 그 감격은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네 번째 부분은 6.25 동란으로 인한 처절한 동족간의 싸움을 묘사한 부분으로 한반도는 6.25 동란으로 인한 전화에 휩싸이게 되고 선율은 또다시 슬픔으로 바뀐다.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 퍼진 뒤에 드디어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하고 외치면서 만세 소리와 함께 한국환상곡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출처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지식인 2008년 11.1일자 작성자soojin30910)
2 흑역사
하지만....
문제는 한국환상곡과 안익태의 친일 행적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만주환상곡과의 관계다.
2006년 송병욱에 의해서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의 베를린 지휘 영상의 실체가 실은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의 연주 실황이었고, 그 공연에서 연주된 것이 바로 안익태 자신이 직접 작곡한 만주환상곡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내 음악계는 충공깽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이 만주환상곡에 한국환상곡과 똑같은 멜로디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실제 안익태가 6.25 이후 개작하여 최종 완성한 한국환상곡에 만주환상곡의 일부 멜로디가 삽입되어 있다.관련 포스트
이때문에 심각한 논란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안익태가 한국환상곡을 먼저 작곡했다고 하더라도 6.25 이후에 개작하여 최종 완성한 한국환상곡에 만주환상곡의 일부 멜로디를 그대로 집어넣었다는건 안익태의 심사에 의문이 갈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안익태가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하면서 한국환상곡을 연주목록에 포함시켰다는 것도 거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안익태가 실제 지휘했던 것은 만주환상곡이나 에텐라쿠, 교향적 환상곡 교쿠토(극동)이었지 한국환상곡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도 존재한다. 관련 포스트
어쨌든 이런 사실로 인해 한국환상곡과, 한국환상곡의 모태가 된 애국가까지 친일문제의 떡밥때문에 논란거리가 될수밖에 없을듯 하다.
3 창작과 개작 과정 개괄
한국환상곡과 1940년대 만주국 찬양 작품인 만주국 축전곡(혹은 만주환상곡)에 동일한 음악 소재가 쓰인 것을 간파한 이들은 꽤 많았다. 그 중 1990년대부터 안익태 관련 사료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 음악학자 허영한이 미국과 유럽 각지를 돌며 수집한 신문 기사 등에 기반해 가설을 제시했다.[3]
우선 한국환상곡은 1937년 봄에 미국에서 완성했고, 같은 해 비공식 리허설 또는 시연회를 통해 처음 연주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식 초연은 1938년 2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개최되었고, 이 때 악장 구성은 당시 더블린 신문들의 보도나 비평에 의하면 4악장으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 4악장에는 애국가의 선율이 사용되었지만, 합창단이 부르는 것이 아닌 관현악 만의 연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블린 공연 후 유럽 본토로 들어간 안익태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국립음악원에 입학했고, 거기서 작곡 지도교수였던 도흐나니 에르뇌의 지도로 한국환상곡을 상당 부분 개작했다. 이 개작판은 6월에 같은 도시에서 안익태 자신의 지휘로 재연되었고, 약 2년 뒤인 1940년 5월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안익태가 지휘해 세 번째 공연을 가졌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안익태는 공연 프로그램이나 관련 보도와 비평문에 '에키타이 안' 이라는 일본식 이름의 유럽 어순 독음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1940년 9월에도 안익태는 부다페스트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는데, 이 자리에는 헝가리 주재 일본 외교관들도 있었기 때문에 의도했던 아니건 불쾌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공연 이후 한국환상곡의 연주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들에 의하면 2차대전 종전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라진 한국환상곡 대신 1940년 10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열린 음악회에서는 갑자기 교향 환상곡 제2번 '교쿠토' 라는 곡이 갑툭튀했다. 일본어로 극동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곡의 악보는 현존하지 않지만, 신문의 보도 기사나 비평, 공연 프로그램 해설로 미루어 보면 한국환상곡에서 애국가가 연주되는 4악장을 들어내 버리고 3악장제의 곡으로 개작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도 나머지 악장들에 인용되어 있는 민요들의 소재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임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일본의 높으신 분들이 싫어했는지 1941년 11월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두 번째 '교쿠토' 공연 때는 한국이라는 단어가 버로우타고 뜬금없이 몽골의 정경과 민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소개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교쿠토' 는 또 1942년에 갑툭튀한 만주환상곡 또는 만주국 축전곡 에 밀려 갑자기 연주 횟수가 팍 줄어버렸다. 이 곡의 후반부는 위에 나와 있는 대로 1942년 9월 베를린에서 열린 초연 무대의 동영상으로 남아 있고, 한국환상곡에 나오는 합창부의 선율이 애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 들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다만 이 곡은 한국환상곡=교쿠토의 재탕일 가능성이 높으며, 공연 프로그램의 해설을 봤을 때 3악장제의 교쿠토에 만주국 독일 주재 총영사였던 에하라 고이치의 가사에 붙인 새로운 합창부를 후반에 접붙여 만든 개작 작품이라는 것이 허영한의 주장이다.
만주환상곡은 베를린 초연 후 마찬가지로 안익태의 지휘로 빈(1943.2), 파리(1943.3 & 1943.10), 로마(1943.5), 부쿠레슈티(1944.2)에서 적어도 5회 가량 재연되었으며, 빈 공연 때는 빈의 제국방송(Reichsrundfunk)에서 방송용으로 녹음을 제작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녹음이 실현됐는지의 여부는 지금도 불확실하다).
문제는, 이 만주환상곡도 결국 조루 급으로 효력을 급히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11월에 안익태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는 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교향 환상곡 '토아' 라는 작품이 연주되었다고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東亞)의 일본어 독음인 '토아' 라는 제목의 이 작품도 '교쿠토' 나 '만주환상곡' 처럼 완전히 신곡이 아니라, 만주환상곡에서 종반부 합창을 생략한 관현악곡으로 여겨진다.
허영한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환상곡이나 교쿠토나 만주환상곡이나 토아나 전부 같은 작품을 외적인 요인에 따라 개작한 곡이라 본질적으로는 같은 곡이라는 말이 된다. 다만 이러한 추측을 사실로 입증할 만한 자필 악보나 녹음 자료, 녹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뒤집힐 수도 있는 가설이다.
어쨌든 안익태가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유럽 활동을 하기 위해 꽤 복잡한 보신술을 구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고, 나라 없는 식민지인의 신세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환상곡이 1940년 9월 부다페스트 공연 뒤 제대로 된 제목으로 다시 등장한 것은 1944년이었는데,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뒤이은 유럽 본토 진격으로 전황이 완전히 추축국의 패배로 정해진 시점에 스페인으로 피신한 뒤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완성된 이 악보가 현존하는 한국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악보이며, 이 악보에 의한 공연은 1946년 3월에 리세우 극장에서 안익태 자신의 지휘로 행해졌다. 이 때의 곡 구조는 교쿠토처럼 3악장제였지만, 후반부에 다시 애국가 선율이 복원되었다. 이 1944년판 악보는 이후 여러 차례 개작 또는 개정되었고, 만주환상곡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선율은 1950년대 중후반을 전후해 재탕된 것으로 보인다.[4]
그리고 전후의 한국환상곡 개작과 결정본 성립 과정도 논란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한국환상곡의 악보는, 안익태 사후 남겨진 자필보들에 근거해 작곡가 정윤주가 사보한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정윤주 사보본은 악장 구별 없이 전곡이 계속 연주되고 있고, 애국가는 이행부 등 텀을 두고 두 차례 불려진다. 이것이 단순히 최종 정리된 원고를 사보만 한 것인지, 여러 차례 행해졌던 개정 작업의 결과 나온 이본들을 짜맞춘 것인지, 아니면 정윤주 자신의 개작이나 첨삭이 가미되어 있는 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