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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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益泰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
영어: Eak-tay, Ahn

한국계 스페인인 작곡가, 지휘자이자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 애국가의 작곡가.

1 생애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났고, 평양보통학교와 숭실중학교에서 배우다가 1921년에는 일본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 특기생으로 입학해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1926년에 도쿄 구니타치[1] 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한 뒤 1930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신시내티 음악원,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를 배웠고 1932년에는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첼로 수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절에 당대의 유명 지휘자였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알게 되어 교류했다고 하며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하는 등 첼리스트로서 활약했다고 알려졌다.

1935년에 미국에서의 모든 음악대학 과정을 마쳤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점에 애국가가 작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1936년에는 처음 유럽을 방문했고,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와 비올라 주자 겸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와 만나기도 했다.

1938년에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이 자리에서 한국환상곡이 처음 공연되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무르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코다이 졸탄과 도흐나니 에르뇌에게 작곡을 배웠고, 헝가리와 이탈리아, 독일,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유럽 각지의 관현악단들을 객원 지휘했다.

당초 알려진 것으로는 1930년대 후반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고 슈트라우스의 보조 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6년 음악학자 이경분의 연구를 통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관계를 맺게 된 건 1942년이고 더군다나 그 관계의 중심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일본 정부를 위해 작곡해준 "일본 축전 음악"과 관련이 있어서 친일 행적과 결부된 탓에 논란이 뜨겁다.

2차대전 중에도 계속 유럽에 남아 활동했지만, 1944년으로 접어들며 연합군이탈리아에 상륙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자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연속 연주회를 마친 뒤 6월에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다. 1944년 12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환상곡의 자필 악보를 완성했고, 1946년에 스페인 여성인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다.부러우면 지는거다? 이후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출연했다. 이때 스페인으로 귀화했다.

1955년 3월에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환상곡의 한국 초연을 지휘했고, 조국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1962-64년까지 매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음악제는 안익태에게 적대적이었던 일부 한국 음악인들의 반발과 재정 문제 등으로 1964년 이후로는 열리지 않았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공연을 하였고, 이후 건강 악화로 투병하다가 1965년 9월 16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2 애국가 논란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하기 전까지 애국가는 작자미상의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3]"의 멜로디를 붙여서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안익태는 애국가의 멜로디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멜로디를 구상하여 작곡한 것이 오늘날의 애국가의 멜로디라고 알려졌는데...

문제는 애국가가 언제 어디서 작곡되었냐는 점으로, 일반적으로는 1936년 베를린에서 그간 구상해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페터르 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가 "애국가? 그거 불가리아 노래 표절인데?"라고 말하는 바람에 한바탕 뒤집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니콜로프가 애국가가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불가리아 시가 "도브루자의 땅이여(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로 니콜로프는 직접 기자회견장에서 노래까지 불러가면서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도브루자의 땅이여'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니콜로프가 이런 폭탄 발언을 한 데에는 안익태가 자신을 초청해놓고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서 불만이 터진 데서 나온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게다가 "도브루자의 땅이여"를 가만히 들어보면 처음에 애국가의 "동해물과~"하는 부분은 흡사해보인다. 실제 두 소절은 비슷하지만, "도브루자의 땅이여"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으며 멜로디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안익태가 이 음악을 표절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니콜로프가 던진 떡밥 때문에 애국가를 바꿔야 된다는 논란이 일었다. 음악학자 이유선은 자신의 저서인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안익태의 애국가 표절논란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은 완전 민주독립국가 아닌가요? 빨리 새로운 국가를 제정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하는 바람에 애국가 교체 논란이 일었다. 결국 논란 끝에 정부는 애국가를 교체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선언하며 애국가 교체논란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이후에도 안익태가 불가리아 노래를 일부 표절한 건 아닐까라는 의심이 있었다.

음악학자 허영한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애국가가 그간 알려진 대로 1936년에 베를린에서 작곡된 게 아니라 1935년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된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표절 논란을 종식시키려 했다. 허영한의 주장이 맞다면 안익태가 표절 논란이 불거진 불가리아 곡을 접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시점에 애국가가 작곡된 것이기 때문에 표절의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 물론 허영한의 근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신빙성이 높기 때문에 불가리아 노래 표절설은 오늘날에는 거의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새로운 떡밥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생겨났다. 2006년, 독일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던 송병욱이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영상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이었다고 발표하면서 국내 음악계를 충공깽으로 몰고가버렸다.

이 연주회에서 안익태는 "만주환상곡"을 연주한 걸로 알려졌다. "한국환상곡"[4]과 흡사한 제목도 그렇거니와, 이 만주환상곡이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의 멜로디를 연상시킨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애국가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어버렸다. 물론 문제를 제기한 송병욱은 좀더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지만 안익태의 친일행적과 결부되면서 친일적인 애국가를 과연 계속 국가로 불러야되나라는 논란에 불을 붙인 셈이다. 다만, 애국가는 1935~36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적어도 그 이후인 37년까지는 안익태의 행적 중 친일로 단정할 만한 것이 아직은 없다. 때문에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도 애국가를 국가로 선정한 것이며, 애국가까지도 '친일적이다'라는 표현에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게다가 CBS에서 애국가를 바꾸자고 인터뷰한 노모 교수는 애국가의 선후 순서를 애매하게 표현하며 '애국가의 원곡으로 알려져 있는...'이라는 앵커의 오류를 정정하지 않았다. 판단은 알아서.

더불어 2000년대 와서 애국가 저작권비를 스페인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받을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친일에 표절까지 거론당하면서 돈까지 뜯으려고 한다는 비난이 터지면서 애국가를 새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떠오르자 후손들은 저작권을 완전히 포기한다고 밝혔던 바 있다. 그런데 실은 저작권비를 이전부터 유족들에게 매해 지급하고 있었었다.

3 친일 행적

애국가 논란과 더불어서 안익태에 대한 논란거리는 바로 친일 행적이다. 안익태가 미국에서 있을 동안에는 친일행적과는 거의 무관했던 건 분명해 보이는데, 문제는 유럽으로 건너간 이후, 특별히 1938년부터 1944년까지의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간 안익태의 유럽에서의 행적은 김경래와 부인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었지만 연구자들이 이들 자료의 오류를 이것저것 지적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알려진 바로는 안익태는 일본의 관변단체인 "일본-독일협회"(이하 일독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서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런데 2000년에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지휘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에도 일장기가 걸려있는 것 때문에 논란이 일었는데, 2006년 송병욱이 "객석"지에 이 영상의 정체를 발표해 국내 음악계를 충공깽으로 몰고 가버렸다.

송병욱이 밝힌 영상의 정체는 바로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이었다(...). 실제 영상에도 버젓이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자막과 나레이션이 붙어있고, 촬영된 장면은 "만주국"(혹은 만주환상곡)의 후반부 연주였다. 그리고 첫 발견 때 베를린 필 공연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베를린 대(大) 방송 관현악단과 라미 합창단이 출연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의구심이 드는점은 여기서 표기된 안익태의 이름이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것이다. 필립 제이슨의 비서였고 1960년대 UN 주재 한국 대사를 역임했던 임창영 박사는 안익태가 미국에서도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써서 꾸중을 했다고 회고했는데, 안익태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을 쓴 데 대해 이탈리아에서 건축사로 근무하고 있고 안익태의 유족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라는 책을 집필한 유명 건축사 정태남의 주장에 따르면, 에키타이는 일본식 표기가 아니라 안익태 자신이 스페인에서 살면서 현지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바꾼 스페인어식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안익태는 스페인에 살기 이전에도 이미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왔다.

안익태의 미국~유럽 활동 시기를 면밀히 연구하고 있는 음악학자 허영한은 현지에 남아 있는 안익태 관련 자료를 분석해 논문으로 발표하고 있는데, 계간지인 낭만음악 2006년 겨울호에 발표한 논문 '자필 기록에 의한 안익태의 유럽 활동 재구성'에 따르면 1941년 9월에 안익태가 자신이 직접 관현악 편곡한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작품인 토카타와 푸가 C장조 총보에 EkiTay Ahn으로 자필 서명한 것이 익태 안이 아닌 에키타이 안으로 자신을 칭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필 서명보다 더 이전인 1940년 9월 3일에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공연에서도 프로그램에 EKITAI AHN (Tokio)이라고 인쇄된 것을 볼 수 있어서, 유럽 활동 초반기부터 안익태의 이러한 일본어식 이름 표기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이미 일반화되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정태남 등의 주장 대로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바르셀로나와 마요르카에서 활동할 때도 1950년대 초반 까지는 에키타이 안 또는 안 에키타이라는 이름을 간헐적으로 사용했지만, 그 기원이 스페인 정주가 아니라 그보다 이전 시기인 2차대전 중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에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쉽고 빠른 친일을 위해(...) 일찍부터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하거나 내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안익태의 스페인어 표기는 Iktai Ahn이다.

게다가 안익태는 이 시기에 일본의 궁중음악 "에텐라쿠"를 바탕으로 한 같은 이름의 관현악 환상곡(또는 교향시)을 작곡했는데, 이것을 적당히 손질해서 나중에 내놓은 게 한국의 아악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강천성악"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5] 만주국 동영상 공개 이후 송병욱이 헝가리 국립영상보관소에서 이 곡의 연주 장면 일부를 담은 기록영화 동영상을 찾아냈는데, 이 동영상에서도 강천성악과 대동소이하게 일본 에텐라쿠의 선율이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중간부가 생생히 촬영되어 있다. 게다가 1941년에 명치절(메이지 천황 생일)을 기념하여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한 전력까지 새로 밝혀졌다.기사

이런 행적들이 드러나면서 결국 안익태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안익태의 형인 안익조도 친일인명사전의 군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친일 논란과 결부된 것이 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다. 그간 알려진 것으로는 안익태는 1930년대 후반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보조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그의 지원을 받아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학자들의 연구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는 안익태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한 페이크쉴드일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경분의 연구에 의하면 안익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난 시점은 1942-43년일 가능성이 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일독회가 다리를 놓아준 덕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를 주선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사람이 바로 만주국 고위 관료인 에하라 고이치라는 점에서 의심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1943년부터 안익태의 연주회 팜플렛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기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에하라 고이치의 베를린 자택을 방문했을 때 안익태를 만났고 "만주 환상곡"에 대해 조언을 받은 것이 이런 제자 드립을 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더군다나 그간 알려진대로 1943년 베를린 필을 지휘하게 된 것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사정이 생겨 제자인 안익태를 대신 보냈던 게 아니라 안익태의 도쿄 고등음악학교 시절의 스승이었고 안익태보다 일찍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고노에 히데마로의 대타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결론적으로 안익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는 건 그저 한 번 만나서 곡에 대해서 조언을 들은 것 정도밖에 없는 게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해서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안익태가 바인가르트너의 제자라고 쓴 김경래 전기도 잠깐 담소 몇 마디 나눈 것이 사제 관계로 와전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2차대전이 끝나고 4년 뒤 '스승'슈트라우스는 세상을 떴고, 이후에도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아니라고 입증해줄 사람이나 자료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점은 계속 안익태의 권위를 상징하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가 훗날 해외에서 여러 이름 있는 관현악단들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도 대작곡가의 제자라는 것을 셀링 포인트로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평가

친일 논란이 불거지기 전까지 안익태는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한국인 음악가였고,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로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안익태의 유럽에서의 행적들이 연구자들에 의해 폭로되면서 이런 평가에도 금이 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1994년 탄생 88주기를 맞이하여 문을 열었던 안익태 음악제는 2000년대 와서 흐지부지 되었다.

더군다나 "에텐라쿠", "만주환상곡"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한국환상곡"때문에 애국가부터도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도 계속 떡밥으로 남을 듯 하다.

딱히 친일 문제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떡밥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초기 안익태 연구에 사료로 참고했던 김경래의 전기는 이후 전정임과 허영한, 송병욱, 이경분 등이 유럽과 미국에서 현지 사료 조사를 하면서 내용이 상당 부분 허위이거나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김경래는 전기를 쓰면서 안익태가 남긴 자필 이력을 참고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안익태 자신이 전기 집필을 위해 언플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좀 더 제대로 된 사료 연구에 기반한 새로운 평전이 나와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여담으로 해방 후 처음 한국을 방문해 공연한 것이 하필이면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 기념 연주회였고, 이 때문에 4.19 혁명 이후에는 독재자의 탄신일을 기념했다고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이 공연의 일부는 흑백 기록영화로 촬영되어 보존되고 있다.

6 작품들

성악 모음곡 '한국의 생활'(1934-35)
애국가(1935? 1936?)
교향시 '강천성악'(1936?)
한국환상곡(1936-37?)
환상곡 '에텐라쿠'(1930년대로 추정, 1944년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강천성악과 동일 작품으로도 간주됨)
교향 환상곡 제2번 '교쿠토(극동)'(1930년대로 추정)[6]
만주국 축전곡(혹은 만주국, 만주환상곡) (1940년대로 추정, 1944년 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한국환상곡의 2차 개작판으로도 간주됨)
교향시 '마요르카'(1948, 2006년에 자필악보 발견)
교향시 '포르멘토르의 소나무'(1951, 2006년에 자필악보 발견)
교향시 '논개'(1962)
애국지사 추모곡(1962)
한국무곡(1963)

7 기타

약간 의외의 사실로, 학창시절 야구선수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1922년 전조선야구대회에 숭실중학 대표(2루수, 4번타자)로 출장한 기록이 남아있다. 기사에 따르면 안익태가 일본으로 유학한 시기가 1921년으로 알려져 있어 연도가 맞지 않는데, 1922년의 동아일보 기사에 안익태가 숭실중학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 기록이 있는 점, 안익태 주변인물들의 증언 등을 종합했을 때 당시의 야구선수가 안익태 본인이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안익태의 둘째 형 안익조 또한 안익태와 마찬가지로 친일파였다. 도쿄제국대학 의과를 졸업하고 폐결핵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군 군의관으로 복무하였다. 해방 후 국군 헌병장교로 임관했는데, 6.25 전쟁 때 서울에 있다가 피난을 가지 못했고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게 자신의 집과 무기를 내주는 등 협력했다가 서울 수복 후 국군에 의해 처형당했다(...).[7] 상술했듯이 친일인명사전에도 안익태와 나란히 등재되어 있다.
  1. 구니타치는 한자로 쓰면 國立기 때문에, 일본의 국립 학교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하지만 이 학교는 도쿄 도 구니타치 시에 있었으며, 학교는 소재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금은 도쿄 도 다치가와 시로 이전했지만 명칭은 그대로 쓰고 있으며, 사립 학교다.
  2.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애국가의 작곡시점은 1935-36년 사이인 걸로 추정되는데 어디서 작곡했느냐가 대단히 중대한 문제다.
  3. 한국에서는 '작별' 내지는 '석별의 정' 이라고 알려져 있다.
  4. 애국가를 바탕으로 한국환상곡이라는 발전된 형태의 곡이 나왔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5. 심지어 이것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안익태 사료 중 1981년에 안익태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강천성악 총보 해설에까지 그대로 실려 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소개된 해당 자료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익태가 작곡한 「강천성악(降天聲樂)」오케스트라 총본이다. 「강천성악」은 일본 아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크게 3부분으로 나뉘며, 구조는 A-B-A"이며, 작곡 연대는 1936년으로 추정된다."
  6. 1944년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한국환상곡의 1차 개작판으로도 간주됨
  7. 앞 문장에 국군 헌병장교로 임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빼도박도 못하는 사형감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