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교향악단

영어: KBS Symphony Orchestra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 명칭대로 한국방송공사 소속이었지만, 2012년 11월을 기점으로 재단법인화 되었다. 홈페이지

1 연혁

1956년 12월에 한국방송공사(이하 KBS) 소속 악단으로 창단되었는데, 단원 대부분은 같은 해 6월 해단된 육군 소속의 육군교향악단 단원들이었고 초대 상임 지휘자로는 임원식이 영입되었다. 초기에는 단원 수가 30여 명 정도의 실내 관현악단 체급이었지만, 이듬해 단원을 대폭 보강해 60여 명의 2관편성[1] 악단으로 몸집을 불렸다.

1969년에는 정부의 결정에 따라 국립극장으로 악단 운영권이 넘어갔고, 자동적으로 국립화되어 명칭도 '국립교향악단(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Korea)' 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단원 수도 3관편성 급인 90여 명으로 보강되었다. 임원식은 명칭 변경 후에도 1971년까지 직위를 유지했고, 이후 홍연택이 제2대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홍연택 부임 초기에는 운영권을 둘러싸고 KBS와 국립극장 측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1971년에 KBS로 다시 넘어갔다가 1972년에 다시 국립극장이 가져가는 NTR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국립극장이 운영권을 재인수한 그 해에 10월 유신으로 국가와 정부의 힘이 막강해지자 관련 문제는 쏙 들어갔다.

1981년 제5공화국 체제가 시작되자 운영권이 다시 KBS로 넘어왔고, 동시에 이름도 창단 당시의 것으로 바뀌었다. KBS에서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면서 총감독과 수석 객원 지휘자, 전임 지휘자 등의 직책을 새로이 도입했고, 수석 객원 지휘자로 독일 출신의 발터 길레센이, 전임 지휘자로 금난새가 영입되었다.

홍연택이 운영권 이관과 동시에 사임한 후 공석 상태였던 상임 지휘자 직책은 1986년에 원경수가 이어받았지만, 1988년까지 단기 재임한 후 사임했고 다시 공석 상태가 4년 정도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스라엘 출신의 모셰 아츠몬과 조지아 출신의 박탕 조르다니아가 수석 객원 지휘자 자격으로 악단을 지휘했고, 금난새도 1992년까지 전임 지휘자 직책을 계속 유지했다.

1992년에 체코 출신의 독일 지휘자인 오트마 마가가 창단 이래 최초의 외국인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고, 마가는 1996년까지 재임했다. 마가 사임 후에도 후임이 없어 약 3년 가량 객원 지휘에 의존했고, 1999년에 정명훈이 제5대 상임 지휘자에 부임해 음악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정명훈은 취임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악단 경영진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2]

후임으로는 같은 해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던 러시아드미트리 키타옌코가 발탁되었고, 키타옌코는 자신의 장기인 러시아/소련 음악을 위주로 공연했다. 특히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에프교향곡을 비롯한 작품들은 그 동안 정치적인 문제로 한국에서 공연이 뜸했던 터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3]

하지만 키타옌코는 2004년에 계약이 만료되자 추가 갱신 없이 퇴임했고, 그 뒤로 또 상임 공백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상임 지휘자 재선출 문제 이상으로 KBS와 악단 사이의 갈등이 격하게 진행되었는데, 2005년과 2008년에는 KBS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악단을 재단법인화해 독립시키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가 단원들이 격렬하게 디스하면서 무산되었다.

그 이후에도 악단에서는 KBS가 예산을 엉망으로 쓰고 있고 단원들은 임금 체불로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고, 2008년 상반기에는 단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편성 작품의 연주 스케줄을 연기하거나 변경하는 일이 잦아졌다.[4]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중들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대립각을 계속 세우고 있던 악단과 KBS 양 쪽을 신나게 까면서 운영 정상화를 촉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5]

파행 사태가 그럭저럭 잠잠해진 2010년에는 KBS 측에서 신임 상임 지휘자로 함신익을 내정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때도 단원들이 KBS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함신익은 계약 대로 같은 해 7월부터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고, 계약이 순조롭게 이행되면 2012년까지 직위가 유지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 일로였고, 2011년 10월에는 오디션을 둘러싸고 함신익과 단원들이 또 충돌했다.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단원들이 공연 보이콧을 의논할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제2바이올린 단원들에게 제1바이올린 파트 연주를 연습시키려고 하자 '연습하기 싫다.'고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진짜 연습하기 싫어서든 지휘자 말 듣기 싫어서든 어느쪽이든 막장 상태였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근데 애초에 제2바이올린 주자에게 제1바이올린 파트 연습을 시키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다.

단원들은 함신익이 수준미달의 음악적 수준과 일방적, 독선적인 낙하산 지휘자라서 갈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함신익 측에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단원들의 음해라고 맞서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함신익의 모교인 예일대까지 함신익의 자질을 둘러싼 논란에 휘말렸고 음악계에서도 이를 두고 단원을 옹호하는 측과 함신익을 옹호하는 측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결국 함신익과 악단 측은 서로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해 법정 공방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KBS를 둘러싼 정치적인 논쟁까지 얽혀서 상황은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로 치달았다. KBS 경영진 측에서도 지휘자와 악단 양측에 대한 중재 노력이 실패했거나 노력 자체를 하지 않았는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불거졌다. 결국 악단 연주회도 2012년 3월 초순 이래 줄줄이 취소 사태를 빚었는데, 제666회 이래 예정되었던 정기연주회들 뿐 아니라 한국 관현악단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연주하는 최대 규모의 음악제인 교향악축제 참가까지 취소되는 등 창단 이래 최악의 길을 걷고 말았다. 심지어 영국의 유명 음악 평론가인 노먼 레브레히트도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사태와 관련된 포스팅을 연이어 올리는 등, 국제적인 망신 사례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였다.[6][7] 누가 법정에서 이기든 지든 망했어요...

이렇게 단원들의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KBS 이사회는 4월 25일에 악단의 법인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하지만 단원들은 사측의 방침을 계속 거부하면서 파업을 풀지 않아서, 악단의 존속은 둘째 치고 2012년 한 해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9월 7일에 KBS와 단원들은 분쟁을 마무리 짓고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KBS가 추진하는 법인화를 단원들이 수용하는 대신, 단원들은 대부분 법인으로 이적하거나 파견되는 형식으로 오케스트라에 복귀하기로 했다. 또한 KBS는 교향악단 정원 95% 이상의 상시 유지, 교향악단 지원금의 안정적 지원, 소외계층 및 지역 시청자를 위한 음악회와 프로그램 수행, 세계 정상급의 상임지휘자 영입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9월 중에 신규 단원 모집공고를 내는 한편 빠른 시일내에 법인화 전환후 첫 연주회를 개최할 예정라고 발표했다. 결국 함신익만 패배
함신익을 비방한 단원에게 벌금형이 선고됐다.
이번 합의의 결과로 KBS 교향악단의 정상화가 이뤄질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가 하면, 클래식 팬덤에서는 세계 정상급의 상임 지휘자 영입 만으로는 수준 이하로 떨어진 악단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건 무리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이왕 영입할 거면 전성기에 단원들을 마구 갈구기로 악명 높았던 첼리비다케토스카니니 같은 카리스마 강한 지휘자의 영입이 악단의 미래를 위해 나을거라는 지적도 있었다.

악단과 KBS의 발표에 따르면 영입하려고 했다는 세계 정상급 상임 지휘자 후보로는 스위스 출신으로 몬트리올 교향악단NHK 교향악단을 이끌었고 2012년 현재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를 맡고 있는 샤를 뒤투아, 2010년까지 쾰른 서부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았던 러시아세묜 비치코프, 마찬가지로 2010년까지 빈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재임했던 프랑스 지휘자 베르트랑 드 비이 등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 지휘자 모두 악단의 영입 제안에 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이자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을 맡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플레트뇨프의 영입 소식에 KBS 노동조합 측은 그가 2010년에 태국에서 청소년 성매매 혐의로 고발당한 전력을 들어 반대 의사를 표했기 때문에 이것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성매매 혐의가 무혐의로 판명되었고 플레트뇨프의 활동에도 그다지 큰 오점으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노조 측의 반발도 그다지 쉽게 먹히지는 않았다.

활동 중단 기간 동안 법인화와 단원들의 직위 유지와 처우 문제, 신규 단원 선발 등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지, 11월 중순 KBS와 한국전력공사가 공동 주최하는 음악콩쿠르의 입상자 기념 연주회를 워밍업 식으로 가졌고, 30일에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재단법인으로 공식 출범했음을 알리는 첫 특별연주회를 열어 공식적인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이 연주회는 앞서 상임 지휘자 후보로 거론된 플레트뇨프가 지휘했지만, 아직 상임 직함은 달지 않은 상태여서 악단 측 발표대로 2013년 상반기가 되어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어 연말 공연의 단골 레퍼토리인 베토벤교향곡 9번이 메인 레퍼토리로 오른 두 번째 특별연주회가 12월 14일에 곽승의 지휘로 개최되었다. 이외에도 성탄절 이틀 전이었던 12월 23일에는 최수열의 지휘로 KBS홀에서 특별 음악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악단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정기연주회도 이듬해(2013년) 2월 22일에 체코 지휘자 레오스 스바로프스키의 지휘로 재개되었고, 같은 해 8월 말 요엘 레비가 2014년 1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2년 임기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남은 2013년 공연들은 모두 객원 지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레비는 계약 대로 2014년 1월에 공식 취임 연주회를 열어 임기를 시작했다.

법인화 당시 공사 소속이었던 기존 단원들은 교향악단 법인으로 파견 형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 단원들이 2016년 봄에 파견 기간이 끝나면서 다시 갈등이 생겼다. 한때 갈등봉합에 실패해 단원 70%를 줄일 뻔 하였으나 결국은 최종적으로 타협이 되어서 대규모 감축은 피했고 개인 의사에 따라 전적을 거부한 약 20명의 단원은 KBS의 일반직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자리(+정년퇴임, 사직 등으로 인한 공석)만 신규 단원으로 채용해서 메우는 방식으로 최종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명단을 통해 짐작컨대 악장, 수석급 핵심 단원들은 그대로 넘어온 것으로 보아 연주력도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다.

2 역대 상임 지휘자

  • 임원식 (재임 기간 1956-1971. 1998년에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홍연택 (재임 기간 1971-1981)
  • 원경수 (재임 기간 1986-1988)
  • 오트마 마가 (Othmar Mága, 재임 기간 1992-1996)
  • 정명훈 (재임 기간 1999)
  • 드미트리 키타옌코 (Дмитрий Китаенко, Dmitri Kitayenko, 재임 기간 1999-2004)
  • 함신익 (재임 기간 2010-2012)
  • 요엘 레비(Yoel Levi, 재임기간 2014-)[8]

이외에 수석 객원 지휘자로 발터 길레센(1982-1984)과 모셰 아츠몬(1990-1992), 박탕 조르다니아(1990-1996), 박은성(2000-2002), 곽승(2004-2006)이, 전임 지휘자로 금난새(1981-1992)가 활동했다.

3 특징

한국에서 유이하게 완편된 방송 교향악단이고,[9] 2000년대 중반까지는 일반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한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혀왔다. 6.25 이후 오랜동안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양대 산맥을 이루어 왔지만, 아무리도 국립이었던 국향시립이었던 시향보다 반걸음 앞서 있는 형국이었다. 70년대말 각각 KBS와 세종문화회관으로 이관된 후 두 악단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아무래도 방송국의 지원이 보다 탄탄한 것은 당연지사. 90년대 이후 그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지면서 한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인정받았다. 특히 그 시절 국내에서 유일하게 정규단원으로 4관편성이 가능했다.[10][11] 다른 오케스트라에 비해 단원들의 연령대가 높고 남자 단원 수도 훨씬 많았다. 특히 그간 국내 오케스트라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혀온 금관 파트도 국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연주자들을 연이어 영입해서 막강한 진용을 구축했다. 월등한 기량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내지르는 파워풀한 사운드를 냈다. 하지만 연혁 란에 쓴 것처럼 200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잇단 파행 사태로 인해 악단 이미지가 심하게 구겨졌고, 실력 있는 단원들이 오케스트라를 떠나는 등 악단의 기량이 저하되고 있다. 심지어 안좋게 헤어진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뿐 아니라 예산이 훨씬 부족한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같은 악단에도 발린다고 까이기까지 한다. 후새드.

물론 이 사태의 뒷편에는 KBS와 악단 사이의 수많은 갈등과 의혹,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단순히 철밥통 쟁탈전으로 치부할 순 없다고 하지만, 일단 가장 피해를 본 축에는 음악을 즐기러 공연장을 찾던 청중들도 분명히 들어있다는 점에서 결국 병림픽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함신익의 상임 지휘자 취임 과정에서도 수많은 구설수가 나온 만큼, 악단의 미래도 어떻게 될 지는 쉽게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방송 교향악단 답게 수많은 방송 출연 경험을 갖고 있지만, 정작 녹음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음반으로 제작된 것도 그리 많지 않은데, 시판된 것들 조차 너무 빨리 폐반/절판되어 중고음반점을 뒤져야 몇 개가 나오는 수준이다. 그나마 가장 많은 종류는 KBS가 해동물산과 합작해 제작한 음반 시리즈인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구하기 힘든 편이다.

일단 본격적인 녹음은 홍연택 재임기였던 국립교향악단 시절에 시작되었는데, 바그너와 강석희의 관현악곡 연주 실황을 담은 LP가 1980년에 당시 상주 공연장이었던 국립극장의 설립 30주년을 맞아 성음에서 출반되었고, 1980년대 말에는 전임 지휘자였던 금난새가 서울음반(현 로엔 엔터테인먼트)에서 프로코피에프의 '피터와 늑대' 와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 를 커플링한 것[12]과 소련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의 '카르멘 발레' 를 수록한 CD 두 장을 취입하기도 했다.[13] 금난새 외에도 박탕 조르다니아가 1992년에 역시 서울음반에 취입한 베를리오즈환상교향곡도 화제가 되었고, 이외에 금난새의 지휘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1991년 신년음악회와 외국에서 활동하던 한국계 성악가들을 초빙해 개최한 세계한민족초청음악회의 실황, 김만복의 지휘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최된 안익태 기념음악회의 실황이 마찬가지로 서울음반에서 발매되기도 했다.

다만 이들 음반은 한국에서만 유통되었고, 세계 시장에 선보여진 첫 음반은 아르메니아미국 작곡가인 앨런 호바네스[14]의 교향곡 두 곡과 밀양 아리랑을 박탕 조르다니아의 지휘로 녹음한 코흐(Koch)의 CD였다. 1995년 발매된 저 CD는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고, 이후 코흐와 사운드세트 등의 음반사에서 쇼스타코비치와 이삭 슈바르츠, 호바네스의 작품을 담은 CD들을 추가로 제작했다.

다만 이후 터진 IMF크리로 인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음반 녹음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고, 이후에도 상임을 맡았던 키타옌코를 비롯해 곽승과 정치용, 오트마 마가, 김봉, 장윤성 등 여러 지휘자들의 실황이나 스튜디오 녹음이 음반화되었지만 대부분 국내 유통에만 그치고 세계 시장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악단 안팎으로 내분이 심하게 일어났던 2005년 이후로는 녹음계획이 없었으나, 2011년에 벨기에 음반사 푸가 리베라에서 첼리스트 디디에르 포스캥의 협연과 파트릭 다뱅의 지휘로 프랑수아 세르베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담은 CD를 발매했다.

음반 외에도 방송국 소속인 만큼 알게 모르게 여러 방면에서 연주를 들을 수 있는데, KBS에서 방영되는 사극OST 대부분은 이 악단이 녹음한 것이다. 다만 여기엔 뒷이야기가 존재하는데, KBS 교향악단은 "드라마 OST 따위를 연주하긴 격이 맞지 않는다." 란 이유로 용의 눈물 OST[15] 연주를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결국 저 OST는 우크라이나까지 가서 연주를 받아왔는데, 드라마 뿐만 아니라 OST까지 대박을 치자 그 이후로는 모든 KBS 대하드라마 시리즈의 OST를 연주해주고 있다. 또한 2014년 10월부터 방송되는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에도 상임지휘자인 요엘 레비가 비에라 역으로 특별 출연하며, 교향악단도 출연한다. 덕분에 2014년 9월 정기연주회는 평상시와 달리 연주 실황을 드라마제작팀에서 촬영하였다.

KBS 1FM에서는 아예 모든 정기 연주회를 생중계하고 있으며, 다만 소리 잡는게 좀 구리긴 하다. KBS의 2013년 가을 프로그램 개편 때 금요일 오후 1TV에서 KBS교향악단 연주회 녹화방송을 정규 편성으로 집어 넣어 방송중이다. (단, 정기연주회 자체가 한달에 2번 정도이기 때문에, 방송할 새 연주회가 없는 경우에는 다른 연주회나 공연 등으로 자주 대체되곤 한다.) 프로그램 소개

주요 공연장은 재단법인화 이전 까지는 KBS홀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었고, 정기연주회도 대부분 이틀 일정으로 두 공연장에서 연달아 진행되었다. 그런데 법인화가 된 2013년 이후에는 이틀 일정의 정기연주회 중 예술의 전당 연주회만 그대로 열리고, 상대적으로 사운드나 접근성이 떨어져서 청중이 적었던 KBS홀 정기연주회는 없어졌다. 대신 1년에 한번 정도를 제외하면 요즘들어 전국 여기저기에 생겨난 공연장에서 예술의전당 연주회 전날 또는 다음날에 같은 프로그램으로 한번 더 연주하기 때문에[16], 정기연주회를 이틀 연속으로 공연하는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KBS홀의 대관은 가끔 특별연주회를 개최하거나 다른 지방 연주가 안잡혔을 때 연주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 때문에 KBS홀과 교향악단의 관계는 교향악단의 사무국과 연습실이 위치하고 있지만 정기 연주회는 개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종문화회관서울시립교향악단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게 바뀌었다.
2017년 정기연주회때부터는 롯데문화재단과 업무협약을 맺어서,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정기연주회를 연다고 밝혔다. 2015~6년의 경우 지방 연주까지 잡혀서 3번 연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2017년 이후 일부 정기연주회는 예당, 롯데홀, 지방 이렇게 세 번씩 연주할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재단법인화 이후 아시아나항공과 제휴를 맺었는데, 그 결과 아시아나클럽 멤버십 회원에게 마일리지에 상관없이 회원카드만 제시하면 정기연주회 20% 할인 혜택을 주고 있으므로 정기연주회를 관람하려고 할 때 이를 이용하면 좋다.

해외 공연은 국립교향악단 시절이었던 1979년에 미국에서 처음 개최했고, 이어 1980~90년대 동안 동남아시아와 일본에서도 공연했다. 1995년 10월에는 한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최초로 뉴욕UN 본부 회의장에서 정명훈의 지휘로 공연하기도 했고, 2005년 3월에는 곽승의 지휘로 독일의 비스바덴과 루트비히스하펜, 에서 소규모 순회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남북 예술 교류에 있어서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2000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서울을 방문해 공연한 조선국립교향악단과 합동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어 2002년에는 답례 형식으로 평양을 방문해 공연했고, 마찬가지로 조선국향과 합동 공연도 개최했다. 다만 그 뒤로는 남북 관계 경색 때문에 더 이상의 교류는 없는 실정이다.
  1. 목관악기를 종류 별로 두 대씩 편성하는 편성법
  2. 이 때문에 정명훈은 이후 KBS 교향악단 연주회를 지휘하지 않고 있다. 몇몇 인터뷰에서도 당시 상황에 대해 대단히 섭섭하다는 견해를 밝힐 정도로 앙금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실정.
  3. 심지어 키타옌코 지휘의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의 극성 팬들이 특별 패키지 투어를 조직해 한국으로 오기도 했다고 한다. 흠좀무.
  4. 원래 교향악단은 결원이 계속해서 생길 때마다 충원을 해줘야 되는 구조인데, 문제는 정년 퇴임이나 이직 등으로 지속적으로 결원이 발생하고 있었음에도 이때 거의 5년간 신규 단원을 거의 충원하지 않고 있었다.
  5. 당시 상황이 꽤 막장이었는지, 심지어 매일경제 같은 보수적인 경제지 뿐 아니라 한경오에 속하는 경향신문까지도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6. 다만 저 레브레히트 칼럼의 논조는 지나치게 악단 입장에 치우쳐 있고, 정치적 방향성이 너무 뚜렷한 사람의 글을 논거로 계속 가져오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7. 노먼 레브레히트가 유명하긴 하지만 그의 칼럼이 객관적이고 공정한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8. 한국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의 남주 차유진의 은인으로 특별 출연 예정.
  9. 2012년 2월 이전까지는 유일했으나, 대구에서 아트애비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대구 MBC 소속의 대구MBC교향악단으로 재창단되면서 두 개 단체가 되었다.
  10. 2000년대 중반 이후 단원이 줄면서 현재는 객원 단원 없이는 4관 편성이 안나온다.
  11. 정규단원으로 풀 4관편성이 되는 오케스트라는 해외에서도 의외도 드물다.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제외하면 세계 탑10 오케스트라 중에도 정규단원으로 4관편성이 되는 오케스트라는 별로 없다.
  12. 참고로 메텔 역으로 유명한 송도영이 나레이션을 맡았다. 성우덕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자.
  13. 그런데 CD 말고 LP 포맷의 경우 악단 명칭을 영어로 'Korea Philharmonic Orchestra' 라고 기입하고 있다. 1981년 KBS 이관 후에도 국립교향악단으로 통용되던 영어 명칭을 혼용하고 있었던 증거로, 해외에서도 아직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14. 교향곡을 무려 76곡이나 작곡해 9번 교향곡의 저주역관광시킨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다. 저 숫자도 단지 추정치여서 몇 곡이 더 발견될 지는 모르는 상황.
  15. 그 전설의 사극 맞다.
  16. 예를 들어 2014년 정기연주회 일정만 보면, 안양, 용인, 부산, 광주(경기), 오산, 천안, 구리, 대전, 강동, 하남에서 각각 �정기연주회가 잡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