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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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13대 선종 왕운14대 헌종 왕욱15대 숙종 왕옹
묘호헌종(獻宗)
시호공상정비회효대왕(恭殤定比懷孝大王)[1]
능묘온릉(穩陵)
왕(王)
욱(昱)
배우자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로 추정
아버지고려 선종
어머니사숙왕후 이씨(思肅王后 李氏)
생몰년도음력1084년 6월 27일 ~ 1097년 윤2월 갑진일
양력1084년 8월 1일 ~ 1097년 11월 6일 (13세)
재위기간음력1094년 5월 2일 ~ 1095년 10월 7일
양력

1 소개

고려의 제14대 왕

조선 단종의 대선배.[2] 살면서 겪은 사건도 단종과 80% 이상 같다.그런데 헌종은 후계자 감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둘의 대선배는 신라 40대 국왕인 애장왕. 애장왕은 헌종, 단종보다 더 안습인게 쿠데타를 일으킨 숙부 김언승에게 왕궁에서 대놓고 죽임을 당했다. 그나마 애장왕의 경우에는 단종(15세-폐위 기준)이나 헌종(12세-폐위 기준)과는 달리 성년(22세)까지 왕위에 있었다.

2 일생

性聰慧 九歲好書畫 凡所見聞 未嘗遺忘。

성품이 총명해 아홉 살 때부터 글과 그림을 좋아했으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고려사》헌종 총서

그는 어려서 소갈이라는 병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병석 생활이 잦았다. 때문에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다. 고려에서 형제상속은 일반적인 일이라 신하들이나 종친들이나 모두 선종이 병약하고 어린 그의 아들 대신에 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지명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2.1 잘못 끼워진 단추

하지만 이게 웬일, 선종은 병약한 아들인 욱을 후계자로 삼았고 결국 그가 11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명군 소리 듣는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결국 병석에 누운 11살의 헌종 대신에 모후인 사숙태후가 대신 수렴첨정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거처하던 연화궁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그곳에 영녕부를 설치하여 행정 및 군사를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보았다.

하지만 병세가 좋아지기는 커녕 날로 쇠약해졌고, 이런 판국이니 나라가 조용할 리가 없었다.

2.2 쿠데타와 양위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으로써 선종의 3비인 원신궁주의 큰아들이자 헌종의 이복동생인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자의는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왕숙이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재력도 막강했다. 그는 왕이 병들어 있는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지목한 것이었다.

조정은 종친대표 계림공과 외척대표 이자의의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1095년 이자의가 반란을 도모하자 계림공이 그를 척살하고 그의 일파를 제거했다.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태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없었다. 결국 3개월 후 두려움 속에 헌종은 병을 이유로 들어 계림공에게 양위하고, 계림공은 숙종으로 즉위한다.

그의 양위 조서가 참 눈물겹다.

朕承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冲 體亦病羸 不能撫邦國之權 塞士民之望。 陰謀橫議 交起於權門 逆賊亂臣 屢干于內寢。 斯皆凉德所致 常念爲君之難。竊見大叔鷄林公 曆數在躬 神人假手 咨爾有衆 奉纂丕圖。 朕當退居後宮, 獲全殘命。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보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여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력가들에게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고려사》헌종 세가에 실린 양위 조서.

이렇게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정말로 껍데기 왕이었나 보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다.

3 평가

이제현은 이를 평하기를

"고대 중국의 하우씨(나라의 우왕)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아들 계왕에게 왕위를 넘긴 부자상속)은 후세의 찬역을 염려한 조치였던 바 그 후 유복자를 임금으로 세워 곤룡포를 입혀놓아도 세상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끼리 서로 왕위를 전해서 순종에게까지 미쳤으나, 순종이 거상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선종에게 선위했으며, 선종이 죽은 다음 태자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가 헌종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저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받은 데 익숙해져 있어서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면서 이것만을 잘못으로 여기니 어찌 그렇게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익재집》

평을 한 '이제현'은 고려말 고려가 원나라 부마국 시대일 때 당대 고려 제일의 유학자로 손꼽히던 사람이다. 당시 중국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교(성리학)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는데, [3] 본문을 보더라도 고려 중기에는 유교가 그리 절대시 되지 않았는지, 당시에는 부자상속이더라도 어린 임금의 제위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고려 말은 유교를 더 숭상하는 분위기여선지 이제현은 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숙종의 (사실상) 찬탈에 대한 반발이 크게 없던 반면,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음은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근친 중에 주공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 나랏일을 맡아 정치를 보좌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운이 위태롭고 정치가 어지럽게 되는 것은 볼을 보듯 뻔한 일이 아떤가. 후세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어서 강보에 싸인 유아에게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맡기게 될 래에는 이것으로써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주공은 하도 오래전 인물이라 그가 진짜 '사기'의 기록대로 섭정하고 순순히 정말 물러났는지도 확실치 않으며, 또 당시는 봉건제라 주공은 섭정에서 물러나도 자기 영지에서 따로 왕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유교에서 '주공', '주공'을 그리 외쳤건만 정작 지킨 이들이 적은 이유다.

3.1 사망

肅宗 二年 閏二月 甲辰 薨于興盛宮 壽十四 在位一年。

숙종 2년 윤2월 갑진일에 흥성궁(興盛宮)에서 죽으니 향년 14세이고 1년 동안 재위했다.


《고려사》헌종 세가

그는 상왕이 된지 얼마 후 1097년 11월 6일 에1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소갈증으로 인한 소아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병석에 누워있었으니 숙종의 입장에선 나중의 단종의 사례처럼 직접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셈이었다. 물론 일부에선 숙종이 헌종을 사사했을 것이란 주장도 하지만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였다.

묘호인 '헌(獻)'은 시법상으로는 '聰明叡哲 通知之聰 知質有聖 有所通而無蔽'라 하여 총명하며 성인의 자질이 있어 통하는 바가 있고 폐단이 없었던 왕이라는 뜻이지만, 글자가 "바치다"라는 뜻을 지닌 데다가 이 시호나 묘호를 받은 사람들이 대개 후한 헌제나 고려 헌종이나 서하 헌종(서하 말제 이전의 군주로 칭기즈칸에게 처절하게 밟힌 안습군주)처럼 재위의 끝이 좋지 않은 이들 뿐이라 대부분 안습하게 취급해서 시호로는 잘 쓰지도 않는 글자다.

4 가족관계

병약하고 어려서 사망했기 때문에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진주 소씨의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이건 소씨 족보를 제외한 어떤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다른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끗발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편이다.

5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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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후에 받은 시호
  2. 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조선 이방석의 대선배같다.
  3. 이는 이후 유교국가 조선 건국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