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x 신라의 역대 국왕 | ||||||
39대 소성왕 김준옹 | ← | 40대 애장왕 김중희 | → | 41대 헌덕왕 김언승 |
시호 | 애장왕(哀莊王) | |
성 | 김(金) | |
휘 | 청명(淸明) / 중희(重熙)[1] | |
생몰년도 | 음력 | 788년 ~ 809년 7월 (22세) |
재위기간 | 음력 | 800년 ~ 809년 7월 (10년) |
1 개요
신라의 제40대 왕이다. 소성왕의 장자다. 신라의 폐단들을 정리하고, 개혁을 실시했으나 그의 숙부에게 살해당하며 빛을 보지 못했다.[2]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재위 초부터 숙부인 병부령 김언승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
2 왕권 강화 시도
귀족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며, 5묘제를 개편하여 원성왕계의 왕위계승을 확립하였다.
기존의 5묘제는 신문왕 대에 태조-진지왕-김용춘-태종 무열왕-문무왕으로 확립되었고 이후 왕들은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불천위[3]로 모시고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애장왕대에 이르러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따로 모시고, 태조 다음에 애장왕의 고조까지 모시는 새로운 5묘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모두 숙부인 김언승과 김수종의 영향력 하에서 행해진 정책들이었다.
그러나 애장왕이 계속 숙부들에게 이용만 당했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애장왕은 10대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의욕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805년 8월에 애장왕은 율령세칙 20여조를 반포하여 율령체제를 확고히 하는 것을 천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 직관지를 보면 "혜공왕 대에 원래대로 복구되었던 관제가 애장왕 대에 이르러 경덕왕 시절의 체제로 회귀했다"는 식의 기사가 있다. 이로 미뤄 보면 당시 애장왕이 내린 세칙에는 관제 개혁과 관련한 내용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며, 혜공왕 이후로 비대해진 진골 귀족들의 힘을 꺾고, 경덕왕이 지향했던 유교 이념 중심의 전제 군주제를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나름대로 숙부들을 견제할 생각이었는지 태종 무열왕계의 왕족인 김헌창을 시중에 임명한다. 김헌창은 원성왕에게 밀려 왕위 계승에서 탈락한 김주원의 아들인데 그를 시중에 앉힌 것은 김헌창을 대표로 하는 무열왕계 왕족들의 힘을 키워서 숙부들을 견제하고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비대해져가며 폐단이 심화된 불교계에도 제동을 거는데, 806년에는 "사원의 창건은 금지하고 수리만 허락하며 불교 행사에 화려한 사치품 사용을 금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이는 당대 폐단이 심각해지던 불교계에 대해 제동조치를 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거기에 지방행정에도 손을 대서 808년에는 12방면으로 사자를 파견해 여러 군읍의 경계를 획정했다. 이 행정구역 획정을 어떻게 했는지 자세한 사항은 전해지지 않지만 행정구역 개편을 위한 조치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이렇듯 성장해 가면서 패기 있고 의욕 넘치는 청년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꾸준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자신의 왕위계승의 안정성을 인정받게 된다. 여러모로 왕권강화를 위해 애쓴 흔적이 많이 엿보인다.
3 숙부들의 반란 그리고 최후
그러나 애장왕의 이러한 왕권강화책은 당연히 애장왕 즉위 시 섭정을 했던 숙부 김언승과 김제옹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불편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숙부 언승이 809년 또 다른 숙부인 김제옹[4]과 함께 일으킨 반란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때 동생인 김체명도 형을 지키다가 권력에 눈이 돌아간 삼촌들에게 살해당한다. 결국 애장왕의 형제 중 살아남은 건 김수종과 혼인한 딸[5] 한 명 뿐이다.
4 평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숙부들의 섭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뒷날 고려의 헌종이나 조선의 단종과 비슷한 유형의 왕으로 볼 수 있겠지만[6] 이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성년 때까지도 보위에 있었고, 성년이 되어서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치다가 결국 숙부에게 목숨을 잃고 만 비운의 청년 군주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완의 명군. 그를 죽이고 집권한 헌덕왕 때는 김헌창의 난과 같은 내란을 겪었고 연이은 천재지변에 도적떼까지 창궐하여 신라의 혼란과 쇠락은 더욱 가속화되어간다.
5 기타
최치원의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에 의하면 애장왕 3년인 802년 10월 16일에 해인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이 기록 자체가 신화적인 요소가 강해 사실인지는 알수가 없다.
6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六月 애장왕의 가계와 즉위
一年 당나라가 소성왕을 책봉하다
一年秋七月 왕이 이름을 중희로 바꾸다
一年秋八月 양열을 두힐현 소수에 임명하다
양열이 제수된 이유
二年春二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二年春二月 오묘를 정리하다
二年春二月 언승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대사면을 하다
二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예정되었으나 일어나지 않다
二年秋九月 형혹이 달에 들어가고 별이 비처럼 쏟아지다
二年秋九月 무진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二年秋九月 우두주에서 흰 꿩을 진상하다
二年冬十月 큰 추위가 있어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다
二年冬十月 탐라국에서 조공을 보내다
三年春一月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夏四月 김주벽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다
三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秋八月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다
三年秋八月 삽량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다
三年冬十二月 균정을 왜에 인질로 보내려 하나 사양하다
四年夏四月 왕이 남교에 가서 보리 농사를 살피다
四年秋七月 일본과 우호를 맺다
四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수승을 시중으로 삼다
五年夏五月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황금을 바치다
五年秋七月 알천 가에서 열병하다
五年秋七月 삽량주에서 흰 까치를 진상하다
五年秋七月 임해전을 중수하고 동궁 만수방을 새로 짓다
五年秋七月 우두주에서 돌이 일어서다
五年秋七月 웅천주에서 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五年秋九月 망덕사의 두 탑이 부딪치다
六年春一月 왕이 어머니와 왕비를 봉하다
六年 당 덕종이 돌아가 순종이 즉위하기, 순종이 왕과 대비, 왕비를 책봉하다
六年秋八月 공식 20여 조를 반포하다
六年冬十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七年春三月 일본 사신이 와서 만나다
七年春三月 사찰 창건과 불사에 대한 금령을 제정하다
七年春三月 김헌충이 당에서 귀국하다
七年秋八月 사신을 보내 입당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김헌창을 시중으로 삼다
八年春二月 왕이 숭례전에서 주악을 감상하다
八年秋八月 큰 눈이 내리다
九年春二月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九年春二月 김력기가 당에서 소성왕의 책서를 받아오다
九年春二月 군읍의 경계를 나누어 정하다
九年秋七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年春一月 달이 필성을 범하다
十年夏六月 서형산성의 소금 창고가 소 울음소리를 내다
十年夏六月 벽사의 두꺼비가 뱀을 잡아먹다
十年秋七月 김육진을 당에 보내 사은을 하고 방물을 바치다
十年秋七月 크게 가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