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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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12대 순종 왕훈13대 선종 왕운14대 헌종 왕욱
묘호선종(宣宗)
시호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
(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작위(즉위 전)국원공(國原公)
능묘인릉(仁陵)
왕(王)
운(運)
계천(繼天)
절일천원절(天元節)
배우자사숙왕후(思肅王后)
아버지고려 문종
어머니인예왕후(仁睿王后)
생몰년도음력1049년 9월 10일 ~ 1094년 5월 2일
양력1049년 10월 9일 ~ 1094년 6월 17일 (46세)
재위기간음력1083년 10월 24일 ~ 1094년 5월 2일
양력1083년 12월 6일 ~ 1094년 6월 17일 (11년)

1 소개

고려의 제 13대 왕.

고려의 황금기를 연 명군 문종의 둘째 아들이다.

2 일생

형 순종이 1083년에 왕위에 오른지 3개월 만에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사실 즉위하기 전에 아버지형님까지 줄초상 치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찌보면 다소 얼떨떨한 상황에서 보위에 올랐다. 이름도 이잖어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재위 기간 내내 무난하게 왕위를 다스린 걸 보면 능력은 출중했던 듯 싶다.

2.1 황금기의 지속

이 시대는 큰 변화보다는 기존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게 좋은데 전임 군주들인 현종에서 부왕 문종에 이르기까지 명군들이 줄줄이 왕위를 계승해 가며 워낙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일을 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탓인지 선종의 재위기간도 별 큰 사건 없이 태평성대가 계속되었다. 다만 재위 초반엔 가뭄이, 중간에 한파와 같은 기상이변이 문제가 됐는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기상이변 말고 문제가 될 게 없었다는 것.

2.2 유교와 불교의 발전

이 시대의 특이사항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자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이 활약하기 시작하여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했는 점이다. 이미 국가 시스템은 이미 선왕 11대 문종 때 거의 다 완성된 터라, 대각국사 의천을 중심으로 불교의 계파인 교종, 선종을 통합하는 종교통합사업 천태종 사업을 주도했다. 이는 제도가 완비된 조선 성종 시대 전국 곳곳에 유교 장려 정책을 펼친 것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제도가 다 갖춰졌으니 사상 통일.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왕실이 화엄종&천태종을 밀어줬지만 지방세력들과 다른 승려들은 귀족 중심의 정치를 이루기 위해 법상종을 밀어줬기 때문. 더더군다나 천태종은 백성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데다 이후 조계종이 갈라져 나가기까지 한다. 결정적으로 의천이 죽자 천태종이 쇠퇴해서 망했어요.

선종 본인도 불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본인이 아픈 와중에 부처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시를 쓰기도 했다.

是月 王憂勞萬機 頗覺不豫 移御文德殿 命內醫進養性方藥。忽有感 作古風長篇 其末云 藥效得否何敢慮 浮生有始豈無終 唯應愿切修諸善 淨域超昇禮梵雄。王春秋鼎盛 而有此作 見者驚恠。

○ 이 달에 왕이 정무로 인한 과로로 몸의 이상을 느끼고 문덕전으로 처소를 옮긴 다음 내의를 시켜 양성방약(養性方藥)을 바치게 했다. 이때 왕 자신의 소회를 장편 고시로 읊었는데 그 뒷 연은 이러했다.

“약효야 있든 없든 무엇을 걱정하리(藥效得否何敢慮)
뜬 구름 같은 삶, 태어남이 있으니 어찌 죽음이 없으리.(浮生有始豈無終)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많은 선근 쌓아서(唯應愿切修諸善)
서방 정토로 올라가 부처님 뵈오리.(淨域超昇禮梵雄)”

왕의 나이가 한창인데도 이런 시를 지으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고려사》선종 9년 3월 병진일 기사

그러나 선종이 불교만 장려한 것은 아니다. 선종은 국학에 공자의 제자 안회(안자)를 비롯한 72현의 상을 그린 벽화를 만들었으며, 72현에 대하여 제사를 올렸다. 절차는 송나라 국자감의 것을 본받고, 복장은 중국 십철을 본받았는데 이는 고려 유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것이다. 이로서 유학은 하나의 통치철학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적 반열로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의 치세에는 고려가 불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2.3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

2.3.1 거란과의 관계

문화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인 거란, , 여진, 일본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나라 재정도 튼실해졌다. 그만큼 국력도 강해져 거란에 대해서도 외교 면에서 당당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 증거라 할 만한 사례로 선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가 생일날에 도착하지 못하고 늦게 온 거란 사신을 대놓고 놀리는 장면도 있다. #.

10일.왕이 친히 순종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요나라에서 어사중승(御史中丞) 이가급(李可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는데,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 가히 이를만함)인데 어찌하여 불급(不及. 이르지못함)이 되었는가?" 라고 조롱했다.


고려사》선종 2년(1085) 9월 10일 기사

9월 요가 사신을 보내와 생일을 하례하였다.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왔으나 기일에 닿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사신의 이름은 가급(可及)인데 어찌 불급(不及)했는가?" 하였다.

《동사강목》선종 2년

거란이 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려 하자 서희 때의 담판을 근거로 무산시키고 사과의 답례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일본과의 교역은 1084년 이후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3.2 송과의 관계

문종대에 송나라와 수교한 후 고려의 국력이 급격하게 상승해서 송나라와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대부분 송나라가 좀 안습한 에피소드다.(...)

원우(元祐) 5년 2월 17일에 왕백호(王伯虎) 병(炳)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예방(禮房)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 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하였다.


《동란섭필(銅蘭涉筆)》

송나라가 보내준 선물이 의심스러워서 송나라 사신 앞에서 금은알을 모조리 다 깨버리는 짓을 저질렀는데 송나라에선 "고려놈들이 거란과 내통하는게 아니냐"며 끙끙 앓기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원우(元祐) 7년(1092년)에 (고려가)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적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 소식이 "적(貊狄)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송나라에)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첫째 돈이 너무 많이 들며, 둘째 백성이 힘들며, 셋째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 넘기고, 넷째 고려가 예의는 고사하고 실리만 챙겨가는데다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다섯째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아뢰니, 조칙을 내려 금박만을 사서 (고려로)가져가도록 했다. 그러나 끝내 책을 사지말라는 송 황제의 말을 씹고 《책부원귀(冊府元龜)》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송서》 외국열전 고려전

책부원귀라는 책은 《책부원구》라고도 하는데 북송(北宋)의 왕흠약(王欽若),양억(楊億) 등이 송진종(宋眞宗)의 명을 받들어 1005년에 편집에 착수, 1013년에 완성한 책. 총 1000권으로 구성되어있으며 후에 편찬되는 《삼국사기》에도 인용되는 서적이다.

위의 얘기를 풀어보면,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가서 "책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살께요"라고했다. 그러자 송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면 고려를 굉장히 싫어하던 소동파가 "고려 저 오랑캐놈들이랑 교역하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저 무식한 놈들이 우리 것을 사가서 똑똑해지면 우리에게 얻는 이익이 뭡니까? 저 새퀴들 달라는 거 절대 주지 마세요." 라는 이야기로 엄청나게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는 요나라의 성장으로 압박이 심했고, 그 때문에 요나라가 - 군사적인 압박이든 정치적인 압박이든 -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고려와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는 고려의 요구를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상황이었고, 위의 사건 때 제대로 대처 못한 것 뿐 아니라 후에 의천대사가 불교를 배우기 위해 송나라를 방문했을 때 고려를 싫어했던 소동파는 고려의 왕족이자 스님인 의천대사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 했다.(...)

2.3.3 일본과의 관계

  • 1084년 - 일본 축전주 상인 노부미치가 내항하였다.
  • 1087년 - 일본 상인 시게모토와 치카무네가 내항하였다. 대마도의 모토히라가 내항하였다.

3 사후

五月 壬寅 王薨于延英殿內寢 卽日遷殯于宣德殿。壽四十六 在位十一年。 謚曰思孝 廟號宣宗 葬于城東 陵曰仁陵 仁宗十八年 加謚寬仁 高宗四十年 加顯順。

5월 임인일. 왕이 연영전의 침소에서 죽자 그 날로 시신을 선덕전(宣德殿)으로 옮겼다. 향년 46세로 11년 동안 재위했다. 시호를 사효(思孝)라 하고 묘호를 선종(宣宗)이라 했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인릉(仁陵)이라고 했다. 인종 18년에는 관인(寬仁)을, 고종 40년에는 현순(顯順)이라는 시호를 덧붙였다.

번영한 나라를 큰 사변 없이 잘 이끌어 나가다가 1094년 5월에 병사. 향년 46세였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고려 왕실에는 한 차례 피바람이 불게 된다. (헌종, 숙종 항목 참조.) 근데 그도 책임이 부분적으론 있는게, 처남인 이자의(셋째 왕비 원신 궁주의 오빠)가 선종의 또다른 아들인 왕윤을 밀면서 숙종(당시 수태보 왕희(왕옹))과 대립했기 때문.

4 기타

찬이슬에 가을 바람 불어오니(露冷風高秋)

이 맑은 밤 달은 밝구나.(夜淸月華明)
피향전(披香殿)은 이제 삼경이 되려는데(披香殿裏欲三更)
노래 소리 아직도 요란쿠나.(沸歌聲擾擾)
인생은 모두가 허깨비 같으니(人生都似幻)
부귀영화 탐내지 마라.(莫貪榮)
좋은 술 금잔에 가득부어(好將美醁滿金觥)
기쁨을 나누는 게 좋으리.(暢懽情)


『하성조사(賀聖朝詞)』

 
시를 쓰기 좋아한 왕인듯 하다. 위에 아픈 와중에도 부처님 찾은 시뿐 아니라 선종 6년인 1089년 9월 정축일에 요나라 사신을 맞이한 잔치에서 지은 『하성조사(賀聖朝詞)』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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