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

Henry Ford (1863년 7월 30일 ~ 1947년 4월 7일)

"만약 제가 사람들에게 원하는게 뭔지 물었더라면, 그들은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1]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저는 심지어 기계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장 근로자들이 하루 10시간 일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 나라 산업계는 지속 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품을 소비할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예를 들어 공장 노동자가 동 틀 때부터 땅거미 질 때까지 일한다면, 자동차를 쓸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루 8시간 근무가 번영으로 가는 길을 열었듯이, 주 5일 근무는 더 큰 번영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2]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자신들만의 목적을 위해 이 나라와 저 나라를 싸움 붙이는 유대인 국제은행가들과, 부와 권력의 자리에 앉기 위해 이 나라와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반란과 혁명을 선동하는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분명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그들에 순종하는 비유대인들을 내세우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그들의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다. 이 비유대인 전위들은 유대인들이 직접 나설 경우와는 달리 비유대인 대중의 의심을 사지 않고도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대인들이 밀어준 정치인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불순종할 경우에는 무슨 '스캔들'이 터져 나오고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며, 경우에 따라 '탄핵'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정치인은 '과거'가 있는 인물이다. '과거'가 없으면 선거자금에 관련된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밀어주고자 하는 정치인의 약점을 사전에 철저하게 캐두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세상에서 오늘의 미국 정부처럼 국제 유대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국이 이런 일을 했다’, ‘독일이 저런 일을 했다’고 떠들지만 사실 그 모두는 유대인들이 한 일이었다... 요즘 미국인은 전 세계에 타락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한 인간들로 알려져있다. 왜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금권(金權)이 이 나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천재성은 그들은 땅 대신 사람을 벗겨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민족의 사람들처럼 땅을 일구거나 천연자원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삶을 꾸려가는 대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민족들의 피를 빨아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들판과 공장에서 땀을 흘리는 일은 다른 민족들에게 맡겨둔체 유대인은 이들이 거둔 결실을 착취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기생적인 천재성이다...."
"내가 국제유대 금융권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모든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승리하거나 패배하건 간에 돈의 권력은 항상 승리한다. 그 어떤 전쟁도 이들 없이는 시작되지 않고 그 어떤 전쟁도 이들의 허락없이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이들에 맞서는 이유는 이들은 조국도 없으면서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때문이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평화주의를 내건 단체들은 그저 표면 위에서 목청을 돋울 뿐이다. 국제금융자본이 모든 국가위에 군림하는 누상정부로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국제금융자본은 평화적인 산업이 아니라 전쟁으로 돈을 번다. 이러한 근원을 파헤쳐 이들을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무력화시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국제적 돈의 권력은 유대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정치 문제의 근원에 유대인이 있다고 해서 유대인을 국제정치에서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돈 문제의 근원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의 금융계 진출을 금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본래의 목적대로 금융이 산업을 섬겨야지 유대인의 관념대로 산업이 금융을 섬기게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이 나라의 대다수 사람들은 미국의 화폐 발행 구조와 은행 시스템에 대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내가 장담컨데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포드(자동차)를 설립한 기업인이자 기술자. 세계 최초의 진짜 억만장자[3][4][5]

토머스 에디슨과 교우관계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기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참고로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가 작고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려터진 마차를 타고 오느라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업계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후 그 앞에서 자신의 가솔린 자동차 개발 계획을 발표했을 때, 에디슨은 그것을 듣고 주변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테이블을 쾅 치고는 "자네 듣던대로 현명하군, 생각대로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어보게"[6]라고 격려했다고 하나, 원래부터 전기만 연구하고 살던 에디슨은 곧 잊어버렸다 한다(...) 그런데 포드는 에디슨이 지금껏 아내말고 세상에서 자신의 꿈을 이해해준 두번째 사람이었기에 크게 감명받았는지 에디슨의 마지막 한숨을 손에 넣었다.

이후에도 포드는 아내의 도움으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고 끝내 포드 회사를 세웠다.

중간에 회사를 선전하기 위해서 레이싱 경기 등에 참여해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포드사미국 최대의 회사로 만들어준 자동차 포드 모델 T는 아이러니하게도 에디슨이 발명한 에디슨 전지를 채용했다.(...)

아무튼 그가 제작한 포드 T형은 값싸고 안전한 좋은 차였기에 여러 계층에서 사랑받게 되었다. 포드 T형의 성공으로 미국 자동차 업계의 시초점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너무 포드 T형에 집착한 나머지 후발 업체들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그 유명한 검은색이기만 하다면 어떠한 색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라든가.[7] 놀랍게도 T형은 당시엔 냉장고보다도 싸게 살수 있었다. 물론 당시 냉장고가 그만큼 비쌌다는 이야기다.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 생산 방식을 만들어 대량 생산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유명하다. 사실 이것이 헨리 포드의 가장 큰 업적이자 산업 혁명의 정점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산업 혁명으로 얻어진 인류의 급격한 기술적 성과를 대중에게 널리 보급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조차 공장에서 찍어내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는 신급으로 추앙받는다.(...) 심지어 달력도 포드력(A.F.,B.F.)를 쓴다.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이 노동자들이 불만을 가져오자 그는 대신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대폭 상승시켜 불만을 무마시키고자 했다. 그래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일한만큼 돈을 더 주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가치관이었다[8]. 이는 노동자들의 불만이 임금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닌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에 따른 인간의 기계화, 부속화에 그 근원을 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 데서 생겨난 갈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마피아가 개입해 토미건으로 농성 중인 노동자 집단을 향해 실탄을 사격하기도 했다. 포드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글쎄올시다...
단 알아둘것은 처음에 포드가 5달러 일급을 주었을때는 포드 자동차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타 업체들이 숙련공을 빼앗긴다고 엄청 걱정했고 포드 공장정문에는 여기서 일하게 해달라는 사람들로 인산인해 였다고 한다.그때는 일자리 달라는 사람들이 문을 넘어서 공장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경비를 많이 고용했다고.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숙련공에게 그 정도의 임금도 주지 않을 정도로 미국의 노동 시장이 막장이었다는 이야기. 얼마나 임금이 적었으면 숙련공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부품이 되기 위해 담을 넘었을까. 실제로 일급을 5달러로 올린 2년 뒤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포드 종업원들의 주택 가격 총액은 325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로 늘어났고 평균 예금 액수도 196달러에서 750 달러로 늘어났다. 포드는 바로 중산층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는 너무나 획기적인 일이라 당시 시사만평 같은데서는 포드의 노동자들이 모피를 입고 기사가 모는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포드 공장에 일하러가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또한 헨리포드는 주 5일제 40시간 근무를 최초로 실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후 착취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겐 여러모로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

한편 그는 심한 반유대주의자 였다. 단순한 반유대주의자 수준이 아니라 나치즘에까지 호감을 가졌고 히틀러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생일선물로 수표를 보내기도 했고 유태인을 매우 싫어하여 동갑내기 재벌인 신문왕 랜돌프 허스트와 이 의견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치 독일에 공장을 세우기도 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정부에게서 파괴된 공장에 대한 보상금도 받아냈다(...) 그 인연인지는 몰라도 포드는 미국 포드/유럽 포드가 나뉘었다. 미국 포드가 미국스러운 고배기량 대형 저출력 차량을 제작하는데 반해 유럽 포드는 유럽스러운, 작고 적절한 자동차. 포드 F 시리즈포드 몬데오의 느낌 차이를 생각하면 쉽다.

잘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상당 부분을... 포드의 저서인 반유대인/인종차별 서 '인터네셔널 주'에서 그대로 베껴서 쓴 부분이 많다. 근데 나의 투쟁은 왜 그따구야[9] 이 책을 읽고 감동한 히틀러는 본인이 높으신 분이 되기 직전까지 실물 크기의 헨리 포드의 초상화를 사무실에 걸어놓고 있었다고. 물론 높으신 분이 된 후에는 본인 초상화를 걸었다

이전 문서에는 인종차별자로 적혀있었지만 당시 수준으로 보면 인종차별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디트로이트가 원래 흑인 인구가 많은 곳이었지만 포드 공장은 다른 디트로이트의 공장들 보다 흑인 노동자가 월등히 많았고 급여나 승진에서도 전혀 차별이 없었다. 다만 감독으로 승진한 흑인에게 지시받을 수 없다는 백인 노동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자주 일으키는 바람에 흑인들과 백인들의 작업공간을 나누기는 했는데 급여는 백인과 완전히 동등하게 지급했다. 또한 장애인 고용도 많이 했는데 심지어 맹인이나 두 팔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그들도 똑같은 급여를 받았다. 두 팔이 없는데 발로 조립하나 다만 여성 노동자에게는 남성보다 훨씬 낮은 급여를 줬다.

정부 관계의 여자와 관계를 끝낼 때 참 너저분한 방식을 선호했는데, 한 정부가 지겨워지면 자신의 측근 아무나한테 넘겨 반강제로 결혼시켰다. 이건 뭐 구멍동서도 아니고 그나마 포드의 제안을 따라 결혼하는 게 정부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포드의 측근이면 전부 회사 고위직들이었으므로 호화스런 생활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10] 그래놓고서는 자서전에는 인생 최고의 결정은 본부인과 결혼한 것이 었다고 자랑스럽게 써놨다.

에반젤린 코트 달린저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존 코트 달린저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에반젤린 코트는 16살에 속기사로 포드에 입사해서 19살에 부서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때 이미 포드의 정부가 되었던 걸로 보인다. 이후 포드의 운전사였던 심복 레이 달린저와 결혼했다. 레이 달린저는 포드사의 시험 운전사였는데 시험 운전사라고 해도 실제 시험 운전시에 구체적인 평가도 안 하고 좋다 나쁘다 정도밖에 말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높은 급료와 토지와 저택 등을 받고 있었다. 1923년 에반젤린은 그가 세운 헨리 포드 병원 산부인과에서 존 코트 달린저를 낳았는데 출산 당일에 헨리 포드가 직접 병원에 나타나자 산부인과 직원들이 전부 깜놀했다고 한다. 그 뒤에 에반젤린에게는 하녀. 하인, 요리사, 정원사, 경비원 등이 딸린 저택과 토지에다 경주마 레이스가 두 개나 딸린 경주마 농장 등이 주어졌고 태어난 아이가 한 달도 안 됐을 때 살아있는 조랑말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에반젤린은 공공장소에서 헨리 포드와 함께 있는 사진도 제법 찍힐 정도로 공공연하게 정부로 행세했지만 헨리 포드는 아내인 클라라 포드의 주위에는 그들 모자가 절대 나타나지 못하게 했는데 클라라 포드가 워낙 대인배여서 그런지 아니면 늙으막에 질투심이 약해진 건지 뒤에는 손자들이 놀러오면 나이가 비슷한[11] 존도 불러다 같이 놀게 하곤 했다고 한다. 존 코트 달린저가 포드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라 공공연한 사실이었는데 의외로 존 코트 달린저가 헨리 포드의 사생아가 아니라 에반젤린의 법적인 남편이었던 레이 달린저의 아이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레이 달린저는 에반젤린과 결혼한 뒤에 같은 침실을 사용했고 존이 태어난 뒤에야 각방을 섰는데 레이 달린저는 존이 자기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는지 존을 굉장히 아꼈고 존도 자라서 사실을 알게 되기 이전까지 레이 달린저를 진짜 아버지로 알았다고 한다. 훗날 존이 쓴 책에서 존이 어머니 에반젤린에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묻자 에반젤린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바로 입을 닫았다고 하는데 존은 자기 친아버지가 헨리 포드라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헨리 포드의 전기 작가 로버트 레이시는 에반젤린도 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게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제1차 세계대전기에는 나름 평화주의자로 반전운동을 했는데 그러다가 미국의 개입만 저지할 뻔 했다. 2차 세계대전 기에도...

더불어 살아생전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자동차를 만들던 프레스턴 터커의 야심작 터커 톨페도를 견제하고 크라이슬러, GM과 손잡아 그를 파멸시키는데에도 기여했다....

미국 디트로이트 근처 디어본(Dearborn) 출신으로 해당 도시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전시물은 당연하게도 자동차가 많지만, 헨리 포드가 수집한 물건들을 가져다 놓았는데, 농기구 및 스팀 엔진은 물론, 소화기(서부 영화에 나오는 무기들), 가구류 부터 심지어는 기관차, DC-3 여객기 등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한다. 심지어는 집도 존재. 여러 방면에서 덕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기했던 대로 반유대주의자에 나치즘에 호감까지 가졌다는 점 때문인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아예 히틀러와 같은 성전기사단원으로 설정되어 있다. 어쌔신 크리드 2의 퍼즐을 풀다 보면 그가 동료 기사단원 토머스 에디슨에게 보내는 편지를 볼 수 있는데, 쪼잔하게도 에디슨에게 받은 에덴의 조각으로 노동자들을 세뇌시켜 일당이 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는 실제로 일당을 삭감하는 짓을 한 걸 자랑스럽게 적어 놓았다.(...) 이후 그 에덴의 조각은 포드가 유럽에 있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보냈고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 이 아이디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후 포드는 승승장구하지만 롤스로이스, 벤틀리, 부가티같이 상류층을 타깃으로 한 수제작 자동차들이 모두 파산을 겪거나 휘청거리다 인수된 것을 생각하면 헨리 포드의 아이디어는 신의 한 수.
  2. 밑에 나오듯 포드는 노동자 복지에 상당한 투자를 하였다. 물론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생산비용 절감 등으로 아낀 것도 크지만, 그렇게 원가절감을 해도 노동자 복지에 신경을 전혀 안 쓰는 기업들이 21세기에도 많음을 생각하면 헨리 포드 자신이 노동자 복지에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은 하루 12시간씩 일한다. 포드가 보면 어떤 기분일까
  3. 록펠러와 카네기, 모건 등도 억만장자로 불리지만 생존 당시의 재산이 10억 달러를 넘지는 못했다. 생존 당시에 보유 재산이 10억 달러를 넘긴 사람은 헨리 포드가 처음이다. 물가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록펠러, 카네기 둘 다 19세기 사람이다. 사실 물가 환산을 하면 록펠러가 훨씬 높다.
  4. 1919년 포드 자동차의 창립 시에 자금을 보탰던 다른 주주들로부터 주식을 전부 사들여 포드(자동차)는 100% 헨리 포드의 소유가 되었다. 다만 얼마 뒤 아들 에셀에게 42% 아내 클라라에게 3%의 주식을 양도하여 55%만을 보유했다. 물론 그래봤자 주머니 돈이 쌈지돈.
  5. 1903년 포드 자동차 창립시에 자금을 대었던 주주들은 1919년 주식을 양도할 때 정확히 2500배로 불려서 1만 달러를 투자한 사람은 2500만 달러를 받아갔다.
  6. 그 당시에는 증기자동차였기 때문에 차가 가다가 멈추면 물 길어와서 넣고, 물이 수증기가 될때까지 10분을 기다리고, 다시 가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당시 석유 산업에서 수요가 높았던 것은 난방용 등유였고 가솔린은 등유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은 당대의 기준으로 혁신이라 할 수 있었다.
  7. 일설에 의하면 다른 색도 얼마든지 칠할 수 있었는데, 검은색이 가장 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포드는 회사에서건 밖에서건 사람들에게 "검은색은 고객들이 원하는 색"이라고 주장주입했다고. 에덴의 조각 사용
  8. 당시 철강 공장 노동자들이 하루에 12시간을 일하고 1달러를 받았는데('시급'이 아니라 '일당'이다!),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하루에 8시간 일을 시키고 5달러를 주었다. 단순계산만 해봐도 기존 시급의 약 7.5배를 준 셈이니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임금인상인 셈. 다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냥 일반적인 노동자들은 평균 9시간 일하고 2달러 34센트를 받았다고 한다. 이 자료가 정확하다면 당시 철강 노동자들은 더욱더 열악한 환경에 있었던듯.
  9. 나의 투쟁은 니치 시절 강매해서 많이 팔린 것이지 엄청 못 쓴 책으로 꼽힌다. 히틀러의 무식함이 드러나는 책. 베니토 무솔리니가 읽고 깠을 정도. 무솔리니는 언론인 출신이라 글도 잘 쓰고 연설도 잘 했다.
  10. 당시 서양 상류층에서는 비교적 흔한 방식이었다. 정부는 호화스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니 좋고 수하는 미인과 결혼하는 데다 승진이라든가 저택같은 보너스가 따라오고 최측근으로 도장을 찍는 게 되니 양쪽 다 윈윈인 셈이다. 나폴레옹도 바라스의 정부였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그렇게 결혼했다. 여기에는 일단 결혼한 뒤에는 그 정부와 관계하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지만 그거 다 지킬리가 있나.
  11. 큰 손자인 헨리 포드 2세보다는 훨씬 어렸고 막내 손자보다 두 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