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호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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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자: 護國軍

1 개요

1948년 11월 20일부터 1949년 8월 31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국군예비군 제도이다.

2 역사

1948년 11월 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정규군 창설이후에도 1949년이 되기 전까지는 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비병력 확보의 차원에서 조직되었다. 이는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제 12조에 근거하여 육군 총사령부(육군 본부의 전신) 예하 호국군무실(초대 실장 신응균 소장)을 기원으로한다. 세부규정은 1949년 1월 20일 공포한 호국군 병역에 관한 임시조치령(대통령령 제52호)으로 정해져 확장을 꾀했으나, 1949년 8월 31일부로 해체에 들어갔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 정규군과 완전히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후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까지 호국군을 대신하여 민병 조직으로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3 운영

1948년 조선경비대대한민국 육군으로 정규군 창설한 뒤에도 한국군은 지원병제를 유지했다. 인원 제한이나 장비 부족 등이 이유였다. 그때문에 현역 대신 예비역 부대를 창설했다. 호국군은 육군본부가 생기기 전에 최상급 기관이었던 육군총사령부 예하의 호국군무실(護國軍務室)에서 담당했다. 형태는 주방위군이나 일본의 즉응예비자위관에 가까웠다.

1949년 3월에는 육군총사령관을 지낸 송호성[1]이 호국군사령관이 되었다. 1949년 8월 31일에 해체되어 정규군과 통합되었다. 대신 민병대청년방위대가 일종의 예비군 역할을 했다.[2]

4 성격

위에 기술했듯이 그 당시만해도 대한민국 국군은 지원병제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비역인 호국군으로 입대가 가능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비군과는 달리 미군예비역 제도와 유사한 부대였다.[3] 그러나 1949년 8월부터 서서히 해체에 들어가는 단계였지만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결국 1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군대와 사회를 왕래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방위병의 아버지뻘, 상근예비역의 할아버지뻘 되는 병역제도. 다만 이쪽은 징병제로 호국군은 평상시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특정 기간에 소집되어 일정 기간동안 훈련을 받는 제도였다. 당시 재정이 열악했기 때문에 호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도 충분하지 않아서 죽창으로 무장시킨 사진들을 볼 수가 있다. 만일 대한민국 국군모병제가 된다면 상근예비역 제도를 호국군으로 다시 되돌려놓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국군 창설 이전에도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서북청년단과 같은 일종의 준군사조직이 활동했었는데 이를 정규군화 시킨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5 조직 편성

기본적으로 육군 정규군을 보조하는 역할로서,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로 나뉘었고, 필요에 따라서 정규군(현역)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장병들은 예비역 신분으로 본인 거주지에 주둔하는 연대에 소속되어 생업에 종사하며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이는 미합중국군의 주방위군과 비슷하다. 1949년 1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1반(1월1일 졸업) 졸업자 중 선발된 4명을 여단장으로 하여 1월 11일에 총 4개 여단이 창설 되었다. 그 후, 육군본부 호국군을 육군참모차장 직할 호국군 사령부로 개편하여 독립 예비군으로 편성되었다.

6 간부 충원 방법

정규군 장교와 비슷하게 특별임관과 일반임관으로 나뉘었다. 간부후보생은 대대장급 60세, 중대장급 50세, 소대장급 40세의 연령 상한을 정해 놓고 모집하였다. 선발자는 현역 정규군 연대에서 기본 군사 훈련을 마친 후, 호국군사관학교에서 6주간의 교육을 마친 후 장교로 임관했다. 이후, 1949년 3월 4일 호국군간부훈련소를 육본 직할로 이태원에 설치해 4월 1일 육군 호국군간부학교로, 다시 7월 10일 육군 호국군사관학교로 개칭, 운영하다 호국군의 해체에 앞서 8월 15일 폐교했다. 졸업생은 4개 기 1080명을 배출해 이 가운데 640명이 현역 장교로 편입됐다. 이들 640명 중 1명이 대장까지 진급[4]했고, 이들의 임관 구분을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편입했다고 해서 예현(豫現)[5]이라고 한다.

7 구성

  • 호국군 사령부(초대 사령관 송호성 준장): 1949년 4월 1일 창설
    • 군수처, 교육처, 정보처, 인사처
    • 제101여단(서울):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2여단(대전):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3여단(부산):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6여단(청주):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5여단: 1949년 4월 22일 창설
    • 제107여단: 1949년 7월 16일 창설
    • 제108여단: 1949년 7월 16일 창설
      • 각 여단 예하 18개 연대

8 함께 보기

  1. 한국 광복군에서 지대장을 지낸 인물로 당시 참모장이범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이범석이 초대 국방장관이 되자 육사 훈화 연설 등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김구의 측근이었는데 김구가 암살당하자 급격히 몰락했고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2. 예비군이 부활한 것은 1968년의 일이다.
  3. 미군은 처음부터 현역이 아니라 예비군으로도 입대가 가능하다.
  4. 박노영(예현 2차)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5. 군사영어학교 출신은 군영,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육사, 갑종장교갑종, 현지임관 장교들은 현임과 같은 방식으로 장교의 임관 구분을 2글자로 축약해서 표현하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