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성

宋虎聲. 1889-1959년 3월 24일.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군인, 매국노

1 생애

좌도 좋고 우도 좋고 김일성과 인민군도 좋았던 대한민국 초대 육군총사령관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적을 획득했다.[1] 중국의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를 졸업했다.[2] 중국에는 군벌들이 독자적인 사관학교를 세운 경우가 많았고 송호성도 중국 군벌 밑에서 근무하며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1942년엔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제5지대장을 지냈으며 김구의 최측근이었다. 1946년에 귀국하여 한국광복군 출신으론 드물게[3]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년 12월 13일부터 만주군 출신이었던 원용덕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년 6월 15일부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된 후 보여준 군사적인 능력은 형편없었다. 정치인들이 광복군 출신을 끌어안으려고 기용한 면이 강했다. 실제로 4.3 사건 초기에 삽질을 많이 하기도 했고,[4] 여순사건때는 선두에 섰다 매복에 걸려 부상당하기도 했다. 불시에 경비대 사관학교를 방문해서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미달된다며 키가 작거나 마르거나 관상이 안좋아 보이는 생도 20여명을 퇴거시키는 일본군도 안할짓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단숨에 고위직에 올라 2년이사 사령관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통위부장이었던 유동열의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이었다.[5] 북한과 대치중인 상황에서 좌도 좋고 우도 좋다는 사고방식으로 육사에 좌익계열의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어줬고 김지회, 홍순석 여순사건의 주요 인물들이 활동하는 배경이 되었다. 때문에 한국 광복군에서 참모장을 맡았던 이범석은 그가 반공적이지 못한 인물이라고 여겨 엄청 싫어했고 1947년 12월 육군사관학교 생도 분열식에서 사관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송호(송호성의 별칭)는 단을 내리라!" 며 연단에서 내려가라 한 적도 있다. 여기에 영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해 에티켓이 엉망이어서 미군과도 사이가 안좋았다.

1947년 2월에는 손원일과 같이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이 두 사람은 한국군 최초의 장성들이다.[6]

미군정 시기에는 국방부에 해당하던 통위부의 차장(국방차관급)을 지내기도 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육군이 생기자 거기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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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당시 광주로 내려와 작전 회의 중인 모습. 담배를 문 사람이 송호성(당시 준장)이다. 송호성의 옆에 설명하는 젊은 장교는 박정희 소령이다.

1948년 8월 15일부터 11월 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총사령관을 지냈는데 당시는 육군참모총장이 생기기 전이라 총사령관이 육군에서 최선임 군인이었다. 즉 사실상의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육군 홈페이지 등에선 이를 표시하지 않는다.[7] 왜냐면...

2 반역

김구가 암살당하면서 김구의 측근이었던 그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졌고 군에서도 능력이나 정치력에서 앞서는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들이 실세가 되었다. 이승만은 그를 예비군의 전신인 호국군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가 1949년에 5사단이 생기자 사단장으로 보임하였다. 사실 정치적 이유로 처음부터 능력에 비해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 2년이나 있었던지라[8] 군을 제대로 정비하려면 어떻게하든 좌천이었다. 총사령관까지 지낸 인물이 사단장을 지내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초기의 한국군은 연대부터 시작했고 확장해서 여단, 사단으로 커져가는 식이었다. 당시엔 군단은 있지도 않았다. 육군참모총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초기에는 맡은 사람이 다시 맡는 일도 있었다.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엔 다시 예비군 부대인 청년방위대의 고문단장이 되었는데 보름 후에 전쟁이 터지자 같은 백범계였던 전 헌병사령관 장흥이 피난을 권했으나 가봐야 실권에선 밀렸다는 생각에 고의로 남았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피난을 권하는 장흥에게 채병덕도, 이범석도 모두 자신을 버렸다며 자네나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북한군에게 투항했다. 북한측 조선인민보에 따르면 1950년 7월 4일 송호성이 방송을 통하여 “나는 인민군대가 인민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군대라는 것과 인민정권은 조선인민을 위한 정권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면서 국군병사들과 군관, 삼천만 동포들에게 인민군과 빨치산으로 넘어와 자기를 본받아 “총부리를 돌려 인민의 원쑤 미제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라“고 부르짖었다. 1953년 인민군해방전사여단장,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 상무위원을 지내다가 김일성으로부터 반혁명분자로 규정되고 1958년부터 평안남도 양덕에서 수감에 되었고 1959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독립운동가 출신에 국군 최초 장성이자 초대 육군 사령관까지 지낸 사람이 실권 안준다고 적국에 투항해 대남방송을 하고 투항한 국군포로들로 이뤄진 부대의 부대장을 하는 적극적인 이적행위를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육군은 아예 호적을 파버렸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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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북한에 붙어 이적행위를 한 탓에 그의 아들인 송무성(宋武城, 1937-, 사진 안의 노인)은 기독교인 화교의 양자로 들어가 생활을 했고 대만에 가서 살았다. 그리고 대만의 정보기관인 국안국(國安局)에 한국어가 유창한 자원으로 들어갔다. 송호성의 아내이자 송무성의 어머니인 양천내(楊千乃)[9]부산에서 머물렀고 1961년에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송무성은 귀국하려고 당시 주대만 대사였던 김홍일[10]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하였으나 대만의 정보기관에서 일하게 된 터라 방한은 허가되지 않았다. 관련기사

여순사건 당시 육군총사령관이자 진압군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뛰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등병 처럼 진압군 전체의 최선봉에 섰다. 앞서 순천을 무혈 점령하자, 여수 역시 마찬가지일 꺼라고 생각하고 장갑차를 탄 채 그냥 어택 땅 하고 진격 했다. 여수북방 약 8킬로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반란의 주역 지창수 상사의 부딪쳐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응사하는 장갑차 기관총소리에 고막이 파열되어 굴러떨어지는 추태를 보이고 부대는 순천까지 후퇴한다. 뒤도 안돌아 보고 순천까지 백리가량을 도망가는 바람에 여수와 순천사이에 큰 공백지가 생겨 반란군 주력이 이 곳을 이용하여 지리산으로 도망 쳤다. 얼마나 망신스러운 전투인지 공간사에서는 “미평리에서 반란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 송호성 사령관이 부상하고 진압군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 순천으로 철수”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4.3 사건 당시 9연대 부연대장이었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해 보려 했으며 길 가다 송호성 부인에게 경례안했다고 제주도로 밀려났던 김익렬은 제민일보에 4.3을 회고하는 글을 썼는데 송호성에 대해 독립운동가나 장군다운 풍모는 있었으나 중요한 군사지식이나 인격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관계로 형편없었다고 술회했다.관련기사

조선경비사관학교 시절 60대 노인이였지만 후보생 2기로 들어가서 아들, 손자뻘들과 함께 굴렀다. 그런데 규정을 따르지 않고 관물대를 정리하지 않는등 생활이 개판이라 이치업 생도대장의 불시검열에 번번히 걸려 벌점으로 병기고에 있는 99식 격납총의 기름을 닦는 굴욕을 겪었다. 어느날 같은 중국군 출신의 통위부장 유동열이 불러 통위부에 가더니 중령계급장과 함께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이 되어 돌아 왔다. 그리고 전 생도를 소강당에 집합시킨 후 단상에 오르자 첫 마디로 "이치업 중위는 제주도 9연대로 발령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일화. 혹시 이치업 중위의 관상이 안좋았나?[11]
  1.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국적으론 여권을 얻을 수가 없어 중국 국적을 얻는 일이 많았다.
  2. 허베이성에 소재한 육군군관학교다. 1902년 위안스카이가 세운 설립한 육군학당을 모태로 1912년부터 1923년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다. 중국 내에서 운남강무당과 함께 가장 큰 규모의 군관학교에 속했으며 황푸군관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관 채용인원 중 20%가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었다. 장제스의 모교이기도 하다.
  3. 당시 한국 광복군의 인원들은 자기네들만 특별대우 해줄것을 요구하다 미군정과 틀어져서 건군기 때 잘 들어가지 않았다.
  4. 애초에 이 사람은 제주에 주둔한 9연대를 그냥 맘에 안드는 장교 처박는 귀양지 취급했다. 자기 비위에 어긋나면 그냥 제주도 행이었다고. 9연대장 이치업, 부관 심흥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가 그랬다. 가장 압권은 부연대장(47년 9월 부연대장으로 부임하여 12월 연대장으로 진급하고 48년 5월 해임되었다.) 김익렬로 명동거리 걷다가 송호성 부인에게 경례 안했다고 제주도로 쫒겨왔다.
  5. 독립운동과 별개로 유동열도 군사적 역량은 형편없었다. 미 고문단의 일원이었던 짐 하우스만 대위의 회고에 의하면 장교는 양반신분에서 나와야 한다고 우겨서 미 고문단 복장을 터지게 만들었다. 임정에서 군무총장까지 역임한 사람이...
  6. 국방일보에 따르면 1948년 12월 10일에 진급했다고 나온다. 채병덕, 이응준과 함께 진급했다고.
  7. 육군사관학교 4대 교장을 지냈는데 육사 역대 교장에는 남겨놨다. 중간에 빼기가 애매해서 그런듯. 육사 역대 교장
  8. 당시 육군사령관 평균 임기는 6개월이었다.
  9. 화교이다.
  10. 중국에서 군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로 중국에서 2성장군, 한국군에서 3성장군을 역임해 5성장군이라 불렸다. 준장으로 임관한 사람이기도 하다.
  11. 여기서 이치업이 바로 일본군 59사단의 장교로 있으면서 중국 진안의 독립군을 토벌했던 '번개 장군' 이치업이다. 제주 4.3 사건 당시 9연대 부연대장으로 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