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절/한국
목차
興王寺
興旺寺址
1 개요
고려 시대에 개경 근처에 있던 거대 사찰. 고려 최대의 사찰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집합소로 이용되어 왕실과 관련된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으며 그 터가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사찰을 둘러싼 성터가 남아있다. 광통 보제사와 함께 고려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개성이 북한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굴이나 세밀한 측량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어서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가람배치는 2탑 2금당식으로, 상당히 특별한 양식이다. 역시 규격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식의 고려 호족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의 흥왕사지에는 석탑의 옥개석과 갑석이 무너진 채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2800여칸의 규모였다고 하며, 이는 거의 왕궁 수준의 건물 규모다. 면적은 너비 800미터, 길이 400미터로 32만㎡에 이르렀는데, 이는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이다. 참고로 100% 복원된 경복궁 면적이 34만㎡. 다만 면적 관련한 자료는 북한 평양방송의 발표라서 신뢰성이 좀 의문시된다. 그러나 확실히 큰 규모의 절인 것은 사실이라, 고려도경에도 `극히 크다`라는 표현이 있다. 심지어는 1070년에 사찰을 둘러싼 성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 길이가 약 4km정도이며 동서남북 4개의 성문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이 절이 창건된 이후 열린 팔관회는 고려 최대였다고 한다.
흥왕사 경내에는 가람을 이루는 두 개의 탑 외에도 은 427근으로 안을, 금 144근으로 겉을 장식한 매우 화려한 금탑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금탑을 여러번 이동시킨 기록으로 봐서는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목은 이색은 마니산 기행 도중 본 흥왕사 금탑을 보고 시를 한 수 지었다.
2 역사
고려 문종 10년(1056)부터 12년의 공사 끝에 창건하였다.[1] 당시는 최충으로 대표되는 유학이 막 고려에 뿌리내리던 시점으로, 최초의 사립학교인 12학도가 설립되던 시기라 신하들이 흥왕사 건설을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고려의 국교이기도 하고, 문종의 뜻이 강력해서 공사를 강행하였다.
문종 21년(1067)에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속장경을 간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속장경은 훗날 완성된 팔만대장경의 프로토타입이나 마찬가지다.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순종의 넷째 아들로서 승려가 된 징엄. 의천과 징엄의 묘지는 모두 흥왕사터에서 발견되었다.
그렇게 흥왕사는 고려왕실의 원찰로 번성했는데 무신정권 시절에는 최이가 앞서 말한 금탑과 꽃병을 만들어 헌납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 침입시기에 개경을 점령한 몽골군이 개경을 싸그리 불태우면서 문종때 건설된 흥왕사도 소실돼버렸다. 다만 이후 시대의 인물인 이색이 금탑을 보고 시를 남긴 걸로 미루어보면 금탑은 싸들고 피난을 간 모양이다.
원 간섭기로 접어든 시점에서는 왕실의 원찰인지라 권위 진작 차원에서 재건했다. 하지만 원의 과도한 공납요구에 허리가 휘는 판국이었던지라 문종 시절의 규모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고려사절요에는 충렬왕 시절, 원나라에서 시집온 제국대장공주가 흥왕사를 갔다가 금탑을 보고 필이 꽃혀서 금탑을 강탈해 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녹여 다른 곳에 쓸려고 했던 모양인데, 갑자기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게 되자 제국대장공주는 일관(日官)[2]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오윤부는 금탑을 도로 흥왕사에 돌려주게 했고 그뒤로 충렬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원나라 출신들은 문화란 걸 모르는 것 같다. 데카르차
고려가 망하면서 흥왕사도 결국 좋았던 시절이 막을 내리게 된다. 흥왕사는 조선 초까지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흥왕사의 보물인 이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탐을 냈다고 한다. 심지어 영락제까지도 금탑을 가져올 수 없을까라고 했단다. 결국 명의 요구에 귀찮았던 태종 이방원은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 손에 들려 보내줬다고 한다. 이후 금탑의 행방은 묘연하다. 만일 남아 있었더라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국보가 될 자격이 있는 귀중한 문화재였을 텐데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조선시대 유생들의 반달,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국보로 지정되기도 전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보자. 명나라 황제가 탐을 낼 정도의 보물인데 조선시대 유생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 인민군들, 도굴꾼들이 환장을 안 할까?
2.1 흥왕사의 변
공민왕 12년(1363)에 김용(金鏞)이 흥왕사의 행궁(行宮)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 시험에 H의 변이라고 나오면 누군가는 혼노지의 변을 써서 국사선생님을 빡치게 할 것 같은 이름
흥왕사의 난이 있기 2년 전인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이 피난을 떠난다. 김용, 정세운, 최영 등이 홍건적을 물리치자 공민왕은 개경으로 돌아와 흥왕사에 머물게 된다. 당시 총사령관인 정세운의 공을 시기했던 김용은 왕의 명령서를 위조해서 정세운을 죽이고, 다시 죄를 뒤집어씌워 나머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밤에 병사 50여명을 이끌고 공민왕을 죽이기 위해 흥왕사로 쳐들어갔으나 왕과 얼굴이 비슷한 안도치가 대신 죽게 되었다. 김용은 후에 최영이 토벌하여 평정되었다.